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349

내가 늘 추구한 건 딱 한 가지, 내츄럴 리액션이었어
『디어 에번 핸슨』을 읽고

 

정현경

 

행동하기 전에 생각 먼저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 내 화두는 늘 내츄럴 리액션, 즉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웃을 일에 웃고 슬퍼할 일에 슬퍼하고 분노할 일에 분노하고. 학교에서는 이런 집단 반응에 빠르게 동참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상담실에 불려 가기 십상이다. 그러니 '반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그 잔혹한 정글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생각을 무리하게 꺾거나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웃을 일에 웃고, 슬퍼할 일에 슬퍼하고,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웃느냐, 어떻게 슬퍼하느냐, 어떻게 분노하느냐다. 생각과 행동의 거리가 무척 먼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예로 들면 이렇다. 만화 속 주인공들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그래서 나는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꼭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왕이면 푹신한 것으로. 눈물 자국도 반드시 남겨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나는 조금 망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또,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화가 날 때마다 문을 쾅 닫고 방에 들어간다. 나도 화 같은 게 나면 꼭 그렇게 했다. 그런 행동이 엄마 마음을 후벼 파는 게, 문에 충격을 가하는 게 살짝 겁나긴 했지만, 순간 공식처럼 떠오르는 반응이 있는데 그걸 안 하고 가만히 있기란 무안한 일이다.
문제는, 이런 반응 외에 남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거였다. 만화와 드라마가 왕왕 생략하는 시간들 말이다. 시시하고 의미 없고, 어떤 중요한 사건의 발단도 될 자격 없는 장면들이 하루를 빼곡히 차지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내가 학습한 자연 반응으로 때울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단 30분, 아니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23시간 50분은, 어쩌면 이야말로 자연의 시간인데, 자연보다 한층 더 자연인 개념을 생각해보면…… 그냥 '날 것'의 시간이었다.
여전히 그렇게 얼렁뚱땅 자라고 있는, 뭘 해도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한 존재들은 <디어 에번 핸슨> 같은 소설이 격하게 반갑다. 자연 반응에 번번이 실패하는 인물이 등장해 '날 것'의 시간을 살아주기 때문이다.

 

내 어설픔 지수는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숫자와 정비례한다. 대략 스물다섯 쌍의 시선이 꽂히자 나는 끼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어서 뒤의 책상과 부딪히게 만들고, 지퍼를 열어놓은 내 배낭을 차서 바닥에 내용물을 쏟고, 통로를 지나는 동안 누군가의 발에 걸려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다. (66쪽에서)

 

언내츄럴, 부자연을 가장 생생하고 끈질기게 의식하는 것은 본인이다. 뻣뻣한 몸동작으로부터 차오르는 수치스러움을 실감하는 것도 본인이다. '나 지금 자연스럽지 못하구나'라는 생각은 행동하기도 전에 망했다는 예감부터 준다. 망했다는 예감이 다음 행동의 동기가 된다. 액션이야 안 하면 그만이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리액션으로라도 승부를 봐야 하는 사회적 존재다. 타고난 대로 유령처럼 살고자 하는 에번에게도 꼭 다가와서 어깨를 부딪치거나 등을 밀치거나 불쑥 끼어들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후에 수만 명이 주목하고 수만 달러가 동원되는 '코너 프로젝트'의 발단은, 허무하게도, 에번이 그저 자연 반응을 잘 못 하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버거운 이들은 이야기의 힘을 빌려 살아가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숨 쉰다. 현실에서는 불규칙하기만 하던 호흡이 이야기 안에서는 제법 고르게 이어진다. 에번 역시 그가 주인공인 이야기에서만큼은 누군가의 친구도 되었고 영웅도 되었다.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해 죽음까지 생각하던 아이의 바람이 "단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변화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에번의 입장에서는.
코너의 입장은 어떨까? 에번의 동급생인 그의 자살은 후반부로 갈수록 낭만화된다. 코너를 추모하는 모금 사업 '코너 프로젝트'로 인해 에번 핸슨의 인생이 통째로 흔들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코너의 부모와 동생은 가족 간 소통이 부재했던 지난날들을 뉘우쳤으며, 그와 어설픈 연정을 나누었던 미겔은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이 프로젝트에 열광하며 응원의 댓글을 다는 익명의 사람들은 아직 우리 세상이 냉정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 아이의 자살로 집단적 각성이 이루어져 모든 것들이 더 나은 자리를 찾아가는 식의 전개는, 어쩐지 쓸쓸하다. 에번은 프로젝트의 추진을 위해 생전의 코너가 누구를 만났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꾸며내며 인생 통틀어 가장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책 중간중간에 코너의 '죽음 이후의 시점'이 등장하는데, 자살을 생각해본 이라면 떠올려봤을 독백들이 나온다. '자, 봐라, 나 진짜 죽었다고'라며 남은 자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기념사가 잇따른다. 슬라이드가 상영된다. 조이와 재즈 밴드 아이들이 공연한. 훌륭하다. 진심이다-거의 과분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하지만 습관이라 그런지, 나를 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226쪽에서)

