제29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078

​ 원래 다 그런 건 없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정희연

 

  내가 졸업한 학교에는 <고전 읽기와 토론>라는 이름의 강좌가 있다. 이 강좌는 교양필수 과목으로서 영어나 컴퓨터 수업과 마찬가지로 전공을 막론하고 수강을 해야지만 졸업이 가능하다. 지난해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학내 커뮤니티가 꽤 소란스러웠다. <고전 읽기와 토론> 수업은 담당 교수의 재량에 따라 고전들이 선정되는데, 학생들이 의문시했던 것은 한 교수의 <고전 읽기와 토론> 수강계획표에 해당 학기 읽을 ‘고전’으로 <82년생 김지영>(이하 <김지영>)이 선정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고전 읽기와 토론>의 주제로 <김지영>이 가능한가’를 질문하는 게시글에는 ‘고전이라는 정의와 범주’를 논의하는 댓글에서부터 ‘담당 교수가 페미니스트더라’라는 댓글까지 다양했지만, 거의 모두 한 방향으로 합치되는 듯했다, ‘<김지영>은 <고전 읽기와 토론>에서 논의될 주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으로.
  난 그즈음 학위과정을 수료했고, 30대가 되었으며,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다. 작년 그 교수의 <고전 읽기와 토론>에서 정말 <김지영>이 고전으로 다뤄졌는지 여부는 확인하진 못했다. 그리고 나는 학내 커뮤니티에서 일던 논란에서 1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김지영>을 읽었다. 그간 내게 있었던 ‘30대가 되었으며,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다’는 수식어들의 첨가는 <김지영>을 읽는 데 격한 공감을 일으키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고전의 엄밀한 정의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김지영>이 <고전 읽기와 토론>의 주제가 되기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지만, 이 소설이 ‘여성’을 다루고 있는 ‘여성주의’ 소설이기 때문에 수업의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실 <김지영>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상세한 르포이지만 동시에 우리네들이 살아왔던 ‘사회’에 대한 거시적인 르포이기도 하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각종 수치와 통계 자료들을 통해 사회는 단지 후경이 아니라 지영과 함께 시간을 거친 또 다른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선다. 각 장이 연 단위로 나눠져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가령 1982년에서 1994년과 2001에서 2011년은 물론 지영의 일생을 거칠게 나눈 조각들일 테지만, 그 조각들 속에서 우린 ‘그땐 그랬지’를 읊조릴 수 있다. 지영의 엄마의 시대에는 “세상이 변했다. 전통적인 농업 국가이던 한국은 빠르게 산업화되었고, 예전처럼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 수 없게 되었다”를, 지영의 언니 은영이 대학을 갈 즈음에는 “이미 공무원과 교사가 인기 직종으로 떠오른 후였고, 교대의 커트라인은 치솟을 대로 치솟아 있었다”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도, 그 사회 속의 지영과 그녀의 가족까지도 함께 관조할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른 사회 속에서도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고리타분한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데 있다. <김지영>을 읽으며 나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으악!’이라는 메모들을 남겨야만 했다. 내가 종종 의성어를 내며 참을 수 없었던 건 82년생 김지영이 ‘여자이기 때문에’ 겪거나 들어야 했던 사건과 이야기에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 더 정확하게는, ‘늘 당연하다는 듯 여겨지는 사태들’에 대한 적나라한 적시 때문이었다. 사회와 지영의 시간은 흘러갔는데, ‘원래 다 그래’라는 투의 관성들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2018년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 우리는 왜 자연스럽다고만 여기며 질문하지 않았던 걸까?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에 대해? 새 생명은 축복이면서, 새 생명을 준비하는 월경은 “귀찮고 아프고 왠지 부끄러운 비밀”인지에 대해? 밤에 낯선 치한을 만난 게 마치 피해자의 외모나 귀가 시간의 문제로 와전되는 것에 대해? 윗사람의 아량 넓은 충고랍시고 외모에 대한 지적에 대해? 
  나는 <김지영>을 둘러싼 담론들이 ‘여성’으로만 점철되는 데 거부감이 있다. 작가는 사회 속의 보편적인 여성들이 ‘원래 다 그래’를 불러오는 근대적 사고 속에서 일정한 정도 희생양이 되어왔음을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만 더 시야를 확장해서 ‘여성들이 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대신에, 우리의 일상에서 ‘원래 다 그래’라는 폭력의 논리로 너무 쉬이 재단해버리는 다양한 문제의 지점들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아재들은 다 그래, 틀딱들은 다 그래, 급식들은 다 그래, 지잡대생들은 다 그래, 맘충들은 다 그래, 선생들은 다 그래, 경찰들은 다 그래, 동성애자들은 다 그래, 개독들은 다 그래. 정말 다 그럴까?
  <김지영>은 ‘고전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을지 몰라도, ‘토론’에는 적합한 소설일 테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132면). 우린 그 바뀌지 않은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김지영>은 특히 사회 속의 여성들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이제 그것을 발판 삼아, 82년생 ‘여성’ 김지영만을 볼 것이 아니라 82년생 ‘모두’ 김지영을 보아야하지 않을까. 여전히 ‘원래 다 그래’라는 폭력적 기제 속에 놓여있는 모든 타자들과 소수자들과 약자들에 대해. 김지영이라는 이름 아래 치환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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