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680

 

지독히 외로웠을 영혼 - "리진"을 읽고

부산시 남구 대연동 김영주

 

 

 

17년 동안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년 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은 모든 것이 새삼스럽고, 낯설기도 하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려서 먹던 먹거리들을 찾아다니며 기억 속의 맛을 돌이키고 바로 이 맛이야 하며 감탄하기도 하고, 이제는 흔적 없는 내 발자국들이 닿았던 추억 속의 장소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젊은 시절 제 집처럼 드나들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서점엘 가니, 정말 한국에 돌아왔구나 하는 실감이 느껴졌다. 

 

책방 책꽂이에 빼곡한 모국어로 된 책들을 마음대로 펼쳐보고 느긋한 기분으로 책을 고르는 일이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일 중에 하나였음을 깨달았다. 이민 갈 준비를 하던 당시를 돌이켜 보건 데 이민이 결정되고, 이곳의 생활을 정리해야 했을 때 나는 꼼꼼하게 책을 챙겼다. 어린 시절 읽던 명작동화, 그림책 한 권도 빼먹지 않았다. 중학시절 한 권 한 권 사 모았던 삼중당 문고들도 소중히 챙겨 넣었다. 책들이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고, 가져 가고 싶은 모든 것 이었다. 

 

그 외에도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서점을 드나들며 미친 듯이 책을 샀었다. 그 당시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으로 마음이 벅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 배워야 할 이국의 언어에 대한 부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나라말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아마도 무척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런 심정을 이 나라를 떠나며 가장 아쉬운 점이 서점을 통째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친구에게 토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친구 또한 넌 책방이 그리워서라도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로 내 말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맞아 떨어져 나는 지금 이렇게 서점의 북 카페에 앉아 있다. 이민을 떠나고 나서 수 년 동안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 갈 때 마다 몇 십 킬로씩 되는 책을 극성스럽게 싸 들고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후 세상은 놀랄 만치 좋아져서, 외국에 살면서도 인터넷으로 고국의 신간서적을 검색하고 수 없이 많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가 있었고l 지구 반대편에서도 꾸준한 글 읽기는 계속되었다.

 

신경숙씨는 작품이 발표 될 때마다 한 권도 놓치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내가 작품을 읽어 온 몇몇 국내작가들 중에 한 분이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무렵에 ”리진”이 뜨거운 관심 속에 출간되었길래 주저 없이 선택하여 읽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역사소설로 생각지 않는다고 밝혔듯이 소설 ”리진”은 내게도 역사소설이 아니다. 내게 있어서 리진은 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I 내가 외국에 살면서 경험한 일을 백 여 년 전에 미리 겪은 또 한 명의 한국인 여성이다. 나는 그녀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기 이전에 지독하게 외로운 삶을 살다 간 한국인으로 생각한다. 

 

그녀의 특수한 출생배경, 아름다움, 총명함 그리고 그녀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은 그녀를 남달리 열렬하고 도전적인 삶을 살다 가도록 만들었다. 리진은 어쩌면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환상 속의 삶을 실제로 살다 간 여성일 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을 지녀 궁녀가 되었고, 총명함을 지녀 배움에 모자람이 없었고 현명하고 사려 깊은 눈길로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졌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일생 동안 사랑을 받았다. 키워 준 어머니 서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일평생 변함없었던 강연의 사랑을 받았고, 명성황후로부터 영혼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프랑스 외교관 콜랭의 진실한 사랑을 받았다. 

 

그 모든 사랑이 그녀의 기구하고 파란 많은 삶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콜랭의 사랑을 받아들임은 명성황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리진은 명성황후가 살기 원했으나 불가능했던 삶을 대신 살아준 영혼의 쌍둥이가 아니었을까? 백 여 년 전에 한국에 태어난 여성이기이전에 그녀는 삶이 펼쳐 보이는 대하드라마를 열렬하고도 충만하게 살아보기 원한 도전의 인간이 아니었을까? 2권에서의 리진의 본격적인 파리생활이 내게는 타인의 경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그녀의 삶이 나의 이민 생활과 오버랩 되었다. 리진의 외로움이 내 것처럼 생생하다. 일상은 끊임없이 내 나라를 떠오르게 하고 그리워하게 하고, 내 존재의 뿌리와 연관짓게 했다. 내게 이국에서의 생활은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개인적인 도전이었고, 이제 나는 한결 높고 넓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젊었던 나는 더 많이 알기 원했다. 더 멀리 가보기 원했다. 더 많이 경험하고 싶었다. 더 열정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를 나이게 하는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겸손히 받아들이게 되기를 원했다. 

 

그 인생의 길 위에서 많은 것을 잃고 또한 얻었다. 길을 걷는 중에 책은 늘 곁에 있어 주었던 영혼의 길벗이었다. 한글을 깨치고 시작된 내 오랜 글  읽기는 내 생활 중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즐거운 습관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글 읽기 안에서 보냈는지. 내게 있어서 글 읽기의 정의는 활자화된 타인의 생각과 경험이 담긴 창작물을 공유하는 즐거움이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반추, 내적인 변화와 생활 속의 적용은 글 읽기가 주는 덤이다. 삶에 대한 균형 잡힌 가치관이 획득되지 못한 글 읽기는 글 읽기의 소용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제 내 존재의 뿌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내 존재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천착하는 익숙한 습관인 즐거운 글 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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