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568

   

"뫼르소의 고독 : 현대 사회의 이방인"  

- <이방인>을 읽고

 


제설하


  알베르 카뮈는 유명한 작가이다. 만약 그의 이름을 못 들어봤어도 대표작 <이방인>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정확하게 다 읽은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줄거리만 아는 것이 아니라 책을 깊이 있게 읽고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반적인 고전 책의 길이보다 ‘이방인’은 상대적으로 짧다. 그렇다고 다루는 내용이 쉽고 빠르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이지? 이 주인공 미친 것 아냐? 이해가 안 돼.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책을 읽는 동안 계속했던 말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책을 던져버리지 말고 인물의 관점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면서 내 나름의 이해를 해 보려고 한다.

  글을 적을 때 제목을 정할 때는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으로 짓는다. 그러므로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제목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어다. 제목의 의미는 주인공 뫼르소를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뫼르소는 이방인이었다. <이방인>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뫼르소는 이방인이지 않을까? 뫼르소의 입장에서 보면 한 명의 독자인 나도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우리는 자신과 다른 상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배척하기도 하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지 않고 낯설게 받아들인다. 하나의 행동만 서로 맞지 않는다면 관계에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두 가지, 세 가지, 여러 가지 행동들이 서로의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다면 우리는 같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서로 이방인이 된 우리는 불편한 존재가 된다.

  책으로 들어가 보면 한 남자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뫼르소이다. 그는 요양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뫼르소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장례식 날에 담배를 피우고, 다음 날에는 여자 친구와 놀러 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뫼르소는 어머니와 관계가 친밀하지 않고 그녀의 죽음에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러나 여자 친구 마리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냐는 말에 뫼르소는 "네가 원한다면 결혼할 수 있다"라고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뫼르소의 이웃에 사는 레몽이 자신의 전 애인을 폭행하려는데 그 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도 거절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이 사람 뭐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가족 사이에 정이 없는 것과 자신의 일생이 걸린 결혼 문제와 범죄를 돕는 것을 남의 일인 듯 즉흥적으로 답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가족에 대한 정이 없다고 해도 결혼 문제나 범죄를 도와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지 않을까?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렇게 내팽개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일반인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 자신의 삶에서든 외부 환경에서든 무관심한 태도를 고수하며 지낸다. 그러한 반복적으로 무감각하고 삭막한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될 사건이 일어난다. 뫼르소는 그의 친구들과 해변에 놀러 간다. 해변에서 놀다가 일행 중 한 명인 레몽이 아랍인들의 단도에 팔을 맞고 입이 찢기게 된다. 뫼르소는 이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사건을 이렇게 요약하면, 칼에 찔린 일행을 위해 뫼르소가 그 자리에서 복수를 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 자리에서 아랍인을 살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별생각 없이 해변으로 나와 걷던 뫼르소가 다시 아랍인을 만나고, 태양이 눈 부셔서 아랍인을 살해한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군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방인 中>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후 나오는 서술이다. 인간은 본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생물이다. 암울한 앞날보다는 행복과 안전이 확실히 보장된 삶을 좋아한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하며 자신이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침묵을 깨뜨림으로써 자기 나름대로 안정적이던 그의 예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뫼르소(Meursault)라는 이름에는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을 의미하는 단어들의 앞부분이 담겨 있다. 그의 삶을 뒤바꾼 사건이 그의 이름에 이미 담겨 있었다. 

  뫼르소는 자신이 아랍인을 죽인 것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을 눈여겨보며 그는 자기 인생의 결정권이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넘어간 것을 느낀다. 이 재판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과 달랐던 뫼르소의 면모가 그의 생명을 압박해 온다. 심문하는 사람은, 뫼르소가 벌인 살인사건에 대해서 심각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심문을 이어갔다. 그러나 곧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는 뫼르소의 태도에 흥분하며 십자가를 휘두른다. 그의 앞날이 결정될 재판에서도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은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느낀다. 무리에 끼지 못하고, 남들과 다른 구석이 있는 그는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이방인’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른 곳에서 왔기에 다른 부분이 있고, 그런 다른 부분 때문에 어울리지 못하다가 배척당한다. 나는 뫼르소에게 ‘이방인’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뫼르소는 책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현대의 이방인들은 여전히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는 바로 당신의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 이방인이 스스로 선택인지, 사회로부터의 소외인지는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어쨌든 우리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고 무조건 이상하다며 배척하는 것은 결코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없다. 이방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 공존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시각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서로의 시각을 넓히고,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며, 서로를 공감하고 존중해야 한다. 공존하려는 마음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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