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845

소금이 아닌 연고를
당신이 옳다를 읽고

 

김규리


 아쉽게도,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겪었던 아픔들을 떠올리려 해도 어렴풋한 잔상만 남을 뿐 정확히 기억해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뚜렷하게 기억되는 몇 가지의 상처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와의 상담으로 인한 것이다. 사실 상담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많은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그런 것처럼 평범한 성적 이야기일수도 있고, 흔하디흔한 인간관계 문제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상담 이후의 내 상태는 오롯이 기억한다. 상담을 듣는 내내 그 친구가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강제적으로 발을 딛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속에서는 답답함만이 가득 차올랐고 나는 그것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급급했을 뿐이었다. 허나 그 노력은 친구 입장에서는 부족했었고, 결국 한숨과 ‘내가 뭘 바라겠어’ 같은 말로 상담을 끝맺었던 것 같다.

 상담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서는 평소에는 펼치지도 않는 일기장에 내 역한 감정들을 가감 없이 토해냈다. 자그마치 두 세장을 분노의 찌꺼기를 묻히는 데에 썼고, 주된 내용은 ‘나는 이해할 수도 없고, 조언할 수도 없는 것에, 그것도 별 것 아닌 문제에 내 시간과 감정을 갖다 쓰는 것이 불쾌하다’였다. 아마 그 상담 이후부터 나는 상담자가 되기를 꺼려했던 것 같다. 사이코패스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공감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한정적이며, 공감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을 내리며 살아왔다. 영화나 소설 주인공의 입장에는 공감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며, 아예 공감 능력이 상실된 건 아니니 괜찮은 게 아닌가 하는 합리화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공감에 대한 나의 비뚤어진 생각에 이 책의 저자는 단순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아니’라는 말을 던졌다. 공감이란 ‘누가 이야기 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던 나에게 이는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나에게 있어 감정 노동을 상담에 대입한다면, 상담자에겐 그저 상담 그 자체가 감정 노동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듣는 이에게는 꽤 차갑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열리지 않는 즉, 자발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상담이란 잘 쳐봐야 봉사, 혹은 ‘감정 노동’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상담자로서의 나는 쉽게 ‘지쳤다’, 눈을 질끈 감고 버티다 ‘한계를 맞았다.’ 저자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사람은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담자의 마음에 집중하기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적절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문제는 핵심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 안에 파묻혀 있었고, 그 친구가 원하던건 충조평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세상사 이야기에서 ‘그 자신’의 얘기로 돌려줄 필요를 거듭 언급한다.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논쟁과 설득이 아닌 ‘당신’ 그 자체에 대한 주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했는가. 당시 내 몸은 그 친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우리의 마음은, 아니 나의 마음은 친구를 향해 있지 않았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보듯 증상으로써 병명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처방전을 제시하는 데만 내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하기까지 얼마나 속이 곯아 있었을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에 먼저 손을 내민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할 만하지만 아마 그 친구에게 있어서 더 큰 치부는 내가 보인 싸늘한 모습일터다. 안 그래도 힘들었을 친구의 마음에 소금을 뿌린 듯한 느낌이 들어 너무나 미안하다.

 이제는 그 친구와 연락이 끊긴지 몇 년이 지났고 이후로는 상담자로 지낸 적은 없었기에 다른 희생자는 없다 하지만 분명 앞으로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상담자의 자리에 오를 기회가 찾아 올 것이라고 느낀다. 대학에 들어오고 작은 사회를 경험하면서 그럴 기미가 종종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작은 두려움을 느끼고 성급히 그 자리를 피하기 마련이었으나 그러한 대처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렇게 ‘공감’에 있어서는 유아 수준인 나에게도 공감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저자는 여러 팁들을 제시해 주었다.

 자기 결론이 담긴 채로 하는 질문을 피하라, 다르게 느끼더라도 기꺼이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라, 요구하고 기대하는 마음 없이 상대방의 존재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주목하라 등 도움 되는 여러 요소들을 구체적인 상황에 대입해서 설명해 주었지만 나에게 여전히 공감은 두렵고 어려운 영역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 가운데에서 힘이 되는 구절이 있었다. 3-2장 제목인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 그것이다. 평소에는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치가 떨리지만 공감의 영역에 있어서만은 ‘학습이 필요하다’는 말이 기쁘다. 나는 여전히 공감의 선천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공감의 실습을 통해, 공부를 통해 후천적 능력을 키워나가고 싶다. 이 능력이 나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지름길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행복의 박씨를 물어다주는 제비도 아니지만 이제는 소금이 아닌 연고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이제는 피하지 않고 두 눈 맞추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제는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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