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437

 

<이순신, 전인(全人)적 인간의 표상>


김기영

 

 어떤 민족의 우수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정량적인 계산으로만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분명한 기준은 있다. 대표적으로 해당 민족의 평균 지능지수를 들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인은, 평균 IQ가 100을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평균 지능지수를 가진, 상당히 머리가 좋은 민족이다. 6.25 민족전쟁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세계 10위 수준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타고난 지적 역량 때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다른 기준은 그 민족의 역사적 지속성이다. 우수한 민족이라고 알려진 유태인이 그 대표적이다. 성경의 구약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서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구약의 기록을 기준으로 본다면, 유태인은 분명 그 정체성을 온전히 유지한 채 유구한 역사를 지속해 온 민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것보다는,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한민족도 이 기준을 충족한다. 전 세계에서 보기 힘든 단일 민족으로서 반만 년이 넘는 역사를 한반도를 거점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그 분명한 방증이다. 

  마지막 조건은 바로 훌륭한 리더십이다. 전 세계를 호령했던 우수한 민족일수록 그 안에는 반드시 위대한 리더십이 존재한다. 다른 두 조건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훌륭한 리더십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 민족은 분명 번영한다. 반대로 다른 두 조건이 충분하더라도, 훌륭한 리더십이 부족한 사회는 언제나 그 내재된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혹은 사라진다. 그만큼 위대한 리더십은 민족 번영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는 역사가 알려주는 사실이자 교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한민족에게는 이 결정적인 2%가 부족했던 적이 무척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결핍을 메꾸고 남을 정도의 위대한 리더가 한 명 존재한다. 바로 ‘이순신’이다. 요새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기는 하지만, 81년생인 내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학교 강당 입구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인(全人)적인 인간이 되자.”


  여기서 전인적인 인간이라 함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삼위일체처럼 완벽한 균형을 가지고 온전히 갖추어진 인간을 말한다. 그런데 상상을 해보면, 과연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요히 멈춰 있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 세계이든, 인간사회이든 간에 엔트로피는 법칙이다. 즉, 늘 무질서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거의 본능처럼 무질서한 상태를 향하는 세상에서 온전한 중용을 유지한 채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구도자들은 은둔자가 되는 것일 게다. 공자조차도 세상에 도(道)가 없으면, 숨어 있으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만약 세상의 이런 아노미를 그대로 맞으면서도 온전히 자신의 전인성(全人性)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초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초인이 바로 우리 역사 속에 실존을 했었다. 그리고 그의 실존 덕분에, 우리 민족의 역사는 허무하게 끊이지 않은 채 지금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초인이 바로 ‘이순신’이다. 

  누군가가 내게, “당신의 민족의 역사에서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라고 물을 때, “그렇다”라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재차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순신”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흔히 이순신하면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홀로 적과 맞서 싸우고, 모든 싸움을 전승으로 이끈, 신화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당시 일본화 속에 묘사된 이순신의 모습은 무시무시한 귀신에 가깝다. 그만큼 불가사의할 정도의 전략적 능력과 용기, 지도력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능력이 탁월한 인물들 중에는, 그 개인의 인격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그 비범한 능력 때문에 거만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경우에도 예외이다. ‘비범 중의 비범’인 것이다. 지도자들의 경우,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는 가장 결정적인 때는, 논공행상의 경우이다. 대개 자신을 동심원의 중심에 두고, 그 중심과의 거리를 측정해서 공을 논하고, 상을 주는 게 다반사이다. 매우 사적이고, 그러므로 상당히 부정의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는 달랐다. 이순신 자신과의 친분의 정도는 그 평가의 기준에서 완전히 배제함은 물론이고, 신분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가 아무리 노비 계층에 속할지언정, 공을 세웠으면, 세운 만큼 공정하게 보상을 하는, 논공행상의 전범(典範)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당연한 듯 수행한 이가 바로 이순신이다. 이것이야말로 공명정대한 것이지 무엇이겠는가. 진정한 공명정대함은 거대한 것이 아닌, 작고 사소하더라도 매우 실질적인 것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순신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경우, 이순신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보여준 ‘용기’와 ‘의지’ 때문이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다. 세상에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도 살다보면 곧잘 만나보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성과 감성으로 끊임없이 반성된 온전한 의지를, 온전히 실천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일생을 살아도 쉽게 만나보기 힘든 법이다. 그만큼 의지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용기는 인간이 가진 전인적 가능성을 완성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페리클레스, 넬슨 제독, 롬멜 등을 명장 혹은 영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마케도니아가 아닌 다른 민족에게 있어, 알렉산더는 침탈자였고, 페리클레스는 결과적으로 독재자였으며, 넬슨 제독은 노예무역에 관여하였고, 롬멜은 나치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영웅인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으로서 가장 가지기 힘든 탁월성, 즉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용기는 그다지 반성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처럼 타고난 이기심을 그들의 능력과 명분으로 합리화하고, 그 합리화가 시대적 요구에 맞고, 그에 따라 그들이 더욱 더 용기를 발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그를 음해하는 인물들로만 득실거렸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던 이순신의 천성은 자신의 이기심에 어떤 합리적 근거도 허용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기적 본능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미숙하고 무지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이기심의 목적을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유교적인 논리에서 볼 때, 이것이 바로 수신(修身)이며, 정명(正名)이고, 충(忠)이다. 이 세 개의 가치는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며,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른 이가 바로 이순신이다. 이와 같은 인물들에게 있어 이기심은 결코 사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고, 매우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차원의 것으로 임계(臨界)적 발전을 한다. 이순신이 했다는 유명한 말,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즉,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지에 이른 존재만이, 그것의 진실성을 온전히 담은 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완전히 모순이지만, 온전한 충(忠)은 본래 이러한 모순이 역설이 되고, 역설이 곧 하나의 통일을 이룰 때 구현되는 것이다. 이순신이 아닌 다른 사람, 예를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인물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그저, ‘나의 영광을 위해 너희들의 목숨을 바쳐라.’ 라는 말을, 고도의 정치적 화술로 포장하고, 진의를 감추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전국(戰國)시대의 혼란 일변도였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탁월한 리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순신만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겸허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실천한 충(忠)과 이순신이 실천한 충(忠)은 서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독점적인 지배를 위한 명분이었다면, 후자, 즉 이순신의 충(忠)은 의(義)를 위한 실질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모함만을 일삼는 왕과 조정의 권신들에 대해서도 어떤 원망보다는,


