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8499

정유정 『완전한 행복』을 읽고
완전한 행복, 완벽한 배신


이지민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을 찾으라면 망연히 멀어지는 관광버스를 바라보던 때를 일 순위로 꼽는다. 가을 소풍이란 이름으로 갔던 통도판타지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중간에 마땅히 들릴 휴게소가 없었기에 일곱 살 난 유치원 아이들을 들판에 우르르 내리게 해서 소변을 보게 한 후 출발하는 찰나였다. 그 버스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까만 매연을 내뿜으며 지체 없이 떠나버리는 거대한 버스가 콩알만 해지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울지도 부르지도 않은 채. 뒤이어 몇 대의 차가 무심히 지나갔고 봉고를 모는 아저씨에게 발견되었다. ‘이름이 뭐니?’, ‘어디 사니?’ 아무리 질문을 해도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아저씨는 ‘안 되겠다. 여기 일단 타라.’며 봉고에 앉혔다. 그 순간 유치원 이사장이 부리나케 달려와 막 닫히려는 봉고문을 잡고 나를 끌어안고 ‘고맙습니다’하는 인사를 하고 달려갔다.

그 후로 이사장을 마주칠 때마다 이사장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 기억이 내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그때 너 잡혀갈 뻔했잖아.’라는 말을 놀리듯이 내뱉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사실을 할머니와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피아노를 치라는 선생님의 뒤에 대고 손가락 대신 엉덩이로 피아노 건반을 짓누르는 것으로 내 감정을 표현했다. 물론 내게 돌아온 것은 ‘이상 행동을 하는 아이’란 딱지였다. 이 사실을 나를 끔찍이 아꼈던 할머니에게 말했으면 할머니는 당장 달려가 이사장의 멱살을 잡으며 ‘귀한 내 새끼한테 뭔 짓을 했노.’라며 노발대발했을 텐데. 어쩌면 그런 순간이 내겐 위로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 순간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입술을 꼭 깨무는 일밖에 할 줄 몰랐다. 

그렇게 나는 두려움이 찾아오거나 불안을 느낄 때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앞니로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참았다. 나에게 칼을 겨눠오며 자신의 첫사랑을 왜 뺏었냐고 닦달하며 살해 위협을 가해오는 친구 앞에서도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심지어 나를 추켜세우며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 앞에서도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라는 생명체를 이루는 퍼즐은 항상 아귀가 딱 알맞게 맞물린 채로 흔들림 없이 완벽해야 했다. 그게 불안과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학교에서는 어떤 선생님이라도 좋아하는 모범생으로 집에서는 둘도 없는 착한 딸로 그렇게 3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어쩌면 가장 혹독하게 완벽을 추구한 인물, 이 작품의 가장 비극적인 인물 신유나도 나 같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녀가 가졌던 ‘가족’이란 울타리의 그림은 ‘행복이 넘치고 사랑만을 속삭이는 집단’이었을 것이다. 일명 화목한 가정. 물론 그녀를 포함한 가족이란 그림은 그녀에 의해서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는 마구잡이로 모양을 바꾸는 제멋대로 콜라주 같다. 맘에 들지 않으면 그림 전체를 불태워버리기 하고, 무참하게 찢어버리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다. 

