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569

   

완장이 주는 의미 

- <완장>을 읽고

 


황은주


대학교를 졸업한 지 36년이 되었다. 윤흥길의 「완장」을 읽은지도 그만큼의 세월이 지났다. 그럼에도 다시 「완장」을 읽은 것은 영광독서감상문의 목록에 올라온 여러 책 중에서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특히 워낙 유명한 「완장」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이라고 해서 더 의미가 있었다.   

대학생 때 「완장」은 꼭 읽어야 할 필독 도서 중 하나였다. 윤흥길 작가의 다른 작품 「장마」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도 읽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열심히 책을 읽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만들어 놓고 그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다 읽고 나면 또 다른 독서 목록을 만들었다. 순수 문학인 소설과 시 그리고 사회과학 관련 도서까지.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완장」을 다시 읽으면 모처럼 학창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책을 읽고 나면 동아리에서 항상 독서토론도 했다. 「완장」을 읽고 나서도 독서토론을 했던 것 같은데, 그때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완장」을 읽고 나니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그건 완장을 차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것이었다. 


「완장」은 현재 전북 익산시 일부인 이리시 외곽의 이곡리가 배경이다. 야산 개발사업에 편승해 벼락부자가 된 최사장은 저수지 관리를 동네 건달 임종술에게 맡긴다. 임종술은 막무가내 천둥벌거숭이 인간이었다. 애초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임종술이었지만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 운암댁은 마음이 편지 않다. 왜냐하면 헌병이라는 완장을 찬 일본 순사에게 종술의 아버지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육이오 때는 완장을 찬 사람들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운암댁의 걱정처럼 임종술은 그날 이후 저수지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안팎에서 완장의 위용을 거들먹거리며 유세를 부리기 시작한다. 완장의 권력에 푹 빠져든 임종술은 저수지가 자신의 것이라도 된 양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만다. 급기야 임종술은 자신을 고용한 사장 일행의 낚시질까지 막아서며 패악을 부리다가 결국 관리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러나 종술은 저수지를 떠나지 않고 완장을 차고 나와 계속 저수지를 지킨다. 가뭄으로 인해 저수지의 물을 빼기로 한 마을의 결정조차 거부하던 종술은 수리 조합 직원과 경찰을 막다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한편 운암댁은 종술이 좋아하는 부월을 찾아가 종술 부녀를 데리고 떠날 것을 부탁하며 부월은 완장의 허황됨을 알려주고 종월의 완장을 저수지에 버리고 떠난다. 


「완장」은 완장 하나라는 존재로 인해 사람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만큼 완장의 위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완장은 단순한 완장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권력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왜 권력을 완장에 비유했을까? 

윤흥길 작가가 이 작품을 발표할 때는 제5공화국의 군부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80년대 초였다. 그 시기에 나는 대학을 다녔다. 시위는 끊이지 않았고, 수시로 학교 밖으로 나가 ‘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외쳐야 했다. 읽지 말라는 책은 몰래 복사해서 돌려서 읽기도 했고, 누군가 낯선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말도 조심해야 하는 살얼음 같은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작가는 ‘사실주의적 정공법으로는 독재 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야유의 수단으로 풍자와 해학을 동원함으로써 당국의 검열을 우회해야만 했다.’고 쓰고 있다. 그게 바로 「완장」의 출생 배경이라고.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윤흥길 작가도 완장이라는 단순한 물건에 비유해서 권력을 풍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완장」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완장을 차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생각했다면, 이번에는 그와는 조금 다르게 완장을 차면 안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또 왜 사람들은 완장을 차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우선 예전에 완장을 차야 하는 사람은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완장을 찬다면 그 완장이 제대로 쓰일 것이다. 완장의 힘이 필요한 곳에 그걸 제대로 쓸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힘이 없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줄 수 있는 것은 완장을 가진 사람일 뿐일텐데, 이때 완장을 찬 사람이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완장의 힘을 얼마나 잘 사용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음은 완장을 차면 안되는 사람이다. 완장을 차면 안되는 사람은 한마디로 할 수 있겠다. ‘강약약강’의 사람은 완장을 차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강약약강’은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힘을 가진 강한 사람이 잘못한 일을 한다고 해도 절대로 그의 잘못을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을 부추길 사람이다. 또 약한 사람에게 강한 사람만큼 비겁하고 야비한 사람도 없다. 약한 사람을 돌봐줘야 하는데 오히려 힘을 이용해 강함으로 밀어붙인다면 그것만큼 불편한 일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강약약강’의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남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은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완장을 차려고 하는 걸까? 그건 여러 욕구가 존재하는 사람의 마음 중에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남보다 잘나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런 욕구 때문에 완장을 찬다고 해도 그걸 소소한 행복 정도로만 여긴다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텐데 그걸 가지고 다른 욕구, 부와 명예의 욕구를 채우고자 한다면 그 완장은 「완장」의 종술처럼 사용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완장」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종술이 대단하다고 믿었던 완장은 아무 힘도 없이 물이 빠지고 있는 저수지에 둥둥 떠다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말이다. 그만큼 권력의 헛됨을 완장이라는 거울이 비춰주고 있는 것은 윤흥길 작가의 「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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