  “이 역시 운수이다. 때를 잘못 만난 것을 스스로 한탄할 따름이다(p.286).”


라고 체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충(忠)의 목적은 의(義)를 실현하고 지키기 위해 불의(不義)에 싸워 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인으로서 정명(正名)함을 통해 이러한 충(忠)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 상, 그는 자신을 모함하는 부정의라는, 보다 작은 불의에 대해서 더 크게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으로서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불의는 곧 무고한 백성을 침탈하고, 나라를 도륙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적을 향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명(正名)의 올바른 실천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정명(正名)과 충(忠)은 시중(時中), 즉 때를 어기지 않는 것, 시대가 요구하고, 그때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해보이고, 고통으로만 가득 찬 것일지라도 반드시 실천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순신의 용기와 의지를 통해 배운다. 

  또한 지극한 애민정신으로 군졸들과 그 식구들이 수영 내에서 먹고 사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신경 쓰기를 마다하지 않고, 이를 위해 보급이 한참 전에 끊긴 물자와 먹을거리를 수영 내에서 스스로 생산하고 마련하는 목민관(牧民官)의 면모와 거시적 전략가로서의 능력 역시 우리를 감동시킨다. 전인(全人)적 인간의 조건 중 ‘감정’의 모범적인 현현을 또 다시 이순신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이다.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나에게는 그런 덕이 모자랐노라(p.229).“


 이 인용구는 이순신이 전쟁 중에 죽은 군졸들을 위해 친히 제사를 지내주며 지은 시라고 한다. 고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떠오르는 면모이다. 한니발은 역사상 그 어느 장군들보다 수하의 군졸들로부터 진심어린 존경을 받은 인물로 유명하다. 분명 패장으로 끝난 영웅임에도, 그가 성웅으로 추앙을 받는 이유는,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순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전인적인 인간이 반드시 갖춰야 할 ‘측은지심’, 즉 자신의 고통을 미루어 남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진정한 무인이었다. 

  이 책은 이순신의 이러한 초인적인 면모들을 그의 실제적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보통 위인전이라고 하면, 일종의 장면의 극대화라고 할까, 해당 인물을 위인으로 만든 사건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치중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난중일기』와 이순신을 위해 동료들이 올린 행장(行狀)이나 시장(諡狀), 유성룡의 『징비록』 등 여러 사료에 기록된, 이순신의 전 일생에 대한 삽화들을 연대순으로 인용하여 소개하고, 이에 대한 지은이의 평가를 읽기 쉬운 문체로 진솔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읽으면서, 단지 무인으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이순신은 정말 모든 면모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것이 한 위대한 인간의 진솔한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아무런 인위적 거부감 없이 깨닫게 된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느껴지는 일들이 이순신에게는 그저 당연한 삶의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찬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이순신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으로서 묵묵히 실천해나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움, 그것이야말로 나라를 구할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타고난 인물이 그 운명의 무게를 감내할 수 있던, 의지와 용기의 행인(杏仁)이 아니었을까. 『햄릿』을 보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Time is out of joint. O Cursed spite

   That ever I was born to set it right!“


의역을 하자면, ‘완전히 전도된 시대이구나. 오, 저주스러운 운명이여, 나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태어났구나!’ 정도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순신의 운명을 절묘하게 묘사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햄릿은 결국 운명을 온전히,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는다. 왜냐하면 그가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햄릿은 그 누구보다 강한 윤리적인 덕성을 타고난 사람이지만, 바로 이 점이 그의 약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름 아닌 이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기에는 그는 늘 너무도 자기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부왕의 복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친도 죽고, 자신이 지켜야 할 나라는 방계 혈족에게 넘어간다. 

  반면, 햄릿과 똑같이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윤리적 판단의식과 도덕 감정이 강했던 이순신은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매순간 완전한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가장 유효한 방식으로 실현했다. 그는 홀몸으로 온갖 무질서에 맞섰으며, 나라를 지켜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 속에 인용된 이순신의 글들을 보면, 그 역시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장면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특히 백의종군 시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사랑하던 아들 역시 죽게 되었을 때, 회의감과 죄의식은 극에 달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알렉산더 3세가 고리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내었듯, 합목적적인 결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비록 자신은 번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백성들은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탁월한 지도자가 우리의 역사 속에 실존해 있었다는 게 너무도 자랑스럽다. 그런 전인적인 인간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자신이 속한 민족의 역사를 모욕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한국은 세계 첨단의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자랑스러운 지도자는 2% 부족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순신과 같은 역량과 덕성 그리고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다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전대미문의 위인을 가졌던 민족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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