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297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 - <도가니>를 읽고

                                                                                                   부산진구 연지동 김서영

 

 

 

어디서 시작해야할까? 이 이야기를. ‘흰 덩어리같이 고여 있는 거대한 구름의 바다’, 무진의 베일 속에 가려진 이야기를. 폭력과 광란과 카오스를. 마그마처럼 들끓는 저 오욕의 역사를. 그렇다. 그것은 절박한 사투였고 결과가 뻔한 전장이었다. 그 전장에서 어린 희생자들은 맨몸으로 빗발치는 총알을 받아내야 했다.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고 부끄러운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이유는 없다. 그들은 저 마귀들의 소리 없는 희생자 일뿐이었다. 책읽기를 마친 나는 패잔병처럼 한없이 지치고 무기력해지고 노쇠해졌다. 

그러기에 ‘강인호가 자신의 승용차에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서울을 출발 할’ 때 나는 겁 없이 그를 따라 나서서는 안 되었다. 가을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재잘대다가 적당한 곳에서 ‘도가니탕’이라도 한 그릇 하리라 작정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처음부터 온통 안개뿐이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농무가 주는 위험과 아찔함, 답답함, 베일… 『도가니』 라는 모호한 제목에서 나는 진작 이 이야기가 예사가 아님을 눈치 채야 했다. 나는 섣불리 책 을 넘겨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한번 작동하면 멈춰 서지 않는 장난감처럼 나는 그 도가니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고 만다. 안개의 터널을 지나자마자 우리는 거대한 괴물의 아 가리로 곤두박질 쳐진다. 

 

그와 동행한 나는 알게 된다. 34살의 강무진이 아내의 주선으로 남쪽도시 무진에 있는 청각장애인 학교 기간제 교사 자리를 얻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한 청각장애아가 안개 자욱한 새벽 기차에 치여 죽은 사고가 나도 교장과 교사들, 무진 경찰서는 이를 무마하고, 강인호는 무서울 정도로 적막한 학교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갖는다. 부임 첫날 우연히 여자화장실에서 비명소리를 듣게 된 그는 점차 거대한 폭력의 실세를 느낀다. 장애아에 대한 무자비한 구타와 성폭력이 벌어지는 학교. 그 이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慈愛학원’이다. 강인호는 대학선배이자 무진인권센터 간사인 서유진, 최요한 목사, 피해자 보호자들과 힘을 합하여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고 세상에 알리려한다. 하지만 慈愛학원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교육청, 시청, 경찰서, 교회, 병원 등 무진의 기득권 세력들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거대한 권력 앞에 좌절하지만강인호와 서유진은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처럼, 밟을수록 솟아나는 보리싹처럼 진실규명과 해명을 위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 

무진시가 다 아는 慈愛학원의 교장이며 무진 영광교회의 장로이며 무진의 실세인 이강석,쌍둥이 동생 행정실장 이강복, 생활지도교사 박보현, 윤자애. 과연 그들은 무엇에 굶주렸을까? 이미 모든 것을 지나치게 많이 가진 그들이 자음과 모음을 낼 수없는 아이들에게, 들을수도 없는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서 ‘그게’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정신까지 온전치 못한 이 가련한 영혼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너무나 무섭다. 입막음을 하려고 세탁기에 손을 넣어 린치를 가하는 교사, 부임해오는 교사에게 ‘큰 것’ 하나를 요구하는 학교, 국민의 세금을 빼돌리고 학생들을 굶기는, 정말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학원. 이 거짓 같은 해프닝은 어제도 오늘도 이 안개 짙은 무진에 일어났고 일어난다. 평생을 慈愛 하나로 학원을 꾸려왔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자애로운, 훌륭한, 고고한’ 가면 뒤로 ‘폭력과 성추행’의 용서받지 못할 얼굴이 있다. 

 

이미, 무진의 모든 사람들은, 검사와 판사, 의사, 교육자, 종교인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그들은 법정에 서서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증언들을 하고 있다. 교묘한 말로 거짓을 참이라 하고, 참을 거짓이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처음에는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하며 경악하고 분노한 사람들도 양심과 방관 사이를 저울질 해보다가 ‘그냥 슬쩍 눈감으면 모든 게 편안해질 것을’ 하며 나 몰라라 한다.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이고, 떠벌려 보아야 결과는 불을 본 듯 뻔하다. ‘내’ 가족일도 아닌데 ‘남’의 일에 끼워 들어봤자 괜한 간섭이며 손해라는 생각까지 한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깡그리 잊는다, 너무 쉽게 잊는다. 나도, 솔직히, 그들의 힘겨운 싸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책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 심장은 조여들고 입은 쓰며 눈은 핏발로 행해진다. 너무 힘들어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 방관자. 현실과 타협하는 자. 슬쩍 눈감아주는 자. 회피하는 자. 진정 귀 먹고 눈 먼 자. 나, 그리고 우리 모두. 우리는 공범이다. 

휑한 눈 돌려 아파트 놀이터를 내려다보니 천진난만한 동네 아이들이 그네며 시소를 타고 까르르 웃는다. 유리나 연두, 민수도 이 아이들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 그들도 웃을 줄 알아야한다. 웃어야 할 아이에게 웃음을 빼앗은 자는 나쁘다. 같은 땅에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이들에게 ‘慈愛학원’이 행한 짓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해 서는 안 될 것이다. 

“저 아이들을 다시 개들에게 던져줄 수는 없잖아. 이사장의 인권과 귀머거리 아이의 인권은 같아. 단 일 밀리 단 일 그램의 차별도 안 돼. 난 그걸 위해 싸울 거야" 서유진의 서슬 퍼런 말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 글은 더 이상 픽션이 아닌 현실이다. 최근 어린이 성추행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한 아이의 일생을 망쳐놓고 그 부모와 형제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저질러 놓은 자들의 행동에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 할 때 히죽 웃는 바보가 그 엄청난 일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일이다. 우리는 더 이상 패잔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비록 목소리가 떨리고 있지만 그 목소리로 나는 노래한다. 정의의 힘을. 권선징악의 진리를. 희망과 용기의 노래를 그리하여 당신이 이 책과 함께 정의의 대열에 함께 할 준비가 되었다면 강인호의 무진 행 자동차에 몸을 실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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