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433

 

<AI 시대에 마주한 ‘참을 수 없는 키치의 가벼움’에 대하여>


이정진

 

 바야흐로 AI의 시대가 왔다. ‘챗 GPT’로 대표되는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는 유저의 요청에 꼭 맞는 답변을 하여 마치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정말로 이해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이미지 생성 AI인 ‘미드 저니’는 단어 몇 개만 주제로 던져주면 그림과 사진을 무한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 시험 삼아 “21세기 뉴욕에 살고 있는 반 고흐”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더니 양복을 입고 맨해튼 밤거리를 걷고 있는 반 고흐의 모습을 순식간에 그려냈다. 신기해하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별 헤는 밤’의 밤하늘과 자화상 속 익숙한 고흐의 얼굴로 짜깁기 한 모조품 같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키치에 불과한 것이다.


 키치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저속한 작품, 모조품’ 등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란 ‘인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말한다. 오직 한 번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존재란 본질적으로 가볍지만,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 전혀 없다면 지상에서 멀어져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의 모순 때문에 태어난 것이 바로 키치다. 키치가 그리는 미학적 이상의 세계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배제된다. 소설에서 키치의 미학적 이상향이란 1) 5월 1일의 공산주의 축제에서 행진 대열을 보고 열렬히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2) 커다란 잔디밭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감동하는 미국 상원 의원으로 묘사된다. 즉, 키치는 우리의 기억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원형적인 이미지에 호소하면서 그에 대한 집단적인 감동을 체험하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AI의 작동원리가 숨어있다. AI는 인류가 남긴 기록들을 통해 인간 무의식에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원형적 이미지들을 학습한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하늘’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밤하늘도 있고, 노을 진 하늘, 구름 낀 하늘,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도 있다. 그러나 AI에게 ‘하늘’을 입력하면 언제나 청명한 푸른 하늘을 그릴 것이며 우리는 그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키치의 이상적 미학이 실현된 세계의 표본이다. 여기서 쓰이는 언어는 짧고 간결하며 모순이 없어야 한다. 보이는 것들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정확한 이름을 가져야 하고 모든 개념들은 어떠한 원형적 이미지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너무나 미묘하고 모순적이어서 AI가 알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만으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개념들도 존재한다. 나는 ‘미드 저니’에게 극사실주의 회화 작품을 그려달라고 해보았다. 그 결과, 사진 같은 이미지, 그림 같은 이미지, 또는 사진과 그림을 섞은 듯한 저급한 이미지가 여러 장 생성되었다. 결코 그림도, 사진도 될 수 없는, 오브젝트의 형식적이고 반복적인 단순 나열. 이는 자기의 태생적 한계를 인식한 AI가 모순을 부정하기 위해 내린 결론이었다. 마치 창세기와 똥 사이의 심각한 불화 끝에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가 도출된 것과 같다. 인간이 신의 키치라면 AI는 인간의 키치인 셈이다. 


 그러나 다소 조악하고 괴이하다 하여도 키치 자체가 우리의 삶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반-키치적인 캐릭터인 사비나조차도 때로는 어느 노부부의 시골 별장을 떠올리며 행복한 가정에 대한 감상에 빠져들지 않았는가. <다만 그녀는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아름다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키치가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결국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의 키치가 권력을 갖고 지배하는 세상이다. 전체주의 키치 왕국에서 키치는 자신을 훼손하는 모든 것들을 추방한다.


 최근 AI는 인간의 보조 역할을 넘어 대체물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많은 기업들은 유행처럼 앞다투어 AI 모델을 기용하고 있다. AI 모델을 쓰면 외형적인 모습은 물론 성격과 언행, 인생사까지 모든 스토리를 입맛대로 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AI는 인간과 달리 늙지도 죽지도 않고, 어떠한 스캔들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의 인간과 가장 다른 점이다. 사소한 말실수 때문에 세상의 관심 밖으로 사라진 유명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에게 화살을 겨눌 때 대중은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를 부정한다. 이전까지 선행과 용기로 칭송받던 모든 언행들이 곧장 가식과 오만으로 재해석된다. 하나의 인간 존재를 단순히 어떠한 맥락(세계관)에 의해 태어난 캐릭터로 정해놓고는 그 세계관 안에서 배치되는 부분들은 배제시켜 버리는 것, “인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시시각각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목격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와 프란츠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트럭 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뒤 -그의 말을 자의로 해석하여 신앙을 갖게 된 아들에 의해-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라는 어이없는 비문 아래에 묻힌 토마스. 대장정의 끝에 노상강도들에게 폭행당하고, 그의 여신이었던 사비나의 얼굴 대신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망하게 죽어간 프란츠. 그런데 어째서 이 책의 뒤표지에는 “사랑은 전투야. 나는 오랫동안 싸울 거야. 끝까지.”라고, 주요 인물도 아닌 마리클로드의 대사가 이토록 비장하게 새겨져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두 사람의 죽음의 결말에 대한 유머 섞인 스포일러인지도 모른다.


 다시 AI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솔직히 나는 언젠가 AI들이 키치의 왕국을 건설할까 두렵다. 아마 우리는 -AI 배우들만 나오는 드라마를 찍지 않는 한,- 병든 AI나 가난한 AI, 성격이 나쁜 AI와 같은 것들을 굳이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히 젊고 건강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계에서 인간의 어깨에 짊어져야 할 무거움은 과연 존재할까. 만일 무거움이 있다 해도 그 또한 전 인류가 감동해야 할 키치의 산물이나 되진 않을까. 어쩌면 미래사회의 이상향은 무거움이 완전히 제거된 삶 속에서 절대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결코 변덕을 부리지 않는 인간이다. 불평하거나 예의 없이 굴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인간. 사실 이런 인간상에 대한 추구는 이미 아이돌 팬덤 문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갓 스물을 넘긴 청소년들에게 너는 우리의 우상이니 언제나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고, 그것이 프로의식이라고 말하며 개인의 사생활부터 취향, 신념까지도 조작하려 한다. 앞으로는 어떨까. AI들은 계속해서 키치를 학습하고 복제하여 재생산할 것이며, 그들에게 창작을 위임할수록 인간은 더욱 키치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우울한 상념에 젖을 때쯤 나는 다시 소설의 마지막 장을 펼친다. 두 사람은 전원생활 속에서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 자연이 선사하는 반복 속에 살아가는 시골의 삶, 그 단조로움이 생의 일회성으로 인해 한없이 가벼워지는 인간 존재를 위로한다. 테레자는 토끼처럼 약해져버린 토마시에게 속죄하지만 정작 토마시는 어떠한 임무도 없이 자유로운 지금이 진정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두 사람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방황한 끝에 찾아낸 슬픈 행복이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내용은 행복이었다. 이 소설의 결말은 가벼움과 무거움 중 어느 한 쪽의 승리가 아니었다. 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 모순과 대립이 드러난 후 균형을 맞춰 제자리로 돌아가 추는 춤으로 끝난다. 비록 그 화폭의 뒤에 황망한 죽음이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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