어렸을 때 자신을 조부모 집에 맡겼다는 이유로 신유나의 욕구나 갈망은 오직 열등감이나 패배감을 바탕으로 단단히 똬리를 틀고 그녀 안에 자리  잡았다. 그에 의한 보상심리로 그녀는 그녀만의 ‘완전한 가족사진’을 구상했고 완전한 행복은 완벽한 잔인함으로, 복수로 그녀의 자기합리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는 남편을 살해하고 자신의 행복을 뺏었다고 생각하는 언니 신재인을 결박하는 일은 그녀에겐 너무도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었다. 광기 어린 신유나의 모습은 나르시시스트이면서도 사이코패스 같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의 내면을 까뒤집어보면 신유나보다 더한 모습을 가진 게 인간 개개인의 본질이기에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행동이나 말이 자신을 더욱 완벽하게 외롭고 완전하게 소외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유일하게 신유나에게 지속적으로 지배를 당하면서도 유일하게 그녀의 손에 든 퍼즐을 비틀어버리는 인물은 그의 딸 지유다. 유나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생각과 반응마저도 지배당하지만 끝내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준 이모 신재인을 구하는 역할을 하고 결국 재인의 품에서 안식을 되찾는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능동적인 인물이다. 이 아이의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이 없었다면 유나의 조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녀의 극악무도한 착취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소설 마지막 즈음 신유나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며 두드러지는 언니 신재인의 자의식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죄책감이나 한이라는 말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착한 딸이 되고 싶었기에 유나에게 늘 당하고만 살아왔던 재인. 마지막으로 괴물처럼 변해버린 유나와 그와 같은 모습으로 대항하는 재인의 처절함은 쓰리다 못해 눈물겹다. 

유나는 말한다.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불행의 요소를 빼는) 뺄셈이야.”라고. 하지만 그녀의 말은 명백히 틀렸다. 인생은 계산기로 두드려 수치화할 수 없는 복합적인 유기체들의 결합이나 해체의 과정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기에 때론 행복의 벼랑에 섰다가 제 발로 불행의 늪지대에 빠져들기도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모순이자 한계인 것을. 인간은 완벽해지려 할수록 완벽으로부터 배신당한다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던 시간들을 나는 글을 쓰면서 토해냈다. 억지로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구역질이 나도록 토하고 토했다. 갑갑증이 탈수를 일으킬 만큼 케케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뱉어냈다. 때론 울었고 때론 소리쳤고 때론 혀를 찼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늘 완벽주의자란 액자를 들고 타인을 그 속에 끌어들이려 했다. 결국 참고 참다가 난치성 정신질환자란 이름표까지 더해졌다.

글쓰기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글쓰기에 배신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기댈 곳도 내가 쉴 곳도 내가 죽고 못 사는 것도 글뿐이었기에 대학도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른 안에 작가가 되고 떵떵거리며 살 거라 생각했는데 남은 건 패잔병의 쓸쓸한 후퇴 같은 귀향뿐이었다. 8년간의 서울 생활,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얼마나 소외시켰나. 다정한 눈 맞춤과 어깨에 살포시 기대고 싶은 충동도 모두 ‘작가가 되어야 하기에’ 억눌렀다. 그들은 ‘도덕적 결함’과 ‘폭력성’을 가졌단 이유로 내 인간관계 리스트에서 삭제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신유나 같은 인물도 더러 있었고 그들을 대책 없이 믿어버렸기에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온전히 품어준 것은 가족이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내 욕심 주머니에 든 완벽과 완전을 탈탈 털어버리고 ‘최선’ 하나만 남겨 놓은 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한다.

내 안의 간절함은 이용의 대상밖에 될 수밖에 없었던 유약한 20대를 지나 가끔 뉴스를 도배하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된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고 싶다. ‘완전한 퍼즐 조각은 인생과 같을 수 없다’고 완전함을 지키려 악다구니를 쓸수록 완벽한 배신이 도사리고 있다고. 그러니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라고. 다만 소설 속 지유처럼 진정한 사랑을 오롯이 느낄 용기를 가지라고 말이다. 행복이란 거대한 꿈들을 해석하기에 앞서 내가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제대로 읽어내고 표현하는 것을 연습하자고. 내가 얼마나 섬세하고 연약하면서도 유연한 사람인지를 알고 있느냐고.
 
톡톡 두들겨지는 자판의 감촉을 느끼며 마지막 책장을 덮고 회한 같은 아스라한 한숨을 뱉어본다. ‘행복, 그까짓 걸 정의하자고 나 자신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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