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689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남한산성"을 읽고

부산 남구 대연3동 부산고 안광은

 

  

 

45일간 청에 투항을 하고 칸의 발에 절을 한 인조의 선택이 과연 옳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실리와 명분 사이의 대립은 심각한 문제이다. 민족 최대의 위기.

 

병자호란의 핵심 문제도 사실은 바로 실리와 명분 사이의 갈등이었다. 명분은 일을 함에 있어서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라고 한다. 반면에 실리는 명분과 같이 관념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을 말한다.

 

병자년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인조는 강화도로 거처를 옮긴다. 왕의 도리를 버리고 좁은 섬에 왕권마저 가두어 버린 이곳, 강화도에서 1만 3천여 명의 병사들만으로 막강한 청의 12만 군대에 에 맞선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국가의 체면 때문에 실패가 예정된 투쟁을 계속하는 ‘명분론’을 선택했다. 당시 주전론자들은 한낱 비틀어진 나무에 불과하던 여진이 청이라는 배로 바뀌어 g형제관계를 폐기하고 군신관계를 요구했을 때, 이러한 굴욕적인 요구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명분론의 정체다. 그러나 이러한 인조의 명분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45일간의 투쟁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여기서 인조는 국가라는 집단의 ‘백성 개개인의 모임’이라는 명제를 간과하는 모습을 본다. 그 이유는 한옥의 주춧돌 없이 대들보를 얹을 수 없듯이 백성들 없이는 왕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조가 걱정해야할 것은 유교적 신의보다는 백성들의 실질적인 행복이다. 이것이 실리론이다.

 

우리의 건국이념이 무엇인가? 서양의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홍익인간 정신이다. 모두가 행복해지자는 건국이념은 지금의 개인주의의 비정함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우리 고유의 사상이다. 그러나 청이 군신관계를 요구할 때, 청의 칸이 항복을 요구할 때 인조가 생각한 것은 모든 백성의 행복이 아니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할 임금이 걱정한 것은 백성의 안위가 아닌 조정의 존립이었다.

 

우리 역사에는 명분보다 실리를 존중하는 의미 있는 사례들이 많다. 172년 선대왕 때 한나라 대군이 국경을 넘어 왔었다. 그때 고구려의 조정에선 저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즉각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명분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때 국상이었던 명림답부는 실리론을 주장하여 맞대응했다. 그 주장은 청야작전(적의 식량보급을 차단하고 장기 농성전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한나라 대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선례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대의명분을 최고로 우선시 하는 성리학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들의 명분론은 백성들에게 충(忠)이라는 짐을 씌우고 이들의 목숨을 청의 발아래 짓밟히게 했다.

 

조정만을 생각하는 비정한 명분론에 대항한 움직임은 여기저기서 들끓었다. 개혁의 바람은 일반 병사들의 소규모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난과 학대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명분을 선택한 인조의 결정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백성들의 괴로운 마음을 느꼈던 홍익인간 정신의 단군이 현세에 개입한 것이 아닐까.

 

이를 무시하던 인조는 결국 45일간의 투쟁을 끝내기 위해 칸의 발밑에 머리로 9개의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인조는 역사 이래 최대의 모욕을 얻음과 동시에 죽어간 백성들의 원망도 함께 얻었다. 이러한 결과는 청이 군신관계를 요구했을 때부터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명분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조와 같은 갈림길에 놓일 상황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명예를 위해 ‘명분론’만을 주장할 것인가, 실제로 영향력이 있는 ‘실질론’을 택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인조가 그랬듯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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