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내 마음의 색을 찾으며 -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를 읽고
부산시 동래구 온천2동 서혜경
'사랑을 쓰려 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어렸을 때 의미도 모르고 외웠던 유행가 가사이다. 가수는 이 노래를 경쾌한 리듬과 밝은 표정으로 불렀지만, 어른이 된 지금 이 노래가 생각나는 때는 힘들고 외로울 때이다. 원래 가사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래, 인간의 사랑, 믿을 게 못 되지 하면서 위안을 받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무엇이든 누구이든 믿지 못하는 시대인 것 같다. 심지어 부모도, 자식도, 배우자도.......
도오루도 자신에게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할 가정에서 불신의 그림자를 보고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겉으로는 화목한 가정인척 하지만 서로 간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 가정 이외에서는 사랑을 배울 곳이 없었던 도오루의 이런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선택이다.
탈출구로 택하고자 했던 사이버 세계는 이런 태도를 더욱 굳히게 만들 뿐 이었다. 나도 어릴 때는 선이 당연히 악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선을 추구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도덕률을 비판도 나름대로의 성찰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리고 선생님과 부모님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가면 안 되는 거라고,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암시를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체,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듣고 보는 것이 많아지고, 선이 악에게 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입 밖에 내어 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마음속에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꺼내어 서는 안 되는 그런 말들을 도오루는 히카루를 통해 들리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소리쳐 악담을 해도, 규칙을 어겨도 비판. 받지 않는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쁜 아이’라는 심판을 스스로에게 내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에 양심의 질책도 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히카루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을 인식하기에는 밖에서 보이는 것이, 들리는 것이 너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한 번쯤 주시해보는 기회가 생기면 이런 목소리에 당황하게 된다. 해서는 안 될 생각과 의지, 곧 악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그러한 목소리에 때로는 당황하고 심지어 나의 ‘선한’ 아니, ‘선해야 하는’ 상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나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뭔가 개운하지 않다. 겉으로는 규범과 평화라는 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그 내부에는 어둠이 존재하는,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어둠 때문에 어쩐지 마음이 안 놓이는 그런 현실........
도오루가 말하는 ‘회색’은 이런 사회 환경을 잘 말해주는 단어인 것 같다. 희다고도 그렇다고 검다고도 말할 수 없는, 다른 색들과 섞여 있으면 잘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색. 무엇이라고 명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운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직접 나서서 상황을 개선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사회. 도오루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회색에 어느 정도 감염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감염되는 순간 더 이상 인간으로, 자신의 이성과 감성으로 살아있지 못하고 영혼을 뺏겨 버리는 치명적인 색. 도오루가 히카루와 함께 불행의 모든 원인으로 돌렸던 회색. 처음엔 부정 했지만 결국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색.
나 역시도 누군가로부터 회색의 보유자임을 지적 받는다면 나는 그런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정하고 말 것이다. 회색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모습, 드러내기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에 책임이 없다고, 이 사회가 바라는 대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발뺌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하기만 해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회색을 밖으로 드러내어 인식하지 않는다면 더욱 심각한 불안과 우울과 희망 없는 나날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오루는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극복은 도오루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영웅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아주 작지만, 그러나 지속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는 빵 아이와 시라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성 정체감과 다르게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는 친구 시라토는, 도오루가 히카루로 상징되는 자기 속의 어둠과 투쟁하고 있을 때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격려한다.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로 굳건히 서 있으라고. 시라토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도오루가 자신의 영혼을 찾게 된다.
살아가면서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말들일 것이다. 현실을 왜곡시키는 이 부정적인 생각들은 자신이 가진 생명력을 파괴시키고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받기만 하고자 하는 사랑도 결국에는 사랑을 잃게 만든다. 자신의 발로 서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 하려고만 하면 상대는 지쳐 도망쳐버리게 된다. 더욱 많은 사랑을 시라토에게서 갈구하던 도오루는 마침내 시라토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시라토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도오루는 자신의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시라토를 살리기 위해 나서게 된다. 누구와도 상관없이 살고 싶어 하던 외톨이가 마침내 타인을 위해 자기를 내던지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으로 죽인 시라토를, 도오루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살려낸다. 시라토가 자신에게 주었던 사랑을 다시 떠올리면서........
도오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사랑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아직 살아있는 그 인간다움의 끄나풀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다. 해리성 장애를 겪고 있었지만 도오루의 섬세한 마음은 오히려 친구들에게서 그 가느다란 인간다움의 끄나풀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 회복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줄도 알았다. 그리하여 누군가로부터 받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또한 자신도 무조건적으로 주면서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지금 우리도 주위에 조금씩 조금씩 사랑을 나누어 간다면 그것을 통해 인간다운 색을 회복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느 날인가 아이들에게 그림동화를 읽어주다가 한 순간 멍해진 일이 있었다. 어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총 천연색의 그림이, 어릴 적 꿈에서 본 듯한 화려하고 깨끗한 그림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야 비로소 내 마음도 이런 생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그 사실이 안타까워 계속 바라보았던 그 그림의 색들. 오늘 도오루는 그 마음의 색을 다시 찾아보기를 나에게 격려하고 있다.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더욱 깨끗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아주 조금씩 옆 사람에게 다가서기를.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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