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361

너무 미우면서도 애틋한 나 자신에게
- 안시내,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을 읽고 -

 

박수정

 

유난히 덥고도 길었던 지난여름의 교생선생님과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교생선생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을 전해주고 싶다고 하셨고 고등학교 졸업 후 떠난 배낭여행 이야기를 말해주셨다. 그리고 배낭여행의 계기로 이 책,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을 소개해주셨다. 이것이 나와 이 책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난 그 만남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 당시의 나는 여행에 미쳐있었다. 학교와 집,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너무 답답했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던 17살과 18살의 사이를 방황하고 있었다. 방학이면 각종 SNS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여행 사진, 좋아하는 여행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을 볼 때면 너무 부럽기도 하다가도 울컥한 감정들이 올라왔다. “나도 여행 진짜 좋아하는데, 왜 나는 저렇게 가족들과 그 흔한 당일치기 여행도 가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좋아하는 여행 한 번 못 가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그래서 교육청이나 교류 협회에서 주관하는 해외 교류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시험이나 면접 같은 것들에 목숨을 걸었고 합격을 한 후 떠난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도 재밌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행이 아니라 ‘공짜’ 여행에 미쳐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반갑지 않았다. 남들이 쓴 화려하고 멋진 여행들에 관한 책을 보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 봐. 내가 그토록 노력해서 떠난 여행이 비참해질까 봐. 그렇게 지나가는 책이 되려는 순간, 표지의 제목 위에 적힌 “350만 원 들고 떠난 141일간의 고군분투 여행기”라는 문구가 계속 눈에 밟혔다. 왠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충동적으로 이 책을 구매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는 데에는 하루가 걸리지도 않았고, 이 책이 나의 인생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할지 느낀 것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편 책의 첫머리에서 마주한 안 지내 작가의 어린 시절은 어쩐지 나의 모습과 비슷했다. 꽤나 유복했던 초등학교 시절, 그러다 순식간에 맞닥뜨린 가난, 아빠가 없어 놀림당했던 중학교 시절, 그리고 ‘바보처럼 행복한 아이’라는 수식어까지 어쩜 이렇게 나와 비슷할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일그러진 모습들이 싫었다. 그래서 ‘밝음’, ‘씩씩함’이라는 포장지로 나를 감춰왔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아무도 나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린 시절부터 단련한 밝고 씩씩한 모습은 아무리 벗기려 해도 벗겨지지 않았다는 걸 나는 느꼈다. “여기 이곳에 가슴이 썩어 문드러져서 잔뜩 아파하는 내가 살고 있다고.”라는 구절이 가슴을 후벼팠다. 지금 나의 모습 같아서 책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미워했던 것은 가족, 학교, 친구, 가난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이 책의 첫머리에서 직면했다. 펑펑 우는 와중에 든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이 책의 끝에 비로소 발가벗은 나를 마주할 수 있겠구나. 무언가 달라진 내 인생을 살아가겠구나.”라고 말이다. 작가는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에 여행을 하겠다고. 비록 힘들고 지치는 삶을 살지라도 내 인생에서 가장 예쁜 나이에 1년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겠다고.”라는 여행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휴학을 한 뒤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 돈을 모으는 도중 어머니의 암이 재발하여 악착같이 벌었던 돈을 수술을 위해 집에 주고 수중에 남은 돈이 350만 원밖에 없는 상황에서 작가는 무작정 떠났다. 그 이유는 정말 놀랍고도 단순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다시는 떠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행은 환호성과 탄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여행은 삶보다 더 진한 삶이었으며, 인내였으며, 열악한 비포장도로였다.” 작가는 350만 원과 배낭 두 개를 매고 141일간의 긴 여정을 떠났다. 그녀는 말레이시아, 인도, 모로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 태국 총 8개국에서의 에피소드를 이 책에 담아냈으며 책의 중간중간 여행에 대한 소소한 TIP들을 적어놓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작가와 함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말레이시아 도착해서 길 한복판에서 들뜬 마음에 춤을 출 때, 인도 우다이푸르에서 정들었던 싸마디와 헤어질 때, 이탈리아의 부자 세쌍둥이와 함께 대저택에 들어가던 순간까지도. 모든 순간들이 벅차올랐고 함께 설레었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조드푸르의 스카프 가게의 종업원이 그녀를 성추행했을 때는 너무 화가 나면서도 그녀가 어떻게 대처할지 너무 궁금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나라 인도에서 말이다. 내 걱정과는 달리 작가는 용감했다. 그녀의 사과 요구에도 사장과 종업원은 가볍게 여기며 넘어가려 했지만 그녀는 꿋꿋이 그들의 사진을 찍으며 한국 관광객이 주 고객인 이곳에서 당한 일을 한국 사이트에 올리겠다고 말하며 밤새 인도어로 외웠던 말을 한다. “네가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외치고 나온 뒤 그녀는 한참을 울며 생각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 서 있으며 이곳에는 나를 지켜줄 어떠한 것도 없다.” 그러한 극한의 상황에서의 그녀의 용기가 너무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이 구절에서 여행에서 그녀가 느꼈을 깊은 우울함과 공허함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성장통을 함께 겪으며 책의 마지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글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망원경이 돼주었다. 여행은 모두 즐겁고 화려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나를 여행에서 느끼는 고독, 우울, 고통과 마주하게 해주었다. 작가의 솔직하고 따뜻한 글솜씨 때문인지, 내가 그토록 바라던 여행에 대한 이야기여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책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작가와 수많은 감정들을 공유했다. 아마도 그녀의 여행이야기는 사람에 관한 것들이라 그럴 것이다. 이 책에는 사하라 사막의 숨 막히고 압도적인 경치에 대한 내용보다, 어느 지역의 맛있었던 음식에 대한 내용보다 슬리퍼 기차의 꼬마 무임승차자와 길가에서 만난 바라나시의 열 살의 성인에 대한 내용의 비중이 더 컸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 더 마음이 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으며 점점 자신을 찾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기특했다. 책의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어느 한 장면도 슬픈 부분이 없는데도 말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 책을 들고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 여행의 끝에서는 비로소 벌거벗은 나를 사랑해주는 내가 되어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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