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7666

 

페르소나그 가면화 화해 -  "오프리 윈프리, 위대한 인생"을 읽고

부산시 서구 서대신동 서민정

 

  

 

내가 서 있던 곳은 러닝머신 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 뛰기만을 열심히 한 세월이 서러웠다. 전업주부라는 틀은 아이들로 인해 노릇노릇한 기쁨을 구워냈지만 타들어가는 목마름은 어찌할 수 없었다. 출산으로 직장을 떠나 육아에 매달리는 여성인력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려는 얄팍한 제도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도, 아이들을 키우는 소중한 순간들이 내 삶을 전부 채워줄 수 없음을 한 해 한 해 지나며 느끼게 되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그 날도 전업주부라는 앞치마를 두른 채 지겨운 삶의 층위들을 겹겹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에바 일루즈의 ‘오프라 윈프리, 위대한 인생’이라는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내 팍팍했던 이성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가난과 성폭행, 미혼모, 마약 복용 등의 질척한 수렁에서 빠져나와 최고의 비즈니스 우먼, 20세기의 인물, 세계 10대 여성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흑인 여성 오프라 윈프리. 만약 그녀의 삶을 엿본다면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내 꿈의 모닥불에서 조그만 불꽃이라도 피어오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설레임으로 살며시 책장을 넘겨보았다.

 

무엇이든 한 가지 일에만 열심을 내고 최선을 다해야 했던 내 페르소나. 약간의 모험이 가미된 지름길이나 샛길보단 반듯하고 넓은 길을 가야만 했던 페르소나는 항상 걸림돌이었다. 그 고집 센 페르소나로 인해,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해 항상 아쉬워하며 한숨으로 세월을 엮어가던 모순덩어리가 바로 나란 존재였다. 

 

담뿍담뿍 받았어도 흘러 넘쳤던 친정어머니의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도 퍼 담아 주고 팠는데 그것은 지난한 것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전업주부가 된 지 8년, 짧다면 짧은 기간인지 몰라도 퍼 올릴 것 없는 마른 우물을 안고 살아온 세월은 지루하였다. 평탄하기만 했던 삶은 대학, 직장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거침없는 아우토반에서 속도감을 잊은 채 달리고만 있었다. 불임으로 고민하는 시대에 첫 아이의 출산은 소리 내어 지르지 못하는 환호성이었다. 

 

남들이 잘 생겼다는 얘길 해주지 않는 게 내심 속상할 정도로 내 눈엔 너무 예쁜 아이를 정말 금이야 옥이야 정성껏 키웠다. 무슨 일이든 앞만 보고 최선을 다하게 했던 내 페르소나는 그렇게 날 단련시켜 왔기에, 대학 졸업 후 바로 시작했던 8년간의 직장 생활을 쉽게 포기하게 만들었고 전업주부로서 오직 아이에게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온갖 육아서적을 뒤적이며 엄마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려고 아득바득 살아왔지만 아이의 이유식 시기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내 가슴에 소리 없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머리로만 키울 수 없었던 까다롭고 예민한 첫째 아이, 그 아이를 가슴으로 키워야 함을 책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항상 좌절하고 말았다. 아이에게 모든 걸 바쳐 헌신한다는 건 당장 보여 지지 않는 결실인 줄 알면서도 느긋할 수 없는 피말림이었다. 육아라는 긴 레이스에 일분일초까지 아이를 위해 쏟아 붓는다는 건 답답함으로 밀려왔다. 그렇게 완벽한 엄마가 되려면 하면 할수록 폴폴 먼지 일으키는 모래밭 길뿐이었다. 

