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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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 진짜 이야기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고

 부산 강서우체국 사서함 50호 박동수

 

 

 

우리들이 행복한 시간, 그 진짜 이야기. 

책을 읽음에 있어 내게는 한 가지 습관이 있다. 읽고 난 후 책을 앞에두고 장고(長考)를 가진다는 것이다. 헌데 이것은 습관의 차원을 넘어 일종의 원칙에 가까운 것이어서, 학습을 위한 책읽기가 아닌 경우에도 다름이 없다. 나름으로는 책에서 얻은 것을 내 생각 혹은 삶과 견주어 보려는 것인데, 그것이 그닥 쉬운 일만은 아닌지라 같은 책을 열흘 내지 보름의 시간을 두고 다시한 번 읽어야 그나마 가닥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지영님의 일곱 번째 장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역시그런 경우였다. 다만 몇 가지 다름이 있다면 두 달에 걸쳐 세 번을 읽었다는 점과 그렇게 읽고도 여태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랄까. 때문에 이 시점에서 책에 대해 무어라 무어라 말을 한다는 것은 자칫 위험하거나 무모한 일이 되기 십상일 터이다. 하지만 들리는 말로 책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하니, 이쯤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들이 행복한 시간」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불편하다. 문장은 평이하고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불편하다. 줄거리라고 해야, 젊은 사내 하나가 살인죄로 사형수가 되어 절망하다가 몇몇 사람을 만남으로 해서 안정을 찾고 선함을 회복하지만 끝내는 형장에서 숨을 거둔다. 라는게 고작 이다. 더할 것이 있다면, 와중에 노유정이라는 여인과 사형수 정윤수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며 삶의 의미를 되찾아간다는 것 정도일까. 그런데도 내게는, 어렵고 불편하기만 하다.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첫째로 아무래도 내 신분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수형자라는, 살인범에 무기수라는 신분, 주인공인 정윤수와 한 치도 다를바 없는 - 사건 내용은 다르지만 사람의 생명을 앗았다는 점에서 전혀 나은 점이 없을 터- 살인자라는 점 때문에 나는,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선뜻 공감을 표할 수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실제로 사형이 구형되기도 하였거니와 스스로도 죽어 마땅하다 여겼던 나는, 윤수의 사형이 부당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흔한 말로 머리로는 되는데 마음으로는 되지 않는 상황이랄까. 일종의 강박적인 자기검열이랄 수도 있겠고. 

 

다음으로는, 작품론이 될 수 있겠는데, 작자인 공지영님이나 화자인 노유정이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작품’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는 점이 탐탁치 않았다. 주제가 워낙 무거웠던 탓인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미처 다듬지 못했던 까닭인지, 이번 작품은 다분히 선언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때문에 ‘이것은 감동도 아니고 이해도 아닌 신파가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행복하기는커녕 못내 불편하기만 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생명’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우리가 너무 가볍게 ‘찧고 까불고’ 있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살인자에 무기수라는 것이 결코 평범한 신분이 아닌 까닭에, 지난 몇 해동안 나는 그 누구보다 깊이 ‘생명’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깨친 바로는, ‘생명’은 어느 누구 혹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는 끊으라거나 이으라고 명하여질 수 없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자면, 생명은 말 그대로 ‘살아 있으라’는 당위인 것이다. 감히 누가 있어 생명의 시작과 끝을 알기에 한 생명을 죽이라 마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생명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살인자를 살려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자기당착 아니겠느냐는 내 친구의 말처럼, 이 부분에는 혹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더구나 피해자나 유가족의 입장이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생각일 테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살인으로 대표되는 흉악범죄가 온전히 범인 한 사람만의 책임인가 하는 부분말이다. 

