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561

   

가난한 아이도 천천히 어른이 될 자유가 필요하다  

- <가난한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를 읽고

 


김채린

 

  “대학 등록금이 그렇게 비싼가요?”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고작 나와 만난 지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은 중1 남학생이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물었더니, 아주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서 너에게 등록금 같은 걸 해줄 돈도 없고, 너는 그럴 쓸모도 없으니 고등학교 때부터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고 했다. 어린 자식에게 그런 말을 벌써부터 해온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이가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있는 것인지도 의아했다. 정식 상담을 하는 시간도 아니었고, 그저 나는 일개 교생 실습생으로서 어설픈 수업을 마친 뒤였다. 그전에 별다른 대화를 나눈 사이도 아니었다. 복도에 따라나와 ‘선생님’ 하며 부른 뒤에 바로 묻기에는, 조금, 아니 많이 갑작스러웠다.

 나는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동안이지만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아이를 위로하는 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 대학에 따라 다르지만, 요즘은 다양한 장학금 제도가 많아서 의외로 조금만 노력하면 등록금은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등록금보다도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도 꽤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어서, 내가 대학에 진학하는 게 맞는지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고. 그렇지만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이라면, 대학에 안 가는 게 낫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빠르니 일단 진학을 목표로 하고 공부하라고. 이렇게 일찍부터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집중해서 공부하면 정말 좋은 학교에 장학금 받으며 갈 수도 있을 거라며 응원했다.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한 것치고는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대답을 해서일까, 아이도 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렇게 상세한 대답을 했던 건, 내가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질문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질문이 너무 공격적이고 잔인했다. 가난한 아이든, 가난하지 않은 아이든 누구나 자기 나름의 속도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가난한 아이들이 가난하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어른’이란 정신적 성숙을 이룬 존재보다는,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 사실 아직 청년이고만 싶지만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 말이다. 내가 가난한 청년이어서일까, 책을 읽으며 자꾸 내 주위의 가난한 청년들이 떠올랐다. 물론 스스로를 ‘가난하다’라고 생각하는 건 상대적인 것이어서, 누군가는 나를 아주 가난하게 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전혀 가난하지 않은 주제에 자기연민이 심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인용한 것처럼 ‘빈곤은 기본적 역량의 박탈’이라고 가정한다면,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자아실현 욕구는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밥을 굶은 것도 아니고, 가정폭력에 시달리지도 않았으며, 가족구성원 모두가 온전한 몸으로 각자의 생활에 충실했다. 나는 평화롭고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다만, 막연하게 ‘떼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아주 어릴 적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책이나 문구류가 아니라면 특별히 갖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부모님 두분 다 아주 열심히 일하셨고, 그렇게 돈을 벌어도 우리집이 넉넉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긍정적 의미로 검소한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안 될 것 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습관이 들었다. 여우의 신포도같이 말이다.

  학원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하던 방과후 수업과 동네 아이들이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다니지 않았다. 심지어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서는 내가 고학년이 되자 유치부 아이들을 돌봐주게 하시고는, 내가 내는 학원비에 버금갈 정도로 알바비를 주셨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원비를 따로 받지 않으시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부르셔서 플룻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간식도 챙겨주셨다. 학원에 다녔다기보다는 챙김을 받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학원에 안 다닌다고 해서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아주 어릴 적부터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물심양면으로 나를 지원하셨다. 우리집 상황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번듯한 직장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느꼈다. 아마 내가 성적 향상을 위해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으면 어떻게든 보내주셨을 것이다. 괜히 나 스스로 학원에 가지 않고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을 뿐이다. 대신 나는 학교선생님들에게 많이 의존했다. 방과후에 아무도 없는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하거나, 방학 때도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열심히 참여했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공부하는 나를 기특하게 보셨는지, 남는 문제집을 챙겨주시는 분도 많았고 쉬는 시간에 수시로 질문을 해도 언제든 반갑게 맞아주셨다. 다른 아이들은 상급학교에 가기 전에 미리 선행 학습을 하는 걸 알고 있냐며, 방학 계획까지 세워주신 선생님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데다가 곧잘 했고, 자연스럽게 학교선생님이 꿈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가고 싶은 대학과 학과를 결정했다. 그 학교를 선택한 이유를 남들에게 말할 때는 ‘교사가 되기 위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공부를 엄청 잘해야 갈 수 있다고 해서’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그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등록금 때문이었다. 등록금은 면제였고, 전교생이 처음 2년간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는데 기숙사비는 물론 식비도 무료였다. 주7일 3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학은 현재도 거의 없다. 알고 보니 아예 돈을 안 내는 것은 아니었다. 등록금 대신 기성회비를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등록금이라고 계산하더라도, 전국에서 최저였다. 그리고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뒤에 국가장학금이라는 제도가 생겨서 나는 사실 대학 4년을 거의 공짜로 다녔다. 
 성적으로는 SKY도 가능했지만, 등록금과 생활비를 생각했을 때 현실적인 부담이 엄청났다. 그 당시에는 ‘가장 가고 싶은 학교’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만약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부유했다면 내가 과연 그 학교를 굳이 선택했을지는 의문이다. 나의 첫 장래희망이었던 ‘화가’는 예체능 시키다가 집안 다 말아먹는다는 사주팔자 풀이를 듣고 강제로 그만두었다. ‘외교관’이나 ‘한의사’도 잠시 관심을 두었지만, 오랜 시간 공부를 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기간 동안 벌지 못할 돈을 생각하며 그만두었다. 어차피 안 되는 것을 꿈꾸는 것보다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최고의 길이 되는 법이 나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장난기 없이 차분한 기질을 타고나서여서도 있겠지만,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것을 많이 따지는 성향이 한몫했을 것이다. 제일 싫어하는 것은 ‘쓸데없이’ 무엇인가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학창시절에는 공부에 집중했지만, 그 공부조차도 효율적으로 하려고 애썼다. 연애는 물론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도 감정보다는 이성이 아주 많이 관여했다. 당시 제일 좋아하던 연예인이 서울에서 콘서트를 열자 학교 친구들이 꽤나 많이 간다고 했다. 엄마가 나도 가고 싶냐고 물으셨지만 티켓값과 왕복 차비, 식사비 등을 계산해 보니 몇십 만원이 드는 상황이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진심으로 쏙 들어갔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경향성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아빠가 돌아가시게 되면서 갈피를 잃었다. 아빠는 의외로 우리집 가장이 아니었고, 오히려 무수한 사업 시도와 실패로 인해 엄마는 물론 외가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모양이다. 아빠를 무척 사랑한 우리는 모두 슬퍼했지만,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나자 엄마는 오히려 홀가분해보였다. 전세살이를 한 것도 혹시 모를 압류를 막기 위해서였다며 집부터 마련했다. 엄마는 이전과 같이 일했을 뿐이지만,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예측불가의 사고가 없어지고 마침 나까지 대학 기숙사로 나가면서 입이 줄게 되어 순식간에 돈이 모였다. 엄마는 금세 대출을 갚고 신축 아파트에도 도전했다. 이전에 우리가 왜 가난했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것에도 종종 시간과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자아실현 욕구는 ‘자연스럽지’ 않다. 나는 교생 실습 때 그 학생의 질문을 받고 혼란스러웠다. 학교 현장에서도  저런 질문들을 받을 텐데, 그 아이들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처지면서 그 순간을 넘기는 대답만 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진로 변경을 고민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그나마 나은 것이 공립학교 교사라고 생각했다. ‘공부한 것이 아깝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나에게는 안정성이 중요했다.

