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554

   

다시 살아보는 나의 삶  

- <쇼펜 하우어 철학 다시 인생을 말하다>를 읽고

 


허만규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서 지혜를 찾는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의 발밑에서 지혜를 키운다.’ 평범한 글귀였지만 이복형에 대한 내 가슴을 요동치게 하였다. 


행복에 대하여

1장은 행복이란 주관적이며 행복의 척도는 평온한 마음이고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쁨이라고 하였다. 나에게 평온한 마음과 선한 마음을 평생 억누르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영원히 풀 수 없는 고르디아스의 수수께끼처럼 형과의 매듭이었다. 아버지의 외도로 갑자기 잡혀 온 포로처럼 한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한 해에 두 명을 입학할 수 없어 나보다 달 포 빠른 그는 국민(초등)학교 입학은 1년이나 앞당겨졌고, 동급생보다 왜소하여 동네북처럼 얻어터졌지만, 누나도 큰형도 방관했다. 집에서도 눈칫밥에 어쩌다 고기반찬이라도 밥상에 올라오면 형은 그곳에 수저를 섣불리 대지 못하였다. 코앞의 중학교를 마다하고 부산의 중국집에서 일한다는 소식은 명절 야밤에 듣게 되었다. 돌아보기도 싫었을 집이지만 어머니의 등쌀에도 간간이 방패막이였던 아버지에 대한 꺼이꺼이 차오르는 부정을 사춘기의 형도 명절에는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우리 집은 어린 시절 선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탓에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였다.


인생의 의미

3장에서는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맹수에 비유한 구절이 있다. ‘맹수는 무수히 많은 약한 동물들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고, 이성과 지혜가 발달한 동물일수록 고뇌에 대한 감각이 예리하다’. 동물사회에서 인간이 가장 잔인하다고 하고, 짐승만도 못하다는 속담도 있다. 또한 으스름한 밤길에 조우하는 동물 중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견해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동물사회에서 이타주의를 주목하고 개미나 꿀벌들의 협동, 힘 약한 동물들의 집단방어 사회생물학적 동물행동을 피력하였고, 윌리엄 해밀톤은 혈연관계에 있는 동물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이타주의 동물행동을 피력하였다. 부끄럽게도 우리 가족은 이성을 갖출 만큼 성숙한 후에도 맹수사회의 범주를 벗어나질 못했다.


선택에 대하여

8장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남에 대해 베풀어’ 라고 역설하고 있다. 땅다람쥐는 앞서 언급한 이기적인 맹수가 아니며 인류처럼 직립할 수 있고, 서로 협력하는 동물이다. 독수리 같은 포식자가 주위에 있는 줄 모르는 땅다람쥐는 이웃 땅다람쥐의 경고음을 듣고 땅굴로 도망갈 수 있다. 경고음을 냄으로써 죽을 위험에 직면할 수 있기에 그 경고음을 내는 기준이 혈연도가 근연하느냐 아니냐이다. 나는 그 형과 유전자의 절반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혈연도가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대문에 들어서는 것을 목격하고도 형이 꿀단지에서 꿀을 한 숟갈 정도 몰래 먹을 때, 건조 중인 곶감을 몰래 꺼낼 때 등 거의 모든 일에 땅다람쥐보다 못한 행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내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우애를 강조하고 내가 죽고 나서도 우리 아이들만큼은 형제끼리 다투는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나질 않기를 염원하였다. 


인간의 본성

10장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아해하는 그대에게’ 정말로 무서운 이기심, 신비로운 동정심,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없는 명예욕을 다루고 있다. 5학년 겨울 형이 소죽을 끓이는 중이었다. 소죽을 끓이고 아궁이 속 잔불로 고구마를 구워도 되는데 나는 빨리 먹고 싶은 욕망에 불덩이를 아궁이 밖으로 꺼냈고, 불똥 하나가 튀어 옆의 마른 솔가지에 붙어 불이 났고, 사랑채 이엉은 홀라당 탔다. ‘누가 불을 냈느냐?’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회초리 세례가 그 형에게 쏟아졌고 변명해도 소용없기에 형은 말이 없었다. 쫓겨나 짚 무더기 속에 잠을 청하고 있는 형을 할머니가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얼어 죽었을 것이었다. 그해 겨울이 지나자, 형은 집을 나갔다. 

