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아직 멀었다는 말』을 읽고 - ‘모호함 너머의 말들’
주현정
『아직 멀었다는 말』은, 여덟 편의 짧은 소설들이 엮인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이다. 빼곡히 진열된 영광도서의 책장을 훑던 중, 나의 시선은 이 책에 꽤 오래토록 머물렀다. 희미한 색으로 인쇄된 책 표지의 제목엔, ‘아직 멀었다는’과 ‘말’사이의 띄워쓰기가 많이 되어 있어 다소 거리감이 있어보였기 때문이었다. 표지 제목의 희미한 색상과 거리감이 현재 모호한 나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해서, 표지 제목이 이 소설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모르는 영역』의 딸 ‘다영’과 아빠 ‘명덕’의 삶과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해가 떠있는 동안의 해는 늘 낮달만 만나서, 밤에 뜨는 달을 당최 알 턱이 없다. ‘다영’과 ‘명덕’또한 마찬가지다. 가족이지만 서로 소통을 하지 않으면, 각자의 영역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서로의 영역을 꺼내어 소통을 하여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배려와 존중, 공감일 수도 있겠다.
『손톱』의 ‘소희’는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 언니가 차례로 가출해서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롭지만 현실을 아등바등 살아내는 젊은 인물이다. 비싼 치료비에 다친 손톱도 치료하지 못하는 소희에게 필요한 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듯한 어느 할머니의 편견 없는 존중과 관심 같은 것이 아닐까.
『희박한 마음』의 ‘디엔’과 ‘데런’은 스물몇 살 즈음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 트라우마는, 노인이 된 현재의 삶에 혼동을 주고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와 희박함을 선사한다.
『너머』의 ‘N’은 2개월간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며 이질감과 소외감, 인생에 대한 모호함을 겪는다. 하지만 'N'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 아니면 도의 삶 너머 어딘가에 닿아있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친구』의 ‘해옥’. 그의 왼손엔 다이어트 식품, 오른손엔 빅 사이즈의 옷이 들려있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적이다. 다이어트를 성공하게 되면 빅 사이즈의 옷을 찾게 되지 않을테니. 그 모순은 그의 아들 ‘민수’또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가해자들까지 확장되었다.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오롯이 ‘그 분’께 모든 판단을 맡기는 ‘해옥’의 무지함과 순응.
『송추의 가을』, 어느 것이 ‘효자’이고 어느 것이 ‘뗏장 효자’일까. 진정한 효자는 부모가 살아서든 죽어서든 부모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아닐까. 소통 없이 각자의 입장만 표명하며 싸우는 형제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 가족의 모습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재』에서의 ‘그’와 ‘그레고르 잠자’, ‘제발트’는 어딘가 닮아있다. 서로 ‘잿빛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음과, 그와 대비되는 창 밖의 환한 풍경. 이 작품 속에서의 주인공 ‘그’는 어떻게든 현실감을 회복하기 위해 창 밖 풍경을 보려 애를 쓴다. 그렇게 희망을 품으며 살아간다. 그에게 희망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으나 동시에 어디에도 있는 듯하다.
『전갱이의 맛』의 그녀와 이혼했던 ‘그’는 성대낭종 수술 전과 후의 삶이 많이 달라져있다. 어떤 식으로든 말로 표현해야 했던 예전과, 궁극적인 ‘말 너머의 말’을 깨달은 지금. ‘말 너머의 말’은 묵언의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나만의 말이고, 나와 나누는 내면의 대화인 것이다.
이 소설은 여덟 작품이 엮인 책인 만큼 느낀 감정들도 많았고, 그것들은 노트의 수많은 페이지에 쓰여 남겨져있다. 또 이렇게 독서감상문을 쓰면서도, 여덟 편의 소설의 줄거리를 어떻게 최대한 줄이고 더 많은 분량의 생각을 남길지라는 불안한 마음과 함께 애를 썼던 것도 같다. 허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게 중요하게 남겨진 두 가지의 확고함은 ‘모호함’과 ‘모호함 너머’의 것들 이었다. 나는 원래 이토록 ‘모호함’과 ‘모르겠다’라는 감정과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평소 많이 쓰고 많이 느껴서 일수 도 있고, 그만큼 확신 없는 말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내면의 결핍과 생각들이 있었기에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적으로 회피해오는 삶을 살았다. 허나, 이 소설의 허구의 이야기 속 인물들이 내게 선물한 것은 현실적인 슬픔, 애잔함, 부조리함, 고달픔에 머물러 있지 말고, 더 이상 회피하지도 말라는 속삭임이었다.