 

듣기로, 살인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를 사람들 중에는 뇌신경 손상이 관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게 성장기 특히 유소년기에 그네들에게 가해졌던 폭력과 학대의 결과물이라 한다. 하여 그네들은, 책에서 의사인 유정의 외삼촌 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타인의 아픔 같은 것들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수를 비롯한 그네들의 탈선과 비행 그리고 범죄에는 우리네 이웃들의 책임도 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더구나 사람은 여느 동물들과는 달리 불완전하나 존재로 태어나 양육되면서 비로소 완전히 만들어진다는데, 그래서 사람은, 김형경님이 「사람 풍경」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린 시절의 상처와 억압으로 인해 성인이되어서는 질투와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열에 이르는 부정적 혹은 병적 심리를 보인다는데, 윤수를 몰아부쳐 끝내는 자신과 세상 모두에 큰 상처를 내고야 말도록 한 책임은 누가 져야하는 것일까. 그마저 윤수에게 틀려야 하는 걸까. 김형경님이 힘주어 말하였듯 윤수가 제 상처를 직시하고 돌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주지 못한 우리들은, 과연 무죄일까. 

 

생각해 보자, 윤수와 동생 은수는 아버지에게는 매를 맞았고 어머니에게는 버림받았다. 그리고 유정은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형제에게 앵벌이를 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눈 먼 은수를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했다. 또 우리는 어린 유정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외면한 채 세상의 풍족함을 노래하기 바쁜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만약 내가 그리고 우리가,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서로 보듬어가며 지낼 수 있도록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거리로 추방된 윤수 형제에게 베고프지 않느냐고 한 번이라도 물었더라면, 소년원에서 범죄와 절망이 아닌 희망을 배우도록 약간의 노력만 더 기룰였더라면, 유정이 성(性)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고귀한 것이라 느끼도록 해주었더라면, 나 그리고 우리는 죄가 없다. 나아가, 그것이 신의 그물이든 사랑의 그물이든 사회안전망이라는 것이 조금만 더 촘촘했더라면, 국방비로 복지비를 충당할 수 있게 분단이 해소되었더라면, 단전과 싸움이 아닌 대화가 우리의 길일 수 있게 군사문화가 일소되었더라면, 풍요가 아닌 그 안의 빈곤을 볼 수 있도록 자본에 눈을 달아놓았더라면, 폭력이 폭력을 조익시킨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역사가 정직했더라면, 세상은 무죄다.

 

그렇다고 윤수의 행위에 일말이나마 정당성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생명을 해한 나의죄를 희석시키고 싶은 마음 역시 추호도 없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오래도록 폭력과 공포에 시달렸던 게 사실이지만, 내 죄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강박적인 엄격주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나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버젓한 직업도 있어서 스스로를 돌보고 다스릴 기회가 충분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허나 윤수를 비롯해 끝내 제 삶과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깨뜨려야 했던 불행한 영혼들은 다르다.

 

세상은 결국 너 나 없이 얽힌 인연 덩어리더라는 법구경 구절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강의」에서 신영복님이 말씀하시니 사회의 통체성(統體性) 혹은 총체성을 애써 끌어오지 않더라도, 그네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몬 것은 우리의 입과 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세상이 이토록 통체적이라는 사실이 나는 굉장히 무섭다. 아무 것도 아닌 내말과 마음 씀씀이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니. 

 

하지만 나는 또 우습게 그러나 다행스럽게, 세상이 결국 하나라는 데에는 희망을 본다. 내 말 한마디가 어머님을 변하게 하고 친구를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또제 이웃들의 손을 잡아간다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호의로 내민 손을 세상 모두가 맞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웃게 하는 것이다. 주인공 유정이 고모를 통해 윤수를 만나고 서로를 통해 희망을 본다든가, 윤수의 뜻을 이어 유정이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동해에 간다든가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테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이 행복한 시간」역시 공지영님이 망설이며 내민 따뜻한 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나 역시 그 손을 잡음으로 해서 시나브로 변한 것인지도. 그런것이라면, 탐탁찮고 불편하다던 나의 독후감은 물러야 마땅할 것이다. 유정이나 공지영님이 그렇게 찾던 ‘진짜 이야기’가 바로 따로 또 같이 손잡고 가자는 얘기였다면, 이 소설은 적어도 내게만은 성공한 셈이니까. 시쳇말로 시대의 절망이자 희망인 통체성 속으로 난 갈에서, 마침 맞은 이정표를 나는 만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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