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525

외치는 소리

정유진


  82년생 여성인 내게 <82년생 김지영>은 특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녀와 내 인생의 유사성은 때로, 작가가 유년시절의 일기장을 들여다보고 쓴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이 소설은 제목의 조어방식에서부터 많은 것을 말해준다. 대개 연도를 의미하는 숫자를 제목으로 하는 소설은, 숫자가 가리키는 시대의 사회상을 드러내는데 주력하고, 사람이름이 제목인 소설은 특정인물의 삶을 다양한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이 주된 서사가 된다. <82년생 김지영>은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플롯은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대기적 구성을 따르면서, 동시에 김지영이란 여성의 삶을 구축하는 배경인 80~9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성비 불균형, 외환위기 등-을 주목한다. 김지영이 생애주기 동안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의 병렬로 이루어진 플롯은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구조가 얼마나 흥미롭게 정립되었느냐가 아니라, 여성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여러 경험들이 김지영의 인생에 자신도 모르게 드리운 명암과 무게이다.
  작가는 82년에 태어난 여자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붙여진 이름 ‘지영’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세상에 셀 수 없이 다양한 이름이 있는 것만큼 우리가 수많은 ‘동명이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흔한 것은 이름뿐만이 아니다. 주인공의 인생 또한 대한민국에서 별다른 의외성 없는 생애주기를 거친 30대 여성 가운데 누구의 삶과 바꾸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보통 소설 주인공에게서 여느 일상인과 구별되는 독특한 매력이 없다는 것은 약점으로 지적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흔한 이름을 가진 김지영이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시대의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고 있기에 좀 더 가깝게 김지영이 겪는 차별과 고통을 내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연대의식이나 세대적 공유감은 남성독자들보다는 김지영의 삶에 깊게 공감하는 여성독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을 호명하며, 그들 각각의 이야기를 의미 있게 조명하려고 애쓴다. 반면 남편 정대현을 제외하면 남성들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다. 남성인물들이 악인 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인물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선량해 보이는 그들이 무의식적인 이기심과 편견을 드러내는 순간 더 큰 실망과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이름 있는 남성인 정대현의 경우 아내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다정한 남편이지만, 김지영이 결혼하면서 포기해야하는 직업인으로서의 권리와, 육아의 고단함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결혼과 출산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기에 책임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제는 선택의 책임이 성별에 따라 ‘다른 무게’로 짐지워진다는 데 있다.
  명절에 시누이가 친정에 올 때까지 시댁에 발이 묶인 채 집안일을 해야 하는 김지영의 처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여성에게 결혼이란, 남녀 가족이 상호 균형적인 관계를 맺는 결합이 아니라, 남자쪽 가족 구성원으로 여성이 종속되는 가부장제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되새긴다. 김지영이 출산으로 잃게 되는 소중한 가치를 언급하며 당신이 잃는 것은 무엇이냐고 남편에게 호소할 때, 정대현은 자신에게도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항변한다. 남편의 이런 태도에는 밖에 나가 돈을 버는 스스로의 노고와 부담감에 대한 토로가 있을 뿐, 자신의 사회활동이 가능하도록 가정에서 뒷받침하는 아내의 노동과 공은 삭제되어 있다.
  ‘경제적 비용을 남자가 주도적으로 지불한다’는 가부장제의 전제조건은, 집에서 놀면서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커피나 사마시는” 팔자 편한 ‘맘충’과 같은 그릇된 인식을 양산한다. 김지영의 어머니 오미숙이 부업을 해서 가계를 돌본 것처럼 실제 대부분의 기혼가정에서는 부부가 경제부담을 나눠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된장녀, 김치녀, 맘충 등 돈과 관련된 비하적 관념은 유독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그 자체로 남녀 사이에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의문을 품지 않고 체념해온 어떤 불평등, 차별과 혐오를 수시로 맞닥뜨리면서도 그와 같은 억압이 너무 일상적인 탓에 현실의 부조리함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고, 명백한 불평등이라고 말한다. 문학이란, 자신이 현재 서있는 자리에서 가장 익숙한 현실의 부조리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소설 <외치는 소리>에서 ‘모든 사람이 너무 늦어지는 구조를 고대하는 공포의 시대에는 누군가 아득한 구원을 찾아 외칠 때, 그 외침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자기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고 쓴 적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향한 열광은 김지영의 외침에서, 자기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스스로의 목소리를 전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나 또한 그 절실한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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