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8504

우리가 살아내는 삶

 


서유경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살아갈수록 잘 모르겠다.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데 참 어렵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졌다. 마치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여겼던 잘 사는 일 말이다. 잘 사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기도 하고 사는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친구는 나이가 든 거라고 놀릴지도 모른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냥 순리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날들이다. 그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바람을 버릴 수는 없다. 조남주의 첫 소설집 『우리가 쓴 것』(민음사, 2021)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힘겨운 삶을 버티며 나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시간을 생각한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수록된 8편의 소설이 그랬으니까. 소설 속 여성 화자는 모두 우리였으니까. 과거의 우리, 지금의 우리, 미래의 우리 말이다. 어쩌면 모두 여성 화자라서 우리의 이야기로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한 번쯤 느꼈을 차별의 시선과 참아온 분노. 그녀들의 상실과 슬픔을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내 것 같아서 함께 공감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읽은 「매화나무 아래」는 눈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소설이다. 눈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있을까.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지내는 날들에야 가능할까. 아니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과거, 혹은 누군가의 미래와 겹쳐지는 소설에서 차분한 슬픔이 전해졌다. 치매에 걸린 큰언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는 화자 ‘동주’가 들려주는 큰언니 ‘금주‘, 작은언니 ‘은주’의 이야기. 세 자매로 지냈던 시절, 그리고 남은 큰언니와 동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삶의 고단함, 이별을 준비하는 가느다란 시간을 생각한다. 그 시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 연약하고 위태롭게 삶과 이어진 시간들. 사는 건 무엇일까. 소멸하는 생의 마지막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이런 문장을 읽는다. 소설 속 세 자매도 눈이 되었다가 꽃이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일 것이다.


봄이 오면 눈들은 꽃이 되겠지.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으면 마르고 갈라진 나무껍질은 보드라운 꽃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겠지. 벅차게 흐드러진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며 코끝에 매화 향이 날라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들이 나비처럼 팔랑일 것이다. 그러다 못 이기고 한꺼번에 떨어져 함박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매화나무 아래」 중에서)


꽃이 되는 인생을 생각하면 혼란스러운 지금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와 똑같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지지하는 마음,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해낼 수 있다. 화자인 소설가가 악플러를 고소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오기」는 그런 마음을 말한다. 이해와 공감, 단단한 연대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 이 단편을 읽으면서 여성 서사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당혹스럽고 불편하고 아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부장제와 수없이 나를 훑고 간 불쾌한 시선과 모욕적인 언어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 같은 상처들. 그래서 ‘오기’란 제목이 ‘다짐’, ‘결속’처럼 다가온다. 화자를 응원하는 마음이 자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사랑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나’가 아닌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추는 「현남 오빠에게」나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는 수많은 폭력과 폭행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여자아이는 자라서」 속 딸을 둔 화자에게도 이어진다. 나를 변호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목소리. 인식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그건 단순하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유쾌하게 풀어낸 「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 단편을 너무 재밌게 읽었지만 가장 씁쓸하고 속상했다. 직장에서 뭐든 다 해내는 ‘미스 김’의 존재가 과거 우리의 자매였고 지금 20~30대 여성 같아서.


알면서 버티고 모르면서 버티는 게 삶인가. 자신이 자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육아로 힘들지만 복직한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딸의 속상함을 알지만 워킹맘인 엄마도 손주를 봐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오로라의 꿈」 속 모녀는 가장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다독이면서도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는 소설들이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모녀의 이야기「오로라의 꿈」에서도 마찬가지다. 육아로 힘들지만 복직한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딸의 속상함을 알지만 워킹맘인 친정 엄마 ‘나’는 손주를 봐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지금껏 지켜온 자리, 여유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과 육아를 저울질하게 하는 만드는 건 누구일까. 가족과 사회 그 안에서 여성의 자리는 너무도 작고 위태롭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며 삶을 이어가는 여성들이다. 엄마와 딸이 아닌 동등한 여성으로 서로를 지켜봐 주는 「오로라의 꿈」 속 모녀는 애처로운 우리의 모습이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오로라의 꿈」 중에서)

우리가 쓰는 삶, 우리가 살아내는 삶을 생각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삶.10대 어린 소녀부터 노년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고군분투는 나의 일상이다. 다양한 삶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웃고, 울고, 화내고, 속상한 마음을 다시 다잡고 나아가는 우리와 너무도 닮았서 그녀들을 지지하게 된다. 열심히 잘 해왔다고, 잘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미 충분하다고. 그리하여 소설 속 그들처럼 우리의 시간이 먼 훗날 어떻게 채워질까 기대하며 오늘을 더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좌절도 절망도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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