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7665

 

다시 돌아온 사랑앞에서 -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읽고

부산시 중구 대청동 신혜원

 

  

8월의 태양, 그 빛남은 모든 것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한 줄기 스쳐지나갈 법한 빗줄기 조차도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는지 찾아올 기미가 없다. 어쩌면 여름 한나절 이글거리는 저 존재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지치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나보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뒤에 상처라는 복병을 남기는 열애의 열기처럼.......잠시 바라본 하늘에 대고 늘어놓는 푸념이 지겨워져서 책 위로 시선을 돌린다. 피서로 독서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일까?

 

“사랑 한 후에 버려야 하는 것들, 작가는 공지영이구요.”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아닌가요?” 

 

서점 직원을 따라 안내되는 잠깐 동안 왜 볼이 붉어졌을까. 다시 바라본 하늘에 대고 나는 열심히 되 뇌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그 끝이 보이던 순간 이후로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 없이 버리고 또 버려야 했던, 끊임없이 도망쳐야 하는 순간들이었다고. 사랑 후에 오는 많은 아픈 기억과 상실감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해 추억조차 남기지 못하는, 내동댕이치는 시간들일 뿐이었다고. 호흡을 내쉬며 나는 잠시 책을 손에서 놓았다. 

 

꽤 오래전 읽었던 츠지히토나리-이번 소설의 파트너로 표지에 소개된 작가-의 작품이 얼핏 떠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내 사랑이 끝난 직후여서였을까.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랑 이야기들이 비극적 이기만을 바랬다. 책 속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사랑과 비교되는 내 사랑의 비참함으로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다시 그녀들의 그들의 사랑에 집중 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그리고 마침내 오늘 처음 사랑이야기를 쓴다는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무엇일까?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막아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직도 나는 과거의 내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그녀 홍의 사랑에 유입되지 못하는 것일까. 이름처럼 붉게 타들어가는 홍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던 나의 의문은 한동안 머물러 떠날 줄 모르던 홍의 말속에서 답을 발견했다. ‘너희 일본 사람들은 다 그러니?’ 준고라는 이름이 등장하던 첫 장부터 나를 누르던 정확히 정의하지 못할 거부감의 정체는 그의 국적에 기인한 것이었다. ‘미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영국인 애인과 헤어질 때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그 말, 너희 일본 사람들........’ 

 

홍의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지울 수 없는 이름 ‘준고’ 동시에 일본이라는 단어가 주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 그녀도 나도 잠시 혼란스러웠다. 일본은 나에게 조각조각 작은 기억을 남긴다. 초등학교 시절 핑크색 작은 가방을 들고 툴레툴레 걷던 하교 길에서 서툰 한국말의 일본인 옆집 아저씨를 만났다. 

“도.시.락” 

핑크색 가방의 용도를 묻는 아저씨가 혹시라도 이해하지 못할까봐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던 그 순간,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 벤또”였다. 벤또-도시락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어린 나에게 외국어라는 흥미있는 명제를 가르쳤다. 지적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일본인 아저씨가 사실은 한국인 현지처를 두고 두 나라를 오가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훌쩍 자라서였다. 신사참배, 위안부 할머니, 통석의 영과 같은 일본과 우리나라와 관련된 단어들을 알기 전, 마냥 친구 같았던 그 존재는 그러나, 교육을 받으며, 언론을 접하며 배척의 대상으로 내 무의식 속에 자라 잡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홍의 말처럼 갑자기 애국자라도 된 듯, 하필 일본인과의 사랑이어야 했냐고 작가에게 서운한 눈초리를 보내는지도.

 

‘윤동주가 죽어간 것은 적어도 준고의 잘못은 아니었다.!’홍의 말처럼 그녀와 준고의 사랑은 일본과 한국의 오래된 역사를 들춰내며 그 어렵고 아픈 관계를 치유하자는 거창한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작가 역시 그 부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 우리가 잊고 살던 역사를 홍과 준고가 대립하던 그 순간 원죄라는 원망으로 표출했는지 모른다. 

 

‘I am just a girl in front of a boy, asking his love' 신분의 벽을 넘어 그저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이고 싶다던 영화 속 대사를 떠올리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피천득의 수필 속 주인공을 잊지 못하여 두고두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간직하던 때와 달리 쉬운 문장으로 쓰여진 이번 소설이 마냥 쉽게 읽혀지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솔직하게 뱉어버린 홍의 일본에 대한 그리고 준고에 대한 원망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단지 한 사람의 여자라는 사실을,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상대의 국적이나 조건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기 때문에 라며 나를 막아서던 한여름 열기 같은 거부감은 하지만 그들은 사랑하잖아 라는 한줄기 소나기 같은 마음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소설이란 때로 작가와 독자의 상처를 동시에 치료해나간다고 했다. 켜켜이 억누르고 있던 홍의 사랑을 함께하는 동안 나 역시 사랑이 남긴 것들을 그녀와 함께 주워 모았다. 사랑 후에 버려야 하는 것들이 아니라 사랑 후에 오는 많은 순간을 적어도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음을 믿는다. 아울러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졌음을 축복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음을 믿는다. 저 뜨거운 태양이 곧 따스하게 느껴질 계절이 오고 있음을 믿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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