살면서 무언가를 확신에 가득 찬 마음으로 가져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내 삶은 항상 모호했고, 그랬기에 불안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삶이 그러할 것도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불안함과 모호함을 딛고 어떻게든 또 다른 발을 내딛으려고 시도하는 나와 어떤 이들이 있었다. 이토록 모호한 외부의 세상과 내면의 세상 속에서 8편의 각기 다른 삶들이 주는 이야기들은, 일련의 모호함을 선사함과 동시에 그것을 딛고 나아가 모호함 너머의 것을 보라는 외침과도 같았다.『모르는 영역』의 가족과의 소통과 공감의 중요함처럼,『손톱』의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깨어있는 자각이 필요한 것처럼,『희박한 마음』의 현실과 꿈이 트라우마로 인해 혼동되어도 영혼만큼은 꺼지지 않아야할 것처럼,『너머』속 세상의 ‘모 아니면 도’의 삶의 너머 있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인 것처럼,『친구』의 내 주위에 있을 무지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순수하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할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송추의 가을』의 부모의 문제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자식의 마음처럼,『재』의 잿빛 세상에서도 품고 살아야하는 희망처럼, 『전갱이의 맛』의 말 너머의 나만의 말들과, 나와 하는 대화의 소중함처럼.
그렇게 수많은 책들이 꽂혀진 책장 속에서 이 책에 오래토록 머물었던 나의 시선은, 점차 나를 보려는 내면의 시선으로까지 옮겨졌다.
앞으로 있을 수많은 모호함에 새롭게 발을 딛을 준비를 해본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모호한 미래를 담담히 맞이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안의 모호함을 잠재우고 싶기도 하지만, 또 새롭게 발을 딛기도 싶어 하는 불완전하고 모호한 20대이기 때문이다. 이 책 표지의 희미한 색상처럼, ‘아직 멀었다는’과 ‘말’ 사이의 먼 거리감처럼. 모호함 너머의 세상은 아직 멀어 보이지만,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을 것도 같다.
Chapter
- 제31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당선자 발표
- 대상(일반부) - 한미옥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를 읽고
- 대상(학생부) - 금소담 / <윤동주 평전>을 읽고
- 금상(일반부) - 권현지 /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을 읽고
- 금상(일반부) - 이지민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를 읽고
- 금상(학생부) - 금소현 /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를 읽고
- 금상(학생부) - 전대진 /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를 읽고
- 은상(일반부) - 김주애 /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를 읽고
- 은상(일반부) - 박은정 /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를 읽고
- 은상(일반부) - 이산희 /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를 읽고
- 은상(일반부) - 주현정 / <아직 멀었다는 말>을 읽고
- 은상(일반부) - 황서영 /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면>을 읽고
- 은상(학생부) - 김다솜 /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를 읽고
- 은상(학생부) - 김아인 /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를 읽고
- 은상(학생부) - 이로은 / <휘파람 친구>를 읽고
- 은상(학생부) - 이지안 / <인간>을 읽고
- 은상(학생부) - 진수민 / <사막에 숲이 있다>를 읽고
- 동상(일반부) - 김승주 / <나는 말하듯이 쓴다>를 읽고
- 동상(일반부) - 김시범 / <더 해빙>을 읽고
- 동상(일반부) - 박경옥 /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를 읽고
- 동상(일반부) - 이동택 / <아직 멀었다는 말>을 읽고
- 동상(일반부) - 전부희 / <더 해빙>을 읽고
- 동상(학생부) - 김예은 / <맹자가 들려주는 대장부 이야기>를 읽고
- 동상(학생부) - 김원준 / <해오리 바다의 비밀>을 읽고
- 동상(학생부) - 한효주 /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를 읽고
- 동상(학생부) - 현나영 / <방구 아저씨>를 읽고
- 동상(학생부) - 황아인 / <휘파람 친구>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