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20103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를 읽고
- 느리게 혹은 느긋하게

 

김주애

 

나에게 시골의 삶이란 언제나 견디지 못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좋은 이랑 사이로 빼곡이 자리잡은 초록의 식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그곳에 내가 좋아

하는 차가운 커피가 들어설 여지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시골은 느림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런 애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성미가 급한 농부가 벼를 빨리 자라게 하려고 벼를 살짝 살짝 들어올렸더니 다음날 벼가 다 말라죽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무엇이든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삶과 다르게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의 저자는 외부의 환경, 관습, 시선에 상관없이 가만히 멈추고 서서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시간을 가진다.


저자는 빠르게 가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느리게 가는 것이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 변하는 않는 것에 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밤하늘의 별이나 자수를 놓는 일, 남산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들과 같이 작고 시시하고 볼품없는 이야기들의 행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외진 숲속 바위틈에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저기 저 질경이처럼 네비게이션이 없어도 우리 스스로는 누군가의 좌표가 되어줄 수 있고, 숲 밖으로 나아갈 나침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학창시절의 나로 돌아가 본다. 낮 시간에는 병든 닭 마냥 비실대다가도 야간자율학습시간이 되면 블라우스의 긴팔을 걷어부치고 공부를 하겠다고 유난을 떨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고까워했을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공부하기 전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내가 귀찮았거나 아니면 내가 믿는 신에게 괜히 부정탈까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조금만 신경을 쓰면 쉽게 체하고, 손을 따고 약을 먹고 곧잘 드러눕는 나를 잘 알아서일까. 그들에게 나는 이미 경쟁의 대상자가 아니었을 법도 하다. 그렇게 열정은 가득했지만 몸이 따라 가주지 못했던 나는 반강제적으로 느린 생활을 하며 자신을 도닥였다.


그런가하면 아버지는 도시농부였다. 도시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시골에 가 있어서 자주 오가며 재배한 농작물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와르르 쏟아낼 때면 나는 도무지 관심이 가질 않아서 애써 키운 열매와 채소들을 외면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랬던 나도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다보니 느리게 자라는 식물들에게 눈길이 간다. 올해 8살이 된 아이가 학교에서 바질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허브를 가지고 왔다. 식물의 크기만큼 앙증맞은 화분이 두 손 안에 쏙 들어와 기분 좋은 향을 냈다. 며칠 동안 아이가 틈틈이 물을 주는 날만큼 덩달아 바질도 서서히 자라갔다. 줄기 사이로 여런 가지를 내고 초록빛의 커다란 잎이 화분이 다 덮을 만큼 커갔다. 분주한 삶 가운데 한 줌의 느긋한 시간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 시간이 뿌리를 내려 어떤 방식으로 싹을 띄우고 잎을 낼까.


저자는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고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나에게 시간을 준다는 건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이나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한 시간 정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에게 시간주기’는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아무런 관심이 없던 사물과 일상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 풍경속의 나를 사랑하고 추억하는 일이다. 혜민스님은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만났다 하고, 저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게 촘촘하게 짜여진 일과를 벗어나 뒷산을 오르거나 그냥 침대에 누워 그 시절의 나에게 말을 걸어 ‘너,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아니야 이렇게 했어야지’ 이러면서 추억을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밤늦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TV드라마를 보는 일은 가끔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때로 흥분케 하지만 정신없이 흘러가는 그들의 세계는 나의 내면에 온전히 가닿지는 못한다. 이제 쉼 없이 달려온 삶을 멈추고, 여유의 정원을 가꿀 때다.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지난하게 펼쳐지는 창밖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멈추어 서 있어 보기도 할 작정이다. 그러다가 길모퉁이 어디쯤 흔들리며 피어난 들꽃을 만나, 가슴에만 간직할 추억의 한 장면을 느긋한 마음 어딘가에 담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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