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6752

 

"미실"을 읽고

 서울시 도봉구 창1동 정은지

 

 

 

미실을 당대의 최고 권력가라고 할 수 있다. 왕의 권력도 성(盛)하였다가 쇠(衰)하는 것이 마련인데, 미실은 세 왕을 연달아 모시며 왕에게 정치적인 입김을 불어넣었으니 어찌 보면 현실의 왕보다 재위기간이 더 길었던 장막 속의 왕이었던 셈이다. 미실이 왕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머물면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미모와 대원신통으로서 교육받아 얻게 된 뛰어난 방중술 때문이다. 그리고 미실은 이러한 성적 매력을 철저하게 권력화하였다. 소설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미실의 매력과 권력욕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역사에 대한 고리타분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미실의 성적 편력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색사로 왕을 보필해야하는 대원신통이었던 미실이 모신 왕만 세어 보아도 세 명이었고, 은밀한 관계를 맺은 풍월주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미실을 비도덕적이라 탓하거나 흉보지 않았다. 오히려 탁월한 색사 능력에 찬탄하며 다른 왕들의 교육까지 맡겼다. 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일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황제를 사내답게 하는 소중한 도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황후가 기력이 쇠하여 보일 때 미실은 남편에게 색을 통하여 황후를 위로하고 삶의 기쁨을 누리도록 이끌어주라고 한다. 性을 숨기거나 억눌러야할 대상으로 본 흔적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육체를 탐닉하고 쾌락을 즐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미실을 우리의 관점으로 미실을 여신 혹은 악녀로 구분하고 싶어 한다. 어찌 보면 여신 같기도 하다. 미실은 여신이라 할 만큼 강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미실은 빼어난 외모와 풍만한 몸매, 명랑한 성격으로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일컬어졌다.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뺨과 깔깔대는 시원한 웃음소리는 마치 입안에서 톡하고 터지는 붉은 물앵두 같았다. 할머니 옥진이 어린 미실을 자연에서 길렀던 것만큼 미실은 자연과 소통하였으며 자유로웠다. 타고난 매력 때문인지 할머니의 교육 덕분인지 사내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미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사랑을 즐길 줄 알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미실은 변명할 수도 없는 악녀이다. 미실의 문제는 그 매력이 치명적일 정도로 강했다는 점이다. 사내들이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나락으로 치달았다. 아귀 벌린 낭떠러지 같은 아찔한 쾌감에 마음을 빼앗긴 사내는 모든 것을 잃었다. 미실은 욕망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자신의 매력과 권력욕으로 세상을 휘저었다. 어미와 어미의 어미로부터 세상의 달콤한 맛과 향기를 탐닉하는 방법을 배운 그대로였다. 세상의 모든 사내들이 그녀가 만든 수령에 바져 헤맨다 해도 미실은 두려움이 없이 자유로울 뿐이었다.

 

이토록 이중적인 미실은 사실 여신도 마녀도 아니다. 오히려 차갑지만 부딪히면 날카롭게 불꽃이 이는 칼날과 닮았다. 칼은 강하지만 섬세하고 빠르지만 정확하며 매혹적이지만 위험하다. 칼날에는 도덕도 가치도 없다. 전장에서 장수의 손에 쥐어진 칼과 낚시터의 범부가 생선비늘을 벗겨내려 집어든 칼, 검무를 추는 사람 손에 들린 칼과 살인자의 품에 숨어있는 칼 사이에 선악과 귀천의 간극이 있을 리 없다. 상황이 비록 모두 다를지락도 칼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파르스름한 매력을 뿜어낼 뿐이다. 미실에게 있어서 성(性)도 이처럼 때로는 화려한 장식품이었으며 때로는 상대를 해하는 무기, 때로는 권태를 해소하는 도구일 뿐 가치판단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미실에게는 일탈이란 개념을 적용할 수가 없다. 애초에 일탈이라 규정지을 만한 가치관도 억압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제하는 가치관이 없기에 죄책감도 없다. 물론 동생 미생과의 근친상간 이후에는 같이 두려움에 떨기도 하였지만, 미실이 두려워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었지 천지신명은 아니었다. 그녀가 믿는 것은 삶이었고, 살아있는 육신이라고 했다. 미실은 행동을 규율하는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가치에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지극히도 현세적인 모습이 오늘날의 모습과 묘하게 맞닿는다. 미실에게 있어서 성은 힘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모든 것이 소멸되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미실의 여성성과 함께 그녀의 힘과 아름다움이 사그라졌다. 성은 미실의 삶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며 삶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미실은 그 성에 종속되지 않았고 자유로웠다. 권력을 쥔 채 온갖 정치적 공작을 펼쳤지만 적어도 미실의 삶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미실 스스로도 자신은 자신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지나온 세월과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14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가진 성에 대한 관념들을 되돌아본다. 사회가 많이 개방적으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성은 숨겨야 할 것, 부끄러운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념은 조선시대 이후로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유교적 가치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발빠르게 답습한 서구의 근대문화도 우리의 사고틀을 규정짓는데 한몫했다. 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사람들의 의식은 조선시대의 고인 물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성적 담론은 대부분 음담패설의 형식으로 술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언론은 단편적이고 말초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뿐이다. 최근 여대생의 성경험 여부가 신문지면의 헤드라인을 대대적으로 장식한 것이 그 예이다. 그 조사의 실질적인 내용은 한국 여대생의 성지식의 내용과 깊이를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우리 사회의 언론은 미혼인 성인 여성의 성경험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우리를 지배하는 가치관은 변화한다. 오늘날 이 공간의 잣대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평가할 수 없다. 이려ㅓ한 당연하고도 낯선 깨달음은 소설 「미실」을 만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의 행간 속에 살아 숨쉬던 미실이 활자의 화석을 깨트리고 살아나왔다. 소설 속에서 미실은 싱싱하게 망울지고, 탐스럽고 풍성하게 활짝 피었다가 조용히 시들며 사라졌다. 미실의 시대답게 성기를 극대화하여 익살스럽게 만들어진 신라시대 토우들이 오늘날의 작은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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