 동생은 나보다는 비교적 상황이 나아진 상태에서 진학과 취업을 결정할 수 있었는데도, 성적에 맞지 않게 특성화고에 진학해서 자기 장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든 대학 졸업장은 따야 한다고 억지로 대학에 보냈지만 결국 졸업 후에도 한참을 아르바이트만 하더니 결국 식당에 취직했다. 전공을 살려 더 나은 직장을 알아보라고 해도 자기는 지금이 좋다며 안주하고 있다. 책 속의 우빈이가 동생과 묘하게 겹쳤다.

 또한 책 속의 수정이같은 삶은 가난한 여성 청소년에게 얼마나 흔한가. 어차피 가명이겠지만, 내가 딸을 낳는다면 절대 이름으로 짓고 싶지 않은 이름이 ‘수정’이다. 하필 주위의 ‘수정’들이 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부터 엄마대신 동생들을 돌보고, 결혼을 해서도 엄마를 부양하는 삶을 살고 있는 친구는 육아휴직을 시작하고서야 처음으로 일을 쉬어본다며 어색해했다. 스무 살부터 돈을 벌었지만 자기 몫으로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부모가 자식의 명의를 남에게 빌려주는 이야기나, 자기가 모르게 생긴 빚을 갚는 이야기를 읽으며 가난한 이의 삶은 어쩜 그렇게도 비슷한지 신기한 마음까지 들었다.
 지금 나는 결혼을 해서 새 가정을 꾸리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출을 내어 새 집을 산다거나,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너무 먼 일처럼 느껴진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그 시간들에 비해 ‘새 집’은 너무 쓸데없이 비싸다. 구축에 빌라면 어떠냐는 생각이 자꾸 나를 괴롭힌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휴직을 하고 경력이 단절되는 동안 벌지 못하는 돈도 너무나 큰데, 아이에게 들어갈 돈은 오히려 그보다 더욱 더 크다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럽다. 더구나 내 아이조차 ‘가지고 싶은 것이 없는’ 눈치빠른 애늙은이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제일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실 아직 많은 것을 포기한 상태는 아니다. 출산, 결혼, 연애를 포기한 3포 세대를 넘어서 집과 경력을 포기한 5포 세대, 취미와 인간관계까지도 포기하는 7포 세대에 비하면 말이다. 사실 내가 용기만 낸다면 출산과 내 집 마련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회복탄력성이라든지, 혹은 주위의 격려나 도움과 같은 내가 개인적으로 갖춘 사회적 자본만으로는 어렵다. 이러한 부분을 개인에게만 맡겨두지 않고 지원하는 구체적인 제도와 약자를 포용하는 사회 구조가 필요하다.
 내가 나의 모교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목표달성과 자아실현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양질의 교육을 무료로 받았을 뿐 아니라, 이것이 나의 전문성 신장에 탁월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얻어 삶의 안정성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만나온 남자친구와 결혼을 결정하게 한 것은 우리 사이의 믿음이 갑자기 특별해져서가 아니었다. 신혼부부에게 무이자로 전세 대출을 지원해주는 부산시의 제도가 우리에게는 정말 큰 버팀목이 되었다. 요즘은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하고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고민해보고 있는데, 단순히 주위 친구들이 아이를 낳기 시작해서가 아니다. 솔직히 내년부터 개선될 육아휴직 제도가 내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제도들은 가난한 이들을 보듬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가난한 어른들로 하여금 계산기를 내려놓고 청년처럼 꿈을 꿀 수 있게 한다. 나도 ‘쓸데없는’, 돈이 안 되지만 마음은 행복한 시도를 조금 더 해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다. 더 많은 어른들이 조금은 덜 어른스러워질 수 있도록,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가 가득한 세상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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