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438

 

삶을 생각한다는 것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고위준

 

노벨문학상 시즌이 다가오면 언제나 마음이 들뜬다. 후보 작가들의 책을 하나하나 들춰 보는 재미, 수상을 예측해보는 즐거움, 좋아하는 작가가 수상에 성공했을 때의 그 희열,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되는 노벨상 특수까지, 그 행복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나 같은 애서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이리라. 나는 불과 한 해 전까지 밀란 쿤데라를 지지했다. 현존하는 작가 중 단 한 명의 소설가가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밀란 쿤데라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올해 그가 세상을 떠났다. 별이 진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하듯 밀란 쿤데라는 세계적인 작가다. 데뷔작인 <농담부터>. 단편집 <우스운 사랑들>, 그리고 1984년에 발표한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까지 나는 그의 책을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왔다. 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읽기 수월한 소설은 아니다. 책의 서두부터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담론이 우리를 괴롭힐뿐더러 형식도 에세이와 소설을 어지럽게 넘나든다. 니체에 대해서라면 박찬국 교수의 저작을 포함해 적지 않은 책을 읽어 그 요약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무한히 반복되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우리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른바 그 반복을 극복하든가 아니면 무의미 속에서 살든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러한 문답에서 시작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엔 네 명의 주인공이(토마시,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등장한다. 문제는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이들의 외양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쿤데라는 그저 인물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던져 놓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켜보게 한다. 마치 소설가가 직접 자신의 소설을 해설하는 것 같은 작품. 인물의 외양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전통적인 소설 작법을 쿤데라는 무시한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만이 아니다. 이야기의 진행도다. 쿤데라는 이야기를 선행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미리 선언해두고 죽음까지의 여정을 독특한 템포로 따라간다. 토마시와 테레사가 결혼을 하는 것은 이야기의 절정에서가 아니라, 아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은 초반부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이어지느냐 아니냐보다, 혹은 하룻밤을 같이 보내지 않느냐보다 그들이 삶을 어떻게 고쳐 쓰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사랑의 모험이나 사랑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단 사랑을 통해 진중한 어른으로 거듭나가는 네 명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에게 대놓고 말한다. 사랑은 섹스가 아니라 한 침대에서 잘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토마시는 소설 내내 바람둥이로 묘사되지만 그가 단 한 번 자신의 여성 편력을 포기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테레사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다. 한 침대에서 잔다는 것은 그의 코 고는 소리, 침 흘린 자국, 불쾌한 입 냄새마저 견딘다는 것이다. 토마시는 섹스에서 사랑으로, 치정에서 우정으로, 비혼주의에서 결혼의 숭배자로 자신을 탈바꿈한다. 물론 그 계기는 오로지 테레사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사랑의 무거운 성질 때문에 삶을 고쳐 쓴다. 고쳐 쓴다는 것은 삶을 반성한다는 의미다. 토마시와 테레사의 사랑이 숭고한 것은 그 사랑이 섹스를 통해 휘발되고 마는 일회적 사랑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사랑은 얼마나 공허한가?


사비나와 프란츠의 연애도 소설에서 물론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진정한 주인공은 역시 토마시와 테레사다. 그들이 만나고 서로를 껴안고 결혼하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들을 읽는 것은 곧 한 시대를 읽는 것과 같다. 잘 알려졌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배경은 ‘프라하의 봄’이다. 실제로 소설의 영화 번안도 제목이 <프라하의 봄>이다. 비평적인 성공을 거둔 영화는 아니지만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다는 것이 소설만 읽는 나에겐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물론 굵직한 사건들을 영상으로 담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그 음울하고 묵시록적인 분위기, 소설의 줄거리하곤 고립되어 있는 단상들, 키치에 대한 성찰, 삶의 자세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속내는 영상 표현으론 불가능한 게 아닐까? 프라하의 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이 사건에 대해 정보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소설의 경우 보통 ‘역자 해설’이 책 끝에 딸려오기 마련이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은 저자의 간청으로 그 해설이 수록되지 못했다. 번역가인 이재룡도 이 책 내에 따로 코멘트를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비평서들이 서점에 몇 권 출고되어는 있지만 역시 프라하의 봄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들은 많지 않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의 ‘민주화 운동’ 이 그 배경이다. 어수선하고 폭력적인 당대의 분위기 때문에 당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 등은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경우가 잦지만 쿤데라는 오히려 그러한 사건에서 성찰과 모색을 이끌어낸다. 그러니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독법은 크게 두 가지다. 프라하의 봄과 상관없이 ‘가벼움-무거움’을 테마로 읽거나, 프라하의 봄을 중심에 두고 당대의 사회 정황을 읽어내거나. 어쩌면 그 두 가지 테마를 합체하는 형식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이상적인 독법이 아닐까. 소설의 배경은 1968년이지만, 비틀즈를 포함한 문화적 아이콘이 소설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20세기가 마감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예술은 빠른 속도로 상업화되어 갔다. 문학 시장도 마찬가지다. <해리포터>,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등장, 장르 소설의 범람, 오락물의 인기몰이, 문자 매체가 아닌 영상 위주의 예술 등의 대거 등장이 우리를 어느 순간 철학이 부재한 세상에 덩그러니 방치해 놓고서 마치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이런 때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다는 것, 밀란 쿤데라를 읽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쿤데라는 묻는다. 우리는 삶을 반성하고 있는가? 가벼움에만 혹은 무거움에만 기울어진 채로 삶을 살아나가고 있진 않은가? 잘못된 중용을 취하고 있진 않은가? 쿤데라는 우리 앞에 애써 니체를 소환한다. 거칠고 공격적인 주장 때문에 니체는 사회로부터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아웃사이더 철학자로 간주되어 왔지만 쿤데라가 볼 때 그의 철학은 중용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을 되려 성찰로 이끈다. 언젠가 내 친구가 내가 니체나 버트런드 러셀을 읽는 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뭐 그런 책을 읽어?” 질문의 의미는 뻔하다.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항변하지 못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을 다루는 경제서만이 과연 현대적인 책인가? 어쩌면 곧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두고 “별 책을 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1세기에 쿤데라가 남긴 책들을 읽다는 것은 먼 과거를 읽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세상을 읽는 일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두고 포르노틱한 소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일부 독자들에게 이렇게 맞받아치겠다. 쿤데라를 읽는 것은 곧 삶을 검토하는 것과 등가의 의미를 지니는 일이라고.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잠언대로 검토되지 않은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 소설은 결국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에서 사랑을 부차적이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으로 묘사된다. 적어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근사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런 괴상한 소설에 매료될까? 어쩌면 우리의 삶이 이와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비참하고, 고집스럽고, 우울하며, 종잡을 수 없는 이 소설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철학이 부재한 시대에 당신들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 그 해답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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