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20117

투명해지는 시간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를 읽고

 

이산희


사건마다, 상처마다, 갈등마다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황톳길에 차가 지나가고 난 뒤, 그 흙먼지가 가라앉아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제대로 보인다. 이른 아침 안개가 걷혀야 사방을 분간할 수 있듯이 모든 일이 일어나면 그 후로 앞이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책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의 책장을 넘기며, 내가 성장하는 동안 큼직한 사건과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할 때마다 심리적,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이유가 바로 그 상황에서 바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책 속의 화자는 사건과 시간의 관계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어, 전하는 메시지가 간결하지만 큰 위로로 다가왔다.


이 책의 ‘나’는 아보카도를 화분에 살짝 던져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화분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고서야 잊어버린 아보카도였다는 것을 알아챈다. 우리나라의 기후에서 자라기 힘들다는 아보카도가 내버려 둔 화분에서 견딜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보내고 자라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를 왼쪽 가슴 한켠이 콕 찔러왔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가 겪었을 따돌림 경험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몇 명의 아이들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을 중학교 3학년 때의 기억. 남녀공학이었던 학교여서 여학생 인원이 남학생보다 현저하게 적었던 우리 반이 떠오른다. 그 당시 문제아들로 유명한 몇몇 여학생들이 몰리지 않게 반 배정을 해 오던 선생님들이 3학년 때 대여섯 명을 같은 반으로 배정하였다. 한 반에 남학생을 제외하면 10명밖에 되지 않았던 여학생들. 일진이라고 불리며, 남의 물건을 엄석대(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챙기고, 짧은 교복 차림의 어색한 화장을 한 그 아이들은 우리 반뿐만 아니라 전교를 휩쓸고 다녔다. 그 당시 편견이 없었던 나는 그 아이들을 나쁘게 보거나 무섭게 보지도 않고 순수하게 대했다. 그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불필요한 행동을 하거나 가식적인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대가는 처절했다.


체육 시간이면 모든 자유놀이에서 나를 제외시켰다. 우리 반 여학생들은 나를 빼고, 공을 패스했고, 뜀틀을 넘을 때 발을 걸러 넘어지게 했다. 이동 수업, 급식 시간에 늘 혼자서 해야 했다. 한계를 넘어선 은밀한 따돌림을 나 스스로 방관하자, 급기야 나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고 모둠으로 해야 할 수업에서 제외되었다.


왕따를 당하면 학교생활의 정상화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엄마는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정리해 보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은 선생님, 부모가 나서도 해결이 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을 하게 된 울음이었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명확한 사실만을 두고, 학교에서 논의해 볼 수는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학교에서 피해자가 두 명이라는 것을 알고, 학교폭력위원회를 열었다. 한 명의 피해지 친구는 헛소문까지 합해져서 손목을 두 번이나 그어 자해를 했다.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했던 그 친구는 위클래스에서 수업을 하다 졸업을 했고, 나는 중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 시간’을 기다리며 버티고 공부했다. 그 당시 육체적인 아픔까지 더해져, 가슴이 답답한 호흡곤란과 귀가 녹아내리는 아토피까지 겹쳤다. 나의 담임을 맡았던 세 명의 선생님들과 학교폭력 담당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다고 말씀하시고, 다독여주셨다. 그때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의 위로와 격려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때 그 ‘시간’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선명해진다. 시간은 그 사건과 나를 분리시켜준다.


황톳길의 먼지가 가라앉듯, 안갯길에 안개가 걷히듯 시간이 지나야 본질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겪었던 사건들은 그 상황에서 내가 허우적거리며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우적거리며 해결하려고 할수록 돌멩이에 부딪치고, 차가운 안개에 뼛속까지 흠뻑 젖어, 어른이 되어서도 불안에 벌벌 떠는 트라우마를 가졌다.


이 책의 ‘나’의 외로움과 불안증이 나와 비슷한 거 같아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사랑받으며 자란 막내이지만, 중학교 때 혹독하게 겪은 트라우마 때문이지 남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습관이 있다. 작가가 미팅 장소에서 인터뷰를 하며 옷깃에 묻은 화장품 때문에 질문에 온전히 집중 못하는 모습을 읽으며 가슴이 짠해져 왔다. 옷깃에 묻은 화장품에 계속 신경 쓰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물로 지우려다 옷이 젖어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 정상적인 보통의 사람들은 남의 옷에 묻은 얼룩에 관심이 없다. 인터뷰를 하던 담당자는 옷깃의 얼룩은커녕 작가가 입고 있는 원피스가 무슨 색인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몰두할 뿐, 남의 단점을 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남을 골탕 먹이려고 하거나 남을 따돌리려고 남의 단점을 주시해서 살피는 사람은 드물다. 나도 아직 작가처럼 옷깃에 살짝 튄 김치 국물 때문에 하루 종일 신경 쓰인 날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잘 보이지 않는 옅은 김치 국물보다 훨씬 크고 진한 나의 장점이 얼마나 많은가.


작가가 그려놓은 작은 그림들은 진실이 담긴 시간의 그릇을 느끼게 해 주었다. 다람쥐가 숨겨놓고 찾지 못한 도토리는 상수리 나무가 된다. 날이 흐리거나 밤이 되어야 나팔꽃이 핀다. 보름달이 훤하게 밝다는 것은 어두운 밤이 되어야 안다.


내가 중학교 운동장 모퉁이에 묻어두고 온 도토리 한 알, 그들이 운동장 한 가운데 던진 돌팔매들은 시간이 지나서 어떻게든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선명하게 드러날 진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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