 

둘째를 가지면 차진 옥토까지는 아니더라도 옥수수나 감자 정도 키울 수 척박한 땅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둘째 출산 후 깊이를 알 수 없는 벼랑으로 떨어진 나는 삶의 가속도에 몸을 맡긴 채 머릿속은 텅 비어져 갔다. 그 순간 도서관 계간지 속에 ‘어머니 독서치료’라는 글자가 내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태양은 이글거리며 모든 것을 녹여 버릴 것 같았던 여름, 나는 조심스레 도서관 전화벨을 울리게 했고 사서님의 정성어린 관심에 벼랑의 허공 속에서 대롱거리는 실오라기를 본 듯했다. 나의 독서치료모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초기 얼마동안은 헤어나올 수 없는 심해에 계속 가라앉고만 있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치유받고자 하는 내 과거를 드러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오프라 윈프리는 입에 담기조차 힘든 자신의 과거들을 대중 앞에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그 사실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혁명적 자전’을 만들어 왔으며 그 자전은 치유라는 문화적 코드를 통해서 오프라 윈프리라는 인물을 창조해왔음을 읽자 트라우마에 막혀 유통기간이 지나버린 내 과거, 그 상처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함으로써 치유 받을 수 있는 공간인 ‘독서치료모임’을 적극 활용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자전도 오프라 윈프리처럼 새롭게 써 볼 용기조차 가지게 되었다. 가족, 사랑, 결혼 그리고 육아 등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더 이상 의지할 만한 근원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에 계속 방황하게 되었고 육아의 어려움과 전업주부의 목마름을 친정언니에게 호소해 보았다. 하지만 취업주부인 언니는 오히려 평탄하게 보이는 내 삶을 부러워하며 내 고통쯤은 복에 겨운 잠꼬대정도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오프라 윈프리 쇼’의 주된 주제는 기형적 삶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의 몸부림’이라 했다. 

 

정상적인 일상이나 평범한 삶은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이기에 그녀의 쇼는 일상의 삶을 강조하면서 중산층의 취향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산층은 정체성의 긍정적 확인을 위한 터전으로 일상의 삶을 발전시켜 나가는 집단이라 한다. 백인 중산층 여성의 삶은 흑인 중산층 여성의 삶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삶이 전격적으로 와해된 탓에 온갖 형태의 고통에 짓눌려 있게 되었다. 

 

즉 후기 산업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는 주었지만 다양한 심리적 고통을 안겨주면서 자아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근거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훼손시켰다. 특히 가부장제도가 여전히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근거를 억압시키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 비해 심리적 장애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에 오프라는 여성이 정체성을 구축하고 문화의 재생산에 참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며 고통을 치유해주려고 매진한다는 것이다. 

 

나는 ‘독서치료모임’에서 오프라식 치유방식처럼 자아의 곤경을 결코 비판적이지 않는 타인의 시선에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힘을 얻고자 한다. 그러면 어느 새 카타르시스와 함께 자존과 존엄이 훼손당한 전기를 치유 받고 내 정체성을 확립시키리라 믿기 때문이다. 오프라는 자주 “모든 불행에는 교훈이 있다”는 속죄적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고통은 언제나 변화를 통해서 종식된다는 것이다. 자아의 굳은 결심과 자기 인식을 통해서 혹은 이타적 성향을 표출하면서 자신을 극복할 때 고통은 끝난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는 삶의 의미와 목표의식을 추구하기 위해 꾸준한 절제와 자기 계발을 독려한다. 

 

갈증에 허덕이며 고통으로 물결치는 삶의 바닷가에서 주저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나만의 심신회복실을 마련하는 게 시급했다. 그래서 ‘독서치료모임’에 동참했고 독서와 이야기 나눔의 시간을 통해서 이미 회복실 기초는 닦아 놓은 셈이었다. 내 페르소나는 전업주부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각인시켜 슈퍼우먼 이상을 요구했고 난 그 요구에 지난 8년 정도 열심히 부응했지만 이제 나 자신을 위해, 지금껏 최선을 다하고 부단히 노력한 나를 위해 이기심을 부려볼 때가 되었다. 

