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353

최선이라는 유혹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고 

 

류호성

 

이른 아침, 고향으로 가는 국도변.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투명하게 반짝인다. 바람이 한 번 일면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색색의 코스모스가 물결처럼 일렁이고, 흩날리는 머릿결 사이로 햇볕이 쪼개져 세상이 분부시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어보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만져진다. 세상은 온통 빛과 소리와 향기로 빼곡하다. 이 환희에 찬 생명의 활동들은 내가 살아있고,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아~ 살아있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풍 같은 외출은 고향의 뒷산, 볕 좋은 곳에 나란히 묻힌 엄마, 아버지 산소를 찾아 벌초하러 가는 길이다.
  산소로 이어지는 좁고 경사진 길은 여름의 땡볕과 장맛비를 머금은 온갖 풀들에 막혀 있고, 우리 형제들은 없어진 길을 다시 만들어 내느라 한참 애를 먹는다. 무성하게 자라난 망각의 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얽히고설킨 넝쿨 줄기 아래 봉분의 모습으로 고요히 잠들어 있는 엄마,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예초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고, 낫질이 이어지면 잡풀 속에서 모습을 잃고 있었던 엄마 아버지의 봉긋한 무덤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낸다.

  무덤 주변으로 흩어져 마저 쳐내지 못한 풀들을 손으로 뽑아내며 한숨을 돌린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형제들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부모님과 함께했었던 오래된 기억들을 떠올린다. 새벽길 나서던 엄마의 부지런함과 아버지의 담배냄새와 기침소리. 우리는 아직 살아있어 부모님의 모습들과 그 소리들과 그 냄새들을 기억하며, 이젠 무덤이 되어버린 그들 앞에 마주섰다. 그리고 나는 둥글게 쌓아올린 두툼한 흙 아래, 피부는 썩어 없어지고 몇 조각 뼈로만 남아있을 죽음의 민낯을 생각한다. 죽음은 너무나 선명하고 추호의 모호성이 없다. 화장터에서 소각되거나, 흙속에서 썩게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세상에 아름답거나 좋은 죽음이 있기는 한 걸까? 아니 그런 죽음은 없는 것 같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라는 전제가 깔리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우리가 알았던 모든 것, 지금까지 들었던 온갖 생각, 내가 사랑하거나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사람이 죄다 사라진다니, 영원히, 영원히 사라진다니... 그런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비슷한 이유로 죽음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이 ‘영원’이라는 것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나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엄마 무덤 옆에 앉아 은사시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뭉쳤다가 흩어지는 하얀 구름을 바라본다. 그리고 오래된 이별의 슬픔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퇴색되어 더 이상 슬프지 않는 내 비정함을 생각한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엄마가 맞이한 임종의 순간이 더 인간적일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후회였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의 저자 샐리는 병원에서 완화의료팀의 간로사로 일하면서 직접 보고 겪은 ‘죽음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죽음을 앞둔 환자는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히 가지고 있던 모든 인간적인 것을 박탈당한다. 옷을 입은 채 배설하면서 느끼는 노인환자들의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가족들마저 놀라게 되는 환자의 흉측한 외양. 이런 환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제 죽은 자들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환자나 가족들이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들이다. 샐리가 책을 통해 하고자하는 이야기도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환자와 그 가족들이 가져야할 마음의 준비자세에 관한 것이다. 인간적인 죽음과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한 조언들 말이다. 죽음이 선사하는 다양한 이별의 순간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결코 아름답지도 현명하지도 못했던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엄마의 암 선고는 평화로운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침략자 같았고, 가족들은 처음 겪어보는 암 환자의 등장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기만 했다. 엄마는 반복되는 수술과 치료에 고통스러워했고, 우리는 의사가 어떤 조치를 취해주기만 바랐다. 치료만 하면 천 년을 살듯이 병원에 매달렸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순서를 정해 엄마의 병상을 지키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2년이 넘는 길고도 질긴 투병생활이었다. 엄마는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임종의 순간, 두어 시간 정신을 잃은 뒤 숨을 거두셨다. 결국 우리는 “엄마 그 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 편히 쉬어!” 란 말 한마디조차 전하지 못 했고, 엄마 역시 “잘 있어!”란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했다. 앞으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을 이별의 말 한 마디, 잘 가란 손 짓 한 번 나누지 못한 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말았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에게 죽음의 시간을 언급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빛을 밀어내고 스멀스멀 밀려드는 밤처럼 결국 죽음은 오고야 만다. 시간이 허락할 때, 우리는 현실로 다가 온 이별의 시간을 인정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었다. 계획하지 못한 우리들은 엄마에게 남은 앞으로의 시간을 엄마가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 혹시 엄마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없는지 물어 보지 못했다. 또한 병원의 약물치료과정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하는지,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익숙한 자신의 집에 머물기를 원하는지도 물어 보지 못했다. 치료 말고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도 선택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택의 자유’ 말이다. 중증노인환자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거나, 치료만 잘 받으면 다시 건강해 질수 있다고 치료를 종용하는 자세는 환자와 가족 서로에게 더 힘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히려 평화로운 이별을 위해 죽음을 수용하고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가 더 나을 수도 있다. 비록 문 밖에 서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더라도 “저 잠간 나갔다 올게요, 이제 내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셔도 돼요.” 라며 잠시 자리를 비울 수도 있는 수용의 자세는 어떤가. 보호자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환자가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초연한 죽음의 선택도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위대한 이별방식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몰랐다.
 
  샐리는 그녀의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통해 “질병이나 죽음은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언젠가 찾아 올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하라.”는 짧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임종의 순간’은 환자와 가족들의 계획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엄마와 가졌던 마지막 이별의 시간들이 후회로 가득했기 때문일까, 제발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작가의 바람이 책을 읽는 내내 고마움으로 다가 왔다.
 
  벌초를 끝내고 깨끗하게 이발된 엄마의 무덤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픔으로 뭉쳐 있었던 이별의 말을 마음속으로 풀어냈다. “엄마, 잘 가란 인사도 못하고 엄마를 보내서 정말 미안해.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웠어.” 엄마에게 전하지 못했던 나의 인사는 결국 20년도 더 지나 엄마의 무덤 앞에서 혼자 속삭이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부모님 산소를 뒤에 두고 다시 내려가는 길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를 몇 바퀴 선회하다가 뒷산으로 다시 사라졌다. 문득 “세상에 좋은 죽음은 없다, 다만 좀 더 인간적인 죽음, 좀 더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 뿐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볕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대추이파리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대추는 알알이 굵어지고 있었다. 곧 찾아 올 가을은 겨울을 예감하며 나뭇잎과 작별할 것이고 나는, 나에게 찾아올 새로운 이별을 예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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