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431

 

수천 년 갈고 닦아 보석이 된 말들


김선영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이었으니 두어 달쯤 전이었나 보다. 오래전 치료했던 치아의 보철물이 깨져 어금니가 시리고 욱신거렸다. 기존의 보철물을 제거하고 새로 크라운치료를 할 예정이라며, 치과의사는 신경을 살리는 방법으로 치료할지, 바로 신경치료를 진행할지 의사를 물었다. 신경도 신체 부위인데 당연히 살려야 좋은 거지 싶어 나는 당연히 신경을 살려달라고 얘기했다. 신경을 자극하는 치료가 시작됐고 섬뜩한 고통을 견디려니 갑자기 의아함이 밀려왔다. 내가 아는 신경치료는, 신경을 끊어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 아니었던가. 손을 들어, 바로 치료를 멈추고 의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신경을 살리면 뭐가 좋은 거예요?”

 “나무로 치면 신경은 뿌리와 같아요. 뿌리가 죽으면 나무가 시커멓게 변하고 푸석푸석해지죠? 신경을 죽이면 치아가 힘이 없고 푸석푸석해져요. 충치가 생겨도 감지를 못 하고요. 신경치료를 하면 아프고 불편한 시기를 견뎌야 하지만 신비롭게도 시간이 지나면 예민함이 둔화되고 완전히 적응하게 돼요.”

 대답을 듣고 다시 눈을 감으니, 의사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치아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내 마음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으로 들렸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마음을 닫으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일상에 힘이 없고 삶이 푸석푸석해진다는 말이 분명했다. 치아에 대한 조언이 마음에 대한 직언으로 들리는 건 빠르게 정주행하고 싶은 삶이 지속해서 좌절되는 시간을 걷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불안과 위축, 자괴감으로 표현되는 시간이 나를 갉아먹는 시간이 아니라 멈추어 삶의 방향을 점검하는 기회임을 마지못해 인정할 즈음, 그것이 축복이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책이 있었다. 나의 무기이자, 위로가 되는 그것은 『오십에 읽는 논어』였다. 저자가 툭 하고 던진 질문, 그 자체가 내게는 위안이 되었는데 ‘쉬운 방법으로 인생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그러했다. ‘그래, 인생이라는 문제를 풀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거구나, 이 시간을 잘 통과하고 나면 나도 삶의 원칙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덕(德)이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긍정의 기운을 선사 받은 책이기도 했다.

 『오십에 읽는 논어』의 저자는 공허, 성찰, 균형, 성숙, 용기를 화두로 공자의 말씀을 풀어나간다.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집필하였기에 시작의 말을 건네는 ‘공허’와 당부의 말을 건네는 ‘용기’ 영역에는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자신의 삶을 공자의 말씀과 연관 짓고, 현시점에서 재해석하여 현대적 언어로 풀어낸 저자의 내공이 몹시 부러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목조목 비추어주는 문장들은 성찰, 균형, 성숙을 화두로 풀어낸 글 속에 담겨 있었다. 처음 논어를 접한 건 첫째를 임신했던 삼십 중반이었는데 당시에는 논어의 명언들에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 병렬적으로 나열된 수많은 명언 중 한 줄기 흐름이라 여겨졌고, 특히 마음에 와닿는 글귀들은 선별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라는 혼돈을 경험하고,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의 고단함을 알게 된 지금, 경력이 쌓일수록 깊어지는 상대적 박탈감에 자존감이 무너지는 지금의 나에게 논어의 글귀들은 건건이 가슴에 와닿았고, 하나로 수렴되는 묵직한 감동을 주었다.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열매를 남기기 위해, 지난 삶의 균형을 점검해보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 당위가 아닌 진심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자는 학습과 실천에 몰입했던 자신의 삶을 통해, 인생의 원칙과 사람됨의 기본을 말씀하신다. 저자의 어휘를 빌리면 목적이 있는 삶, 바르게 사는 삶, 함께 사는 삶이 그것이다. 


 가장 먼저, ‘목적이 있는 삶’이라는 원칙으로 내가 살아온 시간을 비추어본다. 나에게는 스스로 정한 인생의 원칙이 있었던가. 보존하고 싶은 목적과 목표, 나 자신을 경계할 수 있는 굳건한 뜻이 있었는가 돌아보니 결국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온다. 최근 읽었던 책에서 ‘보다 포괄적이고 통합된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글을 읽고 깊이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스스로 정한 인생의 원칙이 통합된 정체성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지금까지는 주어진 역할이나 직무에 따라 정체성을 고민하고 각각의 정체성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아왔던 게 고작이었다면 이제는 스스로 정한 인생의 원칙으로 통합된 정체성을 만들어갈 시기임을 논어를 통해 지지받는 것 같다. 

 ‘바르게 사는 삶’이라는 원칙으로 나를 비추는 과정은 ‘바르다’의 의미를 헤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깨닫는 과정이었다. 저자는 논어를 통해 진정한 강함이란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잘못은 대개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유발되는 것인데, 이런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이 바로 자신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해석에 공감했고 ‘지금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글귀에 한참 머물렀다. 오만과 아집에서 벗어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방법을 한 줄 글귀로 표현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공자는 인자(仁者)의 삶을 바탕으로 하되, 지자(知者)의 방식을 취하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사람을 사랑하고 포용하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지자는 책과 배움을 가까이하여 지식이나 지혜가 많은 사람을 뜻한다. 지자와 인자에 단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지자보다는 인자가 더 성숙한 단계로 평가받는 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해석에 덕(德)이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의 어려움을  

이해했다. 바르게 사는 삶이란 지혜와 사랑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니 그 뜻이 조금은 명확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품어야 하는 삶의 원칙은 ‘함께 사는 삶’이다. 저자는 함께 사는 세상의 법칙은 조금 달라야 한다며 공자의 ‘공리공욕’을 말한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을 때 공동체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무너진 공동체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를 뼈저리게 겪어왔던 터라 긴 설명 없이도 이해되었다. 논어는 여심(如心)이라는 단어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심이란 ‘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너와 나의 마음이 같게 여겨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역지사지’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며 궁극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니 바르게 사는 삶이 곧 함께 사는 삶임을 말해주는 것도 같다.


 내면의 바탕이 외면의 꾸밈을 이기면 촌스럽고, 외면의 꾸밈이 내면의 바탕을 이기면 번지레하다고 했다. 촌스럽지도, 번지레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오십에 읽는 논어』를 통해 제시되었으니 진심으로 큰 축복이라 여겨졌다. 아직은 일상에 치여 나 자신이 내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앞으로는 외부 조건에 대한 불평 대신 내가 정한 삶의 원칙에 집중하려 한다. 환경과 상황에 흔들리다 고민에 쌓여 불면에 시달리는 번뇌의 과정을 마감하고 나만의 덕(德)을 가꾸다 보면 보다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변해 있지 않을까. 번뇌의 시간이 학습과 실천을 위한 몰입의 시간으로 변화한다면 수년간 나를 괴롭혔던 불면도 사라질 것이라 확신하니 자신감이 솟는다. 잘 자고, 하루를 잘 살고, 인생을 잘 살아낼 것 같은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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