 

죽은 코너와 남은 에번은 서로가 '다른 세계에서는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니까, 발 딛고 있던 이 세계에서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마음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던 코너는 자살 후에야 그의 감정이 낱낱이 좋은 쪽으로만 이해된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엇갈린 이해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마음으로 숨을 끊어야 했던 이의 마지막 순간을 더 외롭게 만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회적 타살'로 인한 희생자가 생겼으니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구호가 범람한다. 다만,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서도 폭력은 일어난다. 같은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도 결국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코너 프로젝트의 전개 과정을 보면 사람들의 관심사란 결국 코너가 살아 있던 때의 진실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걸 알 수 있다.

 

조금씩, 조금씩 엮은 거짓말의 거미줄이 나를 옭아맨다. 왜냐하면 진실은 너무 아프기에. 전혀 재미있지가 않기에. (362쪽에서)

 

거짓 감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코너 프로젝트의 어정쩡한 결말이 예견된다. 에번은 동급생의 자살 사건에 엮이면서 걷잡을 수 없

게 커지는 일의 중심에 서는 경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학교 아이들한테, 수많은 사람한테, 유가족한테, 무엇보다 죽은 코너에게 죄책감을 갖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일이라 믿고 프로젝트를 추진해나간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나처럼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무너지기 시작한다. 원래 '나만' 이상했는데,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도' 괜찮아지는 줄 알았더니, 그들이 점점 '나처럼' 되어버린 거다. 내가 가진 안 좋은 속성들이 전염되어버렸다는 좌절감이 밀려드는 시점에서, 그는 아슬아슬한 달리기를 멈추기로 한다.
재미있는 거짓말과 시시한 진실, 어느 쪽이 더 좋을까? 에번 핸슨, 그리고 나 역시 앞으로의 인생도 이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대개 재미는 시시함을 견딜 수 없을 때 구원처럼 온다. 시시함 또한 재미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구원처럼 온다. 신기하게도 벼랑 끝에 있을 때 모퉁이가 어렴풋이 비치는 순간이 온다. 이제 그만 모퉁이를 돌 때가 되었다고……
극단의 진실과 극단의 거짓을 오갔으니, 에번은 이제 그 사이사이의 작은 고개들을 넘는 일로는 질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에 이끌려 어디인 줄도 모르는 다음의 장소로 실려 간다. 그곳은 평화로울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다. 그렇게 떠밀리다가 깨우치는 순간이 온다. 내 이야기의 마무리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극단과 극단 사이를 오가며 허둥지둥 감내해야 했던 온갖 부자연스러운 몸짓들이 에번을 이끈 곳은, 결국 모든 이야기의 원점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조금 더 잘 살아볼 날들이 남아 있다.

 

여기저기 조금씩 쑤신 끝에 우리는 마침내 본론에 다다랐다. 이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려니 감당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417쪽에서)

Chapter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