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227

    

욕심을 버려야 삶이 행복해지는 법이여

(김옥림 작가의 <법정 행복한 삶>을 읽고)

 


윤태정

 

 행복한 삶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법정-행복한 삶>이라는 제목이 내 마음을 잡아 이끌었다. 법정 스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하나로 모아놓은 책이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쉼 없이 글을 써온 김옥림 작가가 스님의 말씀 하나하나에 사유를 더해 정리해놨다. 동서양의 철학과 실천적 지혜를 총망라했다는 점에서 나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이 책을 바라봤다. 스님의 지혜로운 말씀이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올 때마다 ‘무소유’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한 신비함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책을 폈을 때 맨 처음 눈에 들어온 문구가 가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유하려 들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소유욕이 과하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낳게 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람 관계든 물질이든 내 것으로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세상은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다. 물질 만능의 늪으로 빠져드는 우리 사회를 걱정의 눈빛으로만 보고 있을 뿐이다. 비우자는 생각은 이상이요, 실천하는 건 현실이기에 그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세상에 나올 때 빈손으로 왔으니 원래부터 내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빌려 썼으니 떠날 때는 그대로 놓고 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알고는 있으나 남보다 더 잔뜩 움켜쥐려는 모순된 행동이 튀어나온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거늘 욕심이 과하지 않기를 타이른다. 다다익선이 최고라고 외치는 내게 최소한의 물건만 소유하라고 꾸짖는 목소리도 들린다. 

  법정 스님은 행복한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무소유>라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파한 분이다. 속세에서 무소유 철학을 이념으로 삼기는 무척 어렵지만 내 곁에는 스님만큼이나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는 분이 있다. 바로 나의 엄마.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부처님을 찾아다니며 공덕 닦기에 열심이었다. 예전만큼 몸이 자유롭지는 않은 요즘도 아침마다 동영상으로 천수경을 틀어 하루를 시작한다. 

  누구보다 불심이 굳건하여 내 차지는 양보하고 남한테 다 내어주는 삶을 살아왔다. ‘욕심이 사나우면 화가 생긴다.’라는 말은 엄마한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어온 말이다. 주위에서 뻗쳐오는 온갖 물질의 유혹에 끄덕하지 않는 곧은 심지는 스님의 검소한 사상과 맥이 같다고 볼 수 있다.

  누구의 삶이나 각자의 빛깔을 지니고 있다. 엄마가 추구하는 삶의 빛깔을 보면 자신의 이익보다 세상의 이로움을 위해 두루두루 살핀다는 점이다. 한없이 보드랍고 따뜻하고 넉넉한 빛깔이 아닌가. 엄마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불릴 만큼 이웃에게 사랑과 희생을 주었다.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살면서도 오갈 데 없는 할머니들한테 아랫목을 내어주고, 수제비를 만들어 솥단지째 내놓는 날이 잦았다. 집안에 새 식구가 들어오면 궁핍한 형편에도 초대해서 따뜻한 밥을 대접하여 가족의 일원으로서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도왔다. 

  예전의 나는 엄마의 내면에서 풍기는 인품을 보지 못하여 가난하고 배움이 없는 분으로만 여겼다. 부유한 부모 슬하에서 무엇이든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 엄마를 소개하기에 부끄러움이 많았다. 좋아하는 호떡 하나 마음대로 사 먹지 못하면서 남한테는 한치의 소홀함 없이 인사치레하는 엄마가 늘 못마땅했다. 돌아보면 가난했어도 넉넉한 웃음꽃이 피어나던 우리 집이었다. 스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는 분이 어떻게 스님의 말씀 그대로를 따르며 실천해왔을까. 

  ‘말과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듯 좋은 이미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엄마는 아랫사람한테도 “~좀 해줄 수 있을까요?” 혹은 “나, 좀 ~하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쓴다. 마치 서양에서 ‘please’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과 흡사한 대화법이다. 학교 문턱도 못 밟아봤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이 더러 있다. 대화 몇 마디만 나눠봐도 엄마의 목소리에 겸손함과 학식이 맑은 샘물처럼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학교는 안 다녔어도 ‘명심보감’의 좋은 말씀을 통째로 꿰고 있으니 내면으로 품은 향기가 새어 나오는 것일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 얼굴에는 광채가 비친다.’라는 구절에 공감이 간다. 스님은 창호지를 바를 때처럼 조용히 햇살이 비쳐드는 단순한 일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저자 또한 ‘행복은 늘 단순한 것에 있다.’라고 강조한다.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는 태도야말로 언제나 행복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큰 것에서만 행복을 찾는다면 죽을 때까지 행복을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역설하는 바가 쉽게 이해된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삶의 주인으로서 ‘온전한 삶’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오늘을 마지막인 듯 열심히 살고, 눈뜨면 찾아온 내일을 감사하게 살자.’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떠날 때는 미련을 남기지 않고 떠나야 한다.’라는 말이 오래도록 내 시선을 붙잡아 두었다.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 걱정인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네 앞날을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엄마가 건강한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서 끝까지 멋지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나의 소망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다.

  책의 끄트머리 부분에서 이르러 탄식이 절로 나왔다. 구구절절 가슴 저린 많은 문장 중에 눈물을 핑 돌게 하는 절창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엄마의 처지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한 문장에 감화되어 저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학이란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음을 가리킴이다.’ 

  학교라는 제도권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 해서 ‘무학’이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되는 거였다. 엄마는 학교라는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얼마든지 지혜롭고 행복한 삶을 가꿔온 분이다. 나는 ‘무학이십니다만 지혜를 겸비한 분입니다.’라고 엄마를 소개했던 지난날의 실수를 앞으로는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육신의 나이는 늙고 젊음을 가리지만 영혼이 깨어있는 삶은 영원히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다.’라는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건강한 정신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쩌면 배움을 계속하는 덕분일 수도 있다. 끝없이 배우고 익히라는 스님 말씀처럼 먼저 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늘 ‘명심보감’을 읽고 쓰는 시간으로 채우고 있으니 자식으로서도 본받을 만하다. 한학을 하던 외할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익힌 선비 정신이 몸에 배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결같이 낯빛을 밝게 유지하려는 태도도 그 정신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나는 가을볕 뜨락에 앉아 행복한 삶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다. 남에게 베풀 때 기분이 제일 좋아진다는 엄마 얼굴이 언뜻 스쳤다. 나도 이제 잔뜩 틀어쥐기만 했던 주먹을 펼쳐 손가락 사이로 욕심을 조금씩 놔줄 때가 왔나 보다. 엄마가 보여준 삶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지는 걸 보니. 

  마당으로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 하나가 책 표지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좋은 책 한 권이 나에게 머물러 삶의 향기로움을 가르쳐 준 멋진 가을이다. 저녁에는 엄마와 식탁에 마주 앉아 <법정-행복한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련다. 보나 마나 엄마는 또 물 만난 고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힘주어 말씀하시겠지.

  “욕심을 버려야 삶이 행복해지는 법이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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