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629

김훈의「연필로 쓰기」,퇴사 후 읽기 좋은 책

 

김영규


 어제 퇴사했다.
 질질 끌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뛸 듯이 기뻐야 할 텐데 이건 뭐 영 싱숭생숭한 것이 찌뿌드드하다. 사장이라는 자가 그렇게 쉽게 내 퇴사를 받아줘서 고맙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 사직서를 썼다.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함”이라고 써 놓고 내려와 차에 앉으니 억울하고 분했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이유를 다시 작성했다. “잦은 근무지 변경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장님의 화와 짜증을 견딜 수 없어 퇴사 함”이라고 적었다. 적어 놓고 계단을 내려오는 몇 초 동안은 속이 후련하고 뭔가 골탕을 먹인 것같이 통쾌했는데, 그것도 잠시. ‘혹시 사장이 열 받아 퇴직금을 안 주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후회까지는 아니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된다. 아이씨,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함”이 더 깔끔하고 단정한데...

“나는 나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에 당당하려 한다. 나의 이야기가 헐겁고 어수선해도 무방하다.” (p.5)

 퇴사를 하고 난 후 처음 읽게 된 책이 김훈의 책일 줄이야. 나는 또다시 그의 글과 표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1도 없다. 엄청난 위로를 받는다. 치밀하고 빽빽한 그의 단어의 배열과 배치는 숨이 넘어갈 듯 가파르지만 기어코 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가볍게 읽고 싶었다. 가볍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가 헐겁고 어수선해도 무방하다.”라는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큰 위로가 되었다. “괜찮아, 걱정 말고 좀 쉬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겨울이었다. 하늘이 찢어질 듯이 팽팽했다.” (p.343)

 한 겨울에 맞는 갑작스러운 팽팽한 하늘.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 본 일이다. 본 하늘이다. 하지만 김훈처럼 표현하지는 못한다. 찢어질 듯 팽팽한 겨울 하늘이라는 표현으로 긴장감을 배가 시킨다. 퇴사를 한 후 텅 빈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 책은, 글은 그대로 내게 투영된다. 굳이 나를 투사할 수 있는 문장과 단어를 찾지 않아도 눈에 툭 하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사실, 김훈의 글과 단어는 거의 다 눈에 툭 하고 들어온다. 너무 많아서 탈이다. 위로를 받고 힘을 낸다.
“물렁하고 아리송한 문장으로 심령술을 전파하는 힐러healer들의 책이 압도적인 판매량을 누리는 독서풍토에서 외상외과의사 이국종 교수의 저서 「골든아워」에 모이는 독자들의 호응을 나는 기쁘게 여긴다.” (p.376

 이국종 교수 이야기가 나와 반가웠다. 「골든 아워」는 진작 읽었다. 평소 그의 인터뷰나 유튜브 영상을 보며 말을 짧게 하고 단어 선택이 치밀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역시 김훈의 팬이었다. 그의 글에서 김훈의 냄새가 났다. 이국종 교수가 자신의 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김훈은 이 책에서 이국종 교수와 그의 책을 소개하고 칭찬한다. 부러웠다.
 “물렁하고 아리송한 문장으로 심령술을 전파하는 힐러healer들의 책” 한참을 웃었다. 시원하게 웃었다. 자기계발서 말고는 적절히 표현할만한 것을 찾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명확하게 할 말을 찾았다. ‘물렁하고 아리송한 문장으로 심령술을 전파하는 그런 책 볼 필요 없어. 김훈 작가 알지? 차라리 그 사람 책 읽어~’

“그는 현실과 사명 사이에 찡겨 있다. 내 눈에는 그가 중증외상환자처럼 보인다.” (p.376)

 「골든아워」를 읽고 내내 답답했던 마음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출구를 찾지 못하는 무저갱 속에 던져진 그들을 향해 흔한 파이팅 조차 하기가 미안했다. 김훈의 눈에는 그들이 중증외상환자처럼 보였다니. 역시 한 문장으로 해결해 낸다. 글과 표현의 힘이 넘친다. 그래서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도 스며든다. 알게 모르게 그의 것을 따라하게 된다. 가랑이 찢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겨우 쓰는 글은 오직 굼벵이 같은 노동의 소산이다.” (p.345)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글을 겨우 쓴다니. 아리송하고 약 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문장 또한 위로가 되었다. 그도 겨우 쓴다는데, 나는 뭐. 이정도면. 겨우 쓴다는 그의 너스레를 흘려 보지 못하는 건 내 초라한 글쓰기를 위로하기 위함이다. 습관이고 취미가 아니라 노동이라 여기고 굼벵이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이어가야 한다.
 퇴사를 하고 이틀이 지났다. 아직은 좋다. 맞지 않는 옷을 5년 동안 입고 있었더니, 원래 뭐가 내게 맞는 옷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잃어버린 것도 많다. 세월은 첫 번째고. 건강도 많이 상했다. 회복하려면 쉬어야 한다. 아내와 충분히 대화한 후 한 달 정도 쉬기로 했다. 근데 분명 1주일만 지나면 또 불안해 할 게 뻔하다.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더 쉬는 게 맞나? 아내가 안 그런 척 하지만 너무 힘들어 하는 거 아닌가?’ 귀 막고 눈 가리고 살아야 한다. 퇴사 후 첫 번째로 읽은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충분히 나를 위로하고 토닥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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