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447

 

하늘을 보며, 두 발로 서서 (밀란 쿤데라 / 참을수 없는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노주영

 

 

읽는 중에, 삶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는 책인 것 같다는 어렴풋함이 있었으나 이 책에서 찾고자 하는 것을 낱낱이 벗겨내려 할수록 민낯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상이 겹쳐 머릿속을 까만 혼돈으로 만들고, 끝없는 우주 속의 내 존재는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되었다. 모든 게 분명한건 없었지만 분명 이 책의 머리말엔 < 삶에 대해 어떠한 확답을 찾기 위해서 이 책을 읽는다면 지금 당장 덮으세요. > 라고 붙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책은 한 커플, 한 여자, 한 남자의 입을 통해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챕터는 무거움과 가벼움, 영혼과 육체와 같이 어떠한 ‘정답’을 낼 수 있는 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저렇듯 대부분의 상황에서 ‘답은 이것이다’ 라고 명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황보다 그러지 않은 상황이 훨씬 많다.

어떠한 일화를 이야기 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사고나 견해를 푸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게, 처음에는 이게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만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로 이어지는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어떤 정의나 정립 보다는 유동적인 상황 중의 ‘삶’을 찾고자 하며, 또한 삶은 결국 챕터마다의 입장을 내놓을 수는 있어도 모든 상황에 정답인 절대적 정의를 내릴 순 없는 것 같았다. 

읽으면서 중간 중간 던져주는 사상, 진실과 진리, 자유, 사랑 등 인생에서 접할 수 있는, 답을 내릴 수 없고 모호하기만 한 개념에 대해 써 내린 내 것의 감상만도 장장 10페이지가 넘었는데 나중에 읽어보니 이 책에 대한 연상적이고 정의적인 접근이라고 보다는 단지 각각의 키워드에 대한 나의 입장, TMI 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보면 삶을 이야기하는 데에, 나의 삶 또한 정답이란 게 없다면 이 순간에 접해있는 나의 '입장' 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지? 그러한 ‘나’ 입장하는 것이야 말로 삶에 있어서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는 이해가 제목과 연결되는 듯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의 앞쪽에 토마스는 이미 우리에게 이러한 제시를 한다. ‘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지상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처음에는 어떤 상황에 위치한(무거움을 마주한) 인간의 선택(가벼움)이라는 유추를 했었는데 마지막 챕터에서 그 이해가 많이 바뀌었던 것 같다.  

마지막 챕터에서 테레사가 밑바닥이라고 하는 지칭에서 왜 삶의 끝의 끝을 밑바닥으로 이야기 할까. 우리는 왜 하늘에 닿은 삶을 살려고 하는 걸까? 웃긴 건 그렇다고 사실 에덴 또한 하늘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영혼과 육체. 이 두가지가 합쳐진 게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 와 ‘가벼움’. 

한데 모아 사람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로는 절대 사람일 수 없고 하늘을 바라보며 땅을 지탱하고 서있어야만 사람인거다.

우리는 삶에서의 매순간 어떠한 무게를 버티며 살아간다. 존재에게 무게는 참을 수 없지만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우리가 삶에 적을 둔다는 건 발을 땅에 두며 그 정도의 중력과 기압의 무게감을 버티고 ‘산’다는 것 같다. 그러니 존재라는 건 어떤 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버틴다는 건 보통은 긍정적인 반응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하다. 어떻게 해서든 타의적인, 수동적인 성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그러한 삶의 무게를 버거워 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힘이 다 빠져나간 허물과 같은 자신을 보며, 돌이켜보면 우리는 버틴 게 아니라 그 무게를 지탱할만한 힘이, 지극히 ‘살아있는’ 나에게 있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마냥, 좋은 한 때로 기억만 할 청춘이 아니라 우리가 지고 있던 그 무게감, 즉, 참을 수 없음이 가벼움에 가까워져서야 그것들이 막연히 시련일 뿐이 아니었음 또한. 

그래서 끝에 이르러 ‘당신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 나다’ 라는 테레사의 말에도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다’ 라고 이야기 하는 토마스의 말은 자신이 누구로 인해 밑바닥으로 끌어 내려진 게 아니라, 누구나 삶은 바닥에서인거다. 그러니 그 바닥에서 두 발로 서서 자유의지로 걷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이 외과의사로의 삶이든 농부로써의 삶이든, 버티거나 끌어내려진 게 아닌, 어떤 쪽이든 삶으로써의 힘을 가진 나의 자유의지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대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의미를 더 부여한다면 점점 밑바닥으로 끌어내려진 게 아니라 점점 육체가 흙 아래, 자연으로 돌아가 제 위치를 찾아 간 것뿐이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선택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늙고, 흰 머리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나는 이미 정해진 유일한 운명인 자연으로의 회귀, 어차피 돌아올 바닥까지의 시간 동안 단지, 때마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질 무게가 어느 쪽일지를 택했을 뿐이라는 것 같았다. 

결국 사명이란 없고, 탄생과 동시에 내게 이미 주어진 어떤 임무가 내 삶의 목적이 되어 이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무엇을 할 건지 무엇이 될 건지는 내가 선택하는 거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돌이켜보면 이건 시련이라 할 수 없었던 거다.


 ‘당신은 모든걸 잃었는데’ 라는 내용에서 어차피 삶의 궁극적 도달이 죽음이라면, 허무주의를 배제하고도 어떤 직업, 명예가 내가 ‘얻’은거라고 할 수 있을까? 

삶에서의 모든 것 중에 내가 ‘획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금 토마스는, 또한 테레사와 함께 그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걸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뿐이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삶에서 자유의지로 행할 건 ‘나로 산다’ 와 ‘사랑’ 뿐이라는 것도 느꼈다. 환경으로 인해 모든 걸 앗아가도 앗아갈 수 없는 것. 

 ‘삶으로의 의지적 선택’과 '사랑'은 내가 놓지 않는 한 어떤 갈등과 시련과 이데올로기도 뺏을 수 없다는 너무 뻔한 메시지임에도 간과할 수 없는 삶의 의미였다.


그러니 내가 살면서 바랄게 허공에 뜬 별이나 사명이 아니고, ‘스스로의 삶으로의 의지’ ‘삶으로써의 무게’를 자각하고 순간을 사는 것이 삶으로써의 의미임이, 모든 사람에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걸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의 삶으로의 가치란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내 삶의 의미를 하느님에게 응답해주시길 바라며 그 의를 전가하기 보다는, 내가 스스로 알아가야 선택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신은 사실 이미 다 줬고, 내가 내 힘을, 내 자유를 스스로 알고 걸어나가길, 그러니 바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삶으로써 가져야 할 건 이미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사실 삶에서 진리는 없고 진실은 있을 수도 있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이 책에서 받은 메시지로는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은 내용이다’라는 문장이었는데 이미 내게는 슬픔이라는 형식 안에서 삶이라는 행복이 주어져있었다고. 결국 내가 사는 ‘삶’인데 다른 모든 것 중에도 ‘나의 살아있음’ 이 제일 중요 한 게 아니겠는가. 어떤 상황이든 과거를 그리거나 미래를 꿈꾸기 보다는 이 순간과, 이어지는 순간과 순간과 순간의 살아있음이 소소하지 않은 확실한 행복임을 알고 누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지금 이 글을 적는 이 순간 내가 가진 무게이자 힘에 대해서, 이 또한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는 빼곡한 상의 혼돈 이라기보다는 내가, 펜 끝에 의미라는 무게를 실으며 비약되는 상과 상을 연결하여 나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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