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2066

나와 나의 거리 

나나를 읽고 


한민지

 

나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다. 하나는 가장 근본적인 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나다운 나이고 하나는 남들에게 조금 더 나아 보이기 위해 모난 부문들을 스스로 깎아내려 만든 나이다. 나는 후자의 나 덕분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은 나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다 지침을 느끼기도 한다. 책 나나의 주인공들인 수리와 은류도 나와 같이 ‘나’와 ‘나’ 사이의 간극을 유지하며 살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수리와 은류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다. 자신을 선령이라고 소개하는 자가 나타나 일주일 후까지 육체로 들어가지 못하면 자신이 영혼을 데리고 저승으로 가겠다고 하며 일주일 안에 육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보라고 한다. 은류와 수리를 일주일 동안 자신이 육체를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때까지 본인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남들의 시선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육체가 영혼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비로소 자신의 육체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난 밝은 아이다. 적어도 학교에서 내가 제일 많이 웃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웃음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웃음이 별로 없고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던 아이였다. 언제나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나를 그리 좋은 길로 인도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주로 나의 첫인상에 대해 ‘무서웠다’, ‘다가가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에게 ‘귀엽다’, ‘예쁘다’라는 말만 들어오던 나에게 아이들의 말은 적잖은 충격을 줬던 것 같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무섭지 않고, 다가가기 쉬운 아이가 되기 위해 항상 웃고 다니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아이들이 나에게 쉽게 다가오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다가왔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웃으면 행복이 찾아온다’, ‘웃으면 좋다’라고 많이들 말하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밝은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웃기지도 않은 일에 웃고 재미없는 말에 웃으며 반응해 주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하지만 내가 웃지 않으면 아이들에게서는 항상 혹시 화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돌아왔기 때문에 그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지치고 그들 사이에서 웃는 것도 지쳤다. 학원에 가도 학교에 가도 친구들은 항상 있고 나는 하루의 삼분의 일 이상을 소리 내 웃어야 한다. 만약 어느 날 나의 육체가 나를 거부한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에서 수리는 그저 ‘놀기 만 하는데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지치게 한다. 나는 이런 수리를 보면서 ‘스스로를 지치게 하면서 유지하는 이미지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저렇게 애쓸까?’라고 생각하며 수리가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 생각해 보니 이것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사실 내가 웃지 않는다고 해서 친구들이 나를 싫어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도 친구들은 항상 ’무서웠다‘, ’다가가기 어려웠다‘라는 말 뒤에 항상 ’지금은 첫인상과 많이 다르게 느껴진다.‘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내가 그저 친구들의 몇몇 말에만 꽂혀서 아무 의미 없이 스스로를 옥죄어 왔던 것은 아닐까 또한 지쳐가면서 얻은 친구와 나의 인간관계의 끝이 나의 행복을 향하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렇게 애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를 좀 덜 옥죄고, 지치게 하며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줘야 했다. 아이들에게 ’무섭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남들에게 무서워 보이지 않기보다는 스스로가 그런 말에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남들이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 쓰며 육체를 지치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단 나와 수리, 은류의 것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사람들은 과연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육체를 위한 삶을 살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 남들에게 내보이기 위해 카페에 가고 식당에 가고 유명한 장소에 간다. 추억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딜 가든 추억은 남기지 않고 사진만 찍어댄다. 그 사진을 sns에 올려 ’좋아요‘를 받고 ’팔로워‘를 늘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것이다. 개중에는 ’좋아요’가 평소보다 나오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들에게 돈이 많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여건이 되지 않지만 무리해서 명품 가방을 들고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모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요즈음에는 명품 옷을 대여해 주는 곳도 생기고 있다. 만약 대여한 옷에 커피라도 흘렸다간 한 달 월급이 오롯이 커피 쏟은 옷을 배상하는 데에만 쓰이게 될 수 있지만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저 남들 눈에 부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사람들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쓰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녀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끊임없이 걱정하고 결국에는 자녀를 남들의 시선에 맞게 바꾸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자녀는 괴로워하고 돈은 밑 빠진 독 마냥 흘러나가지만 부모는 이미 자녀를 남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사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리처럼 이건 나 또는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나의 내면과 개성과 육체보다 남들의 시선을 우선시 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완전히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그것 역시 새로운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남들의 시선을 시선에 맞춰서 산다. 그것이 설령 나 지신을 힘들게 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남들의 시선보다는 나를 위한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고 육체에게 환영 받는 영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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