 

둘째 출산 후 홍수가 나 버린 내 마음의 댐은 이제 수문을 열어야 했다. 방류, 그것은 물줄기가 굵은 길을 따라 그냥 흘러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다. 그렇게 산산이 부서질 내 페르소나는 이미 두려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고여 있는 댐 속의 물이 아닌 유유히 흐르는 강과 드넓은 바다를 대면하기 위해선 이젠 놓아 주어야 할 물줄기인 것이다. 떨어지는 아픔은 그 이상의 넓은 세계를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내 안의 위험 수위를 낮추어야 했다. 20년 뒤 ‘빈 둥지 증후군’에 발목 잡히지 않을 특효약, 그것은 내 안의 육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수문열기에서 시작되었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과거의 치유와 끈질긴 절제 그리고 자기 계발만이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기에. 전업주부라는 진공 포장 안에서 아가미를 할딱이던 한 마리 물고기인 나는 더 이상 숨 쉴 자유조차 없었다. 진공 포장지를 잘라 줄 경쾌한 가위질 소리만 손꼽아 기다리며 두 눈 또옥 뜨고 있을 뿐. 그때 사회학자인 저자는 제목에서 느끼게 해 준 탄산음료의 톡 쏘는 듯한 첫인상으로 다가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책은 얄팍한 상술로 빚어진 책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학 개론서와 같은 교양서이자 자기 계발서로서 지적 유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는 저서이다. 

 

특히 ‘독서치료모임’을 통해 내 삶의 방향이 올바른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고 ‘독서’를 통한 자기 계발의 의지를 북돋울 수 있게 해 주었다. 짜릿한 외도, ‘독서치료모임’은 처음엔 두렵기까지 했다. 육아에만 촌각을 다투며 열심히 살던 나에게 자신을 위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부여한다는 건 내 페르소나로서는 용납이 안 되었다. 하지만 이제 독서치료모임을 통해 그 페르소나와 가벼운 악수를 해보려고 한다. 독서치료모임은 굵은 밧줄이 되어 허공에서 허우적거린 내 몸둥이를 단단히 끌어 올려주고 우리 가정에 행복한 온기를 듬뿍 뿜어 줄 수 있으리라. 

 

내 마음 속 우물은 이제 수맥을 찾았다. 내 아이들이 마음 상할 수 있는 내밀한 덫을 치울 수 있게 되었고 우리 가정엔 꾸중과 짜증 대신 웃음과 이해의 향내가 감돌 것이다. 엄마의 자리는 항상 배워야하는 자리다. 엄마라는 권위로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정보의 근원지로서 아이들에게 본이 되고 유익한 것들을 알려주어야 한다. 다만 자기 계발이라는 명분 하에 독서에 심취하다보면 혹여 내 기대만큼 책을 읽어내지 못하는 두 아이들에게 책망의 시위가 당겨지지 않도록 미리 기대 수위를 그어본다. 

 

그리고 앞만 보고 달린 외골수, 내 페르소나로 인해 내 아이들이 마음 상하지 않게 항상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된다. 전업주부로서 충실히 살아온 숨 막힌 세월, 막다른 골목에서 상한 내 마음에 삶의 진액을 부어 파릇파릇한 생기를 불어넣어 줄 독서모임은 고마운 나침반이 되리라. 고백함으로써 과거의 치유함을 얻고 그 결단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삶, 오프라의 삶은 내 가슴에 한 알의 민들레 씨앗이 되어 날아 왔다. 나 또한 독서치료모임을 통해 자양분을 얻어, 다른 이들의 상흔의 밭 위에서 싹으로 돋아 날 홀씨로 부단히 준비해야겠다. 

 

물론 내 삶의 주류인 엄마이자 아내라는 소명은 잊지 않을 것이다. 숨 가쁘게 살아온 삶의 주류에 조심스레 찍어 보았던 독서치료모임이라는 쉼표하나를 이젠 당당히 삶의 벽에 걸어 놓을 수 있겠다. 그것은 척박해지는 삶에 희망이라는 커다란 물꼬를 트이게 했으니. 오프라는 오늘도 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다.

 

“독서는 내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내게 독서는 열린 문이었습니다.” 

“모두가 위대해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오늘 시작하라! 당신을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투자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갈 수 있다.” 

 

끈질긴 자기관리와 내적 성찰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정체성의 확립. 그건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자신의 삶을 위대한 인생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에 스스로 책임져야 할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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