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436

  

도피와 집착 사이에서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조선희

 

 

 딱히 이렇다 할 표상이 없었던 코흘리개 때, 내가 아로새긴 말은 모두 아버지의 훈육에서 나왔다. 나는 명령 같은 아버지의 한마디 한마디에 묵언으로 동의했다. 이후 학교에서 배운 전래 동화와 세계 명작의 교훈도 아버지의 훈육처럼 내 의식 깊이 자리 잡았다. 어질고 고운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밑거름일거라 짐작하고, 왜 따라야만 하는지 의문을 갖기보다는 마음 깊이 훌륭한 표본으로 간직해 놓고 삶의 길잡이로 삼았다. 실체가 없어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통념으로, 그 이상적인 이미지에 나를 끼워 맞추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장 완전하다고 여겼던 이미지들이, 내 몸과 정신을 옭아 묶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일깨워 주었다.

 
여자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가 오랫동안 나를 채찍질하는 기준이었다. 오빠의 대학 진학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남편의 성공을 위해 바라지하느라 내 삶은 뒷전에 두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려고, 귀감이 되는 대상을 흉내 내며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 만일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생기면, 그래야만 한다는 주문의 쇠사슬로 내 발목을 꽉 채웠다. 돌이켜보면 내가 모방한 표본이 정말 훌륭한 이미지였을까? 하는 의문이 뒤늦게 든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쪽수만큼 많은 의미가 담긴 서사에서 내가 풀어낼 수 있는 것도 무진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현기증이 날 정도로 책장은 자주 접혔고, 접힌 낱장에서 읽은 내용이 졸여질 때까지 기다려도 작가의 심지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들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무겁게 노려보다가 대략 취합해서 쓰기로 했다. 따라서 궁여지책이 나올 리 없었고, 써야할 것도 명료하게 와 닿지 않아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떻게 부각시킬지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포지션만큼이나 난처했다. 

 
처음에 나는 가볍게, 밀란 쿤데라가 지면에 뿌린 무수한 은유에서 네 남녀가 연주하는 사랑의 하모니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읽은 곳을 재차 읽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아득한 얼개가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나고, 그것을 차근차근 해석해 알맹이를 찾는 과정에서 사랑의 낭만보다는 그들에게 내재된 근원적 표상, 즉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표준적 이미지에 숨겨진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가 만든 것일 수도 있고, 강요에 의해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머문 환경이 만들어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네 남녀를 대립하는 관계로 설정했는데, 아마도 그것이 고통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삶의 방식이 극명하게 엇갈린다면, 애초에 수용하기 힘든 표상을 상대에게 내밀고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소련이 체코를 침공했듯이 내가 가진 신념이나 이미지가 더없이 훌륭하다는 걸 상대에게 주입시켜, 그 사이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갈등을 제거하려는 이기심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인간이 태초부터 짊어져야 했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하는 사람끼리 주고받으며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과의사 토마시와 웨이트리스 테레자, 대학교수 프란츠와 화가 사비나. 토마시와 프란츠는 각자 아내와 이혼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지켜왔던 신념을 과감히 버린다. 토마시는 하룻밤 풋사랑으로 결혼했을 만큼 순수한 남자였으나, 이제 그는 ‘라면 먹고 갈래?’ 따위의 가벼운 성을 만끽한다. 프란츠는 자신을 버린다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한 여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숭고하리라 믿었던 아내의 실체를 알아버린 후 이십 년간 지켜온 일부일처제를 등진다. 테레자는 엄마로 인해, 사비나는 아버지 때문에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 육체와 영혼의 일원성에 함몰된 테레자. 그녀의 나르시시즘적 면모는 성모마리아를 닮았던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어머니는 잘못된 결혼으로 자신의 미모가 망가졌다며 다시 결혼했을 만큼 육체가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사비나가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는 금욕주의의 반대편에 놓인 것들과 배신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 아버지의 완고함이 빚은 결과였다. 무의식에 벤 절대적 가치의 꺼풀이 벗겨지면, 그때야 비로소 자신을 옭아맨 것을 가볍게 버릴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사랑에 붙잡히는 것은 경계했던 토마시. 그의 심리적 배후에 도사린 이 이중성은 여러 우연을 매개로 만난 테레자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같은 테레자를 끌어안은 것은 의사라는 그의 소명에서 나온 동정심이 원인이었다. 여자 속에 깊숙이 파묻힌 여성적 자아의 신비를 열어보려는 직업적 갈망이 호색한을 만든 것처럼. 그렇다고 그가 엽색 행각을 멈추었는가? 그는 여전히 그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그의 의식 깊이 뿌리내린 자신의 이중성을 누르지 못했다. 아마도 이 책의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테레자가 토마시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테레자가 없었다면 토마시는 자기 안에 고인 최상의 감정인 동정심을 끄집어낼 수 있었을까? 프란츠가 사비나 이후 새 애인을 가지게 된 것도 그의 내면에 깃든 가벼운 마음을 사비나가 끌어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호색한 토마시가 테레자에게 의미를 갖지 않았다면, 그는 테레자도 가볍게 버렸을 것이다. 소중한 것에 의미가 따라붙듯 토마시에게 있어 테레자는 그만큼 의미가 깊은 존재였다. 인간은 서로 고통만 주고받는 게 아니다. 상대로 인해 자기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사랑과 성행위는 별개라는 토마시의 관념을 확인하고자 기술자로 위장한 경찰과 딱 한 번의 가벼운 성적 탐닉을 한 테레자는, 육체가 반응하는 쾌락에 자신도 어쩔 줄 몰라 했다. 토마시에게 ‘오직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게 그녀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었을까? 