나는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린 김동리 선생의 “등신불”을 접했다. ’기’라는 자식을 데리고 개가한 여인이 본댁의 아이 ’신‘에게 독이 든 밥그릇을 주었는데 몰래 본 기가 대신 먹으려 하자 신이 집을 나가고, 기는 스님이 되었고, 훗날 문둥병에 걸린 신을 위해 소신공양을 하는 일화에 화재 사건이 전광석화처럼 겹쳤다. 나의 침묵으로 형은 매 맞은 아픔보다 또래 동생의 배신감, 가족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는 소외감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4장에서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신으로부터 침묵을 배웠다’ 글귀와 반대로 행동을 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면 등신불의 두 아이보다 더 컸을 것인데도 정직하게 말하기는커녕 침묵함으로써 쇼펜하우어의 정말로 ‘무서운 이기심’이 아닐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가슴에 커다란 응어리를 생성한 것은 자업자득이었다.


현명하게 사는 방법을 묻는 그대에게

9장에서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알기 전 선한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니면 화재의 그 야단에도 무고를 주장하지 않은 형의 선한 마음이 내 마음에도 남아 있을까? ‘고통스러운 상황,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이복형제 관계’ 등 어린 시절 감정이 나이가 들면 희미하게 사라질 것 같은 회억이 암소가 외양간에 비스듬히 누워 되새김질하듯 눈을 감으면 시나브로 뇌리에 맴돌았다. 어머니가 형을 야단치려고 빗자루를 찾으면 부리나케 대령한 일, 쟁기질에 소를 처음 길들일 때 소코뚜레를 잡고 이끌어야 하는데, 소뿔에 등을 들이받힐까 봐 형에게 돌리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이의 등을 들이받지 않았던 암소의 커다란 눈에도 가끔 농사일이 힘들면 눈망울 아래 갈색 털이 눈물에 젖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 소의 눈망울을 닮은 형을 찾아 수없이 흘렸을 눈물을 보듬고 진작부터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래야 2장에 ‘두 사람 눈빛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들의 가슴에 사랑의 본질이 싹튼다’라는 말이 나에게 실천적 의미를 지낼 것이었다.

 ‘왜 지금 다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필요한가’라는 부제처럼 왜 형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언제가 화재진실을 밝혀져 그 전의 많은 일들까지도 내 탓이었고, 그로 인해 다른 형제들부터 외면당할 거라는 불안감이 겹겹이 누적된 응어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탓인지 소화기 장애에 잦다더니, 요즘은 악성 빈혈까지 있어 입원했다는 소식은 형수로부터 아내에게 전해졌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형의 왕래도 자연이 끊어졌고, 어느 형제 하나 먼저 나서 연락하지 않았다. 

실천적 가치로 승화될 때 나의 무거웠던 응어리가 용해되어야 비로소 행복으로 승화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면서 병원을 향하였다. 혈구 수치가 정상이면 69세까지 헌혈할 수 있다는 간호사 말이 그게 뭐라고 헌혈의 덤으로 귀가 호강하고, 뇌가 행복을 느끼게 될 줄이야. ‘다시 인생을 말한다’에서 왜 ‘다시’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갔는지 그 의미를 되뇌어보면서 헌혈 기증자란에 ‘사랑하는 형님께 못난 동생’이라고 적고, 수혈실에 누웠다. 그간의 질책인 양 따끔한 주삿바늘이 피부로 들어왔다. 모래시계의 위 모래가 아래 용기로 내려가는 이 책의 표지 그림처럼 나의 혈액이 아미커스를 거쳐 형의 혈관으로 들어가리라. 소신공양의 거창한 이름에는 조족지혈이리라. 이 책의 내용 중’ 좋은 후천적 성격이 본성보다 우선이다.’라는 글귀처럼 이 책으로 인해 본성의 노예로 살아온 시절의 애벌레에서 탈피하여 남은 내 인생은 올바른 형제의 정분을 데우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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