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6753

 

"미실"을 읽고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한국교원대 부설고 최보영

 

 

 

얼마 전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다. 학교 성교육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날의 수업도 '난자, 정자' 얘기가 고작이었다. 안 그래도 주입식 교육에 지친 우리들에게, 기성세대는 그들의 고정적이고 틀에 박힌 성가치관을 강요하곤 한다. '혈기왕성한 우리들'에게 올바른 성가치관을 확립시켜야 한다는 소위 '혈기가 왕성치 않으신 분'들도 익히 다 알고 계시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학술적인 '성'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성'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진부하고 지루한 학교속의 '성'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진부하고 지루한 학교속의 '성' 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가 피안처로 삼은 곳이 미실의 관능과 도발 속이었던 것이다.

 

열아홉의 생에서 짧지 않게 앓아왔던 나의 '여성성'에 관한 문제를 미실에게서 쾌도난마 하게 된 것이다. 미실은 확실이 미실이다. 그녀가 [화랑세기]에 적힌 실존인물이 아니었다해도 그녀의 농염한 자태는 여전히 살아 움직임을 알 수 있다. 비단 옷자락 속은 아니더라도 정갈한 교복아래 감춰두었던 나의 성 정체성을 일캐운 미실은 천 오 백년전 사라진 이슬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도 의심치 못할 것이다. 처음엔 굉장히 놀랐다. 

 

[미실]이라는 책 이름이 한 여인의 이름인지도 모른채 붉은 겉표지에 매료되어 그녀를 만나게 된 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황제의 색을 즐겁게 하기 위해 준비되어지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이 실로 큰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배워온 성에 대한 개념으로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구역질이 났다. 처음 만난 달밤에 서로를 탐닉했던 나보다도 어린 세종과 미실의 불타는 몸뚱아리는 내게 한 쌍의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유교적 체제가 도입되기 전 시대라 해도 짐승처럼 훅훅 거리는 열기를 내뿜는 그들은 내게 있어 사랑의 교합 이라기보다는 굶주림에 포효하는 먼지투성이의 짐승들에게 가까웠다. 책을 읽는 내내 모래를 가득 씹은 듯한 메스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전율들로 가득했다. 열 아홉의 대한민국 여고생인 나에겐 미실의 모든 행동들이 전혀 미학적이거나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로지 빨간 등을 켜놓고 남자들의 바짓가랑이 속 돈을 향해 혀를 낼름거리는 요사스런 창녀들이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론 궁궐 안에서의 '여성'은 단순한 여성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하면서 지소태후에 의해 쫓겨난 미실이 측은하기도 하였다. 어차피 미실의 탄생부터가 황제의 색을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녀와 정을 통한 모든 남자들에게 내가 바라는 순정을 바치기엔 미실의 운명은 너무도 크고 무거워 보였다.

 

권력과 힘과 가문,, 그 모든 것들이 미실의 여근에 달려 있는 것 또한 미실을 진정한 여성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21C의 여고생의 모습을 버리기로 하였다. 내 교복도, 나를 에워쌌던 그 유교적 관념들을 모두 다 벗어버리고 천 오백년전의 신라로 돌아가 미실과 동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찬찬히 둘러보았다. 미실이 사랑하고, 미실을 사랑했던, '국사책' 속의 근엄한 그들을 만나보았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지닌 위엄하기만 할 것 같은 진흥왕도 그녀의 가슴안에서 헐떡이는 약한 새에 지나지 않았다. 미실 대신 죽은 설원랑 또한 화랑의 풍월주보다도 미실의 욕창을 걱정하는 힘없는 남자가 되기를 원했다. 역사를 호령하던 그 숱한 남자들의 순정을 받은 이유가 단지 미실의 아름다움과 여색에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내가 만난 미실은 여느 역사 속에 존재하는 요부와는 달랐다. 음란한 음기로 양기를 매혹하여 상대는 물론이거니와 자신마저 타락으로 몰고 가는 요사스런 기녀가 아니었다. 풍만한 그녀의 가슴에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시퍼런 유두가 꼿꼿이 서 있었고, 천하를 휘두르던 양기를 다스리고 안아주는 따스함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동률태자의 자고 있던 본능을 살린 것도 그녀였고, 누구에게도 배워 본 적 없지만 자신의 성기를 붙들고 신음하던 불쌍한 꼽추의 물건을 핥아주고 적셔주었던 것도 그녀의 입술었다.

 

미실은 스스로 낮아지고 천해졌으며 또 원화의 자리에 올라 권력의 맛까지 보았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결국엔 찰나의 저항도 없이 수수하게 생을 마감했다. 무엇을 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동적으로 끌려다닌 그녀가 아니었다. 미실은 그녀의 외할머니인 옥진이 일러주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맛보고 만져보고 맡아보았을 뿐이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깨물어 터뜨리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저 미실인 것이다. 그녀와의 경이로운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열아홉의 교복을 꺼내 입었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조선시대 이후부터 조여 오던 유교적 관념들이 나의 호흡기를 압박해왔다. 그러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감추고 숨기고 부끄럽고 수동적이어야 했던 내 젖가슴은 비로소 뜨거운 피가 감돌았고, 치마속의 그것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미색으로 여러 남자를 거느리겠다는 가당치도 않은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미실을 통해 가끔씩 요동치는 '여성성'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을뿐이다. 죽어있는 '성'이 아니라 내 의지가 담겨 있고 나를 살아가게 해 주는 내 몸 안의 생명을 발견한 것이다.

 

두렵지 않다. 천 오백년 전 미실도 그 엄격한 궁궐 안에서 자유롭게 호소력 있게 모성을, 여성을 지켜나가지 않았던가? 나도 해낼 수 있으리라... 어느 순간에 쾌락과 더러움과 추악함으로 변모한 우리시대의 여성성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 몸 속 아홉개의 구멍을 통하여 미실의 호흡이 살아 숨쉼을 느낀다. 아름다음은 아름다음 그 자체일 뿐, 부드러움은 부드러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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