 
그 옛날 아버지가 내게 했듯이, 나도 가장 완전하고 의식 깊이 자리 잡은 표상 몇 개를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엄마는 너무 몰라요.” 나는 아이의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자신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아이는 엄마인 내가 걸어온 길이 낡고 허름하단 걸 눈치 채고 단호한 말로 밀어냈다. 지금에서야 내 행동이 얼마나 아이의 숨을 막히게 했을지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여태 그렇게 살아왔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 같으니까, 아이의 들끓는 심리를 이해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인간상을 의심하지 않고 따라와 주기를 바랐다. 밖으로 나도는 사춘기 아이와 오간 대화의 전후사정이야 너무 뻔했다. 아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저항하자 꺼낸다는 말이 “엄마는 너처럼 그렇게 살지 않았어. 그래도 아무 탈 없이 잘 살았다.” 순간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뱉은 말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엄마란 위치가 그렇게 만든 꼴이었다. 시대가 변했다는 걸 잠깐 잊고 내 생각이 합리적인지, 흠결은 없는지 가리지도 못한 채 무작정 믿고 따라오라고 했으니…. 나는 아버지의 훈육을 맹신했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반성한다. 엄마의 방법이 옳다고 아이에게까지 씌우는 건 폭력이라고. 

 
어차피 인생은 한 번, 무한한 우주와 영원의 시간 안에서 찰나일 뿐인데 ‘배신의 연쇄작용에 깊게 함몰된 사비나’처럼 살았다면 어땠을까. 배신의 끝이 무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옥죄던 거짓말과 같은 환상에서 그려낸 이미지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것인데…. 아무 제약도 없고 자유로운 미지의 세계라면, 내가 마음에 새긴 이상적인, 아니 이상적일 거라 믿었던 이미지에 예속되어 신뢰하고 숭배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반항기가 있는 아이에게 또래의 착한 이미지를 들이밀며 훈계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나는 토마시가 보여준 ‘육체의 쉽고 가벼운 취급에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테레자’처럼, 내가 지닌 표상들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다. 

 
한편 테레자의 고통이 토마시에게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했다면, 그 고통은 그야말로 고통으로만 종결되었을지도 모른다. 테레자는 늙어 쇠잔해진 토마시를 보며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부당하고 교활했는지 토마시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때 토마시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더 무엇이 필요할까. 니체는 단순히 말의 목을 끌어안은 게 아니라 말이 겪는 고통을 끌어안았다. 진작에 테레자가 그들의 완충지대인 카레닌을 대할 때처럼 토마시에게도 자발적 사랑을 보였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은 자신이 지탱할 ‘필연이라고 맺은 이미지’라도 없다면, 어떻게 무리 속에 섞여 질서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조건반사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고통이 있음에도 인간은 마음속에 자신이 정한 기준을 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때로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적 이미지를 끌어안고 살기에 고통이 따른다면, 집착을 벗고 거기서 멀리 달아나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까. 도피할 수 없다면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꾹꾹 누르지 말고, 참을 수 있는 언저리까지만 유지하다 가볍게 등한시한다면 어떨까, 책을 덮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밀란 쿤데라가 사랑한 니체의 말과 같이 ‘우리의 삶이 아무리 찬란하고 아름답고 때로 잔혹할지라도 아무런 무게도 없이 무의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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