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나는 당신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으니까
저 위에 있는 사람들도 벌써 다 좀비야
우리 옆에 있으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환상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 우리네 거친 삶의 이야기
온우주 출판사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만 엄선해서 묶은 온우주 단편선의 다섯 번째 작품집으로 이서영의 『악어의 맛』이 출간되었다. 한국 장르문학만을 출간하는 온우주 출판사에서는 이후 2013 온우주 단편선으로 김현중 김인정 전혜진 박애진의 작품집을 준비 중이며 2013년 한 해 동안 총 7명의 작가가 쓴 작품집 10권을 펴낼 예정이다.
이서영의 작품집 『악어의 맛』은 작가의 독특한 이력이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집이다.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답게 사회의 낮은 곳 어두운 곳 소수이고 핍박받고 외면받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 흔히 생각하기 쉬운 비참하고 어두운 이야기로 몰아가지 않고 시종일관 따뜻하고 공감이 충만하며 때로는 유쾌하고 발랄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이 이서영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오랜 훈련을 통해 탄탄하게 다진 기본기를 바탕으로 장르적 소재와 서사를 현실과 결합한 이서영의 작품들은 어떤 날카로운 비판이나 논설로도 전달할 수 없는 메시지를 부드럽고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아주 좋은 것’에게 ‘환상적’이라는 수사를 가져다 붙이곤 한다. 그러나 사실 모든 허구는 현재의 은유다. 환상성이 극대화될수록 현재가 자명해진다는 것을 수많은 환상들이 내게 알려줘왔다. - 작가의 말 中
이서영의 작품은 유쾌하기 이전에 뼈아프다. 사회의 폐부가 쉽게 변혁되기 힘들다는 현실분석을 전제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속의 인물들은 회의주의에 허우적대지 않으며 희망의 노래를 부르려 노력한다. 아도르노가 말했듯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나는 비판적 통찰력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겸비한 작가의 태도에 해방의 씨앗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작품집은 은은한 미소를 띠게 만들다가도 불현듯 가슴을 적적하게 울리는 꽤 넓은 편폭의 울림을 지닌 이야기들의 성좌이다. - 철이 권말해설 中
수록작에 대하여
밥줄을 지켜라
나는 홍대 근처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다. 강제로 중성화 수술을 받은 이후 고양이로서의 감과 후각 등을 잃은 대신 인간이 생각하는 게 들리기 시작했다. 길고양이 중에는 이 단계를 지나 아예 사람의 형태를 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들이 있다. 나는 그중 한 괴물과 계속 만난다. 괴물은 나의 딸이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괴물이 된 딸 나를 챙겨주지만 도시관리 차원에서 길로 밀려나는 포장마차 주인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배고파.”
그 말에 반응한 게 사람이라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가만 보니 그게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인간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이랍시고 생각이 읽혔다.
많이 굶었나보다.
“너 몸을 버렸어?”
괴물은 쓸쓸하게 웃으면서 내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 고양이는 고양이였던 날 경멸하겠지.
“왜 그랬는지 알려준다면 경멸하지 않을게. 왜 그랬어?” - 14쪽
종의 기원
애인이 좀비가 되었다. 사회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 좀비들을 등록해서 급료도 식량도 주지 않고 부려먹는다. 애인을 비롯한 여러 좀비들이 식량을 받지 못하고 죽지도 못하고 계속 일해야 하는 상황에 반발하다가 맞거나 사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좀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나는 좀비인 애인과 관계를 가지고 임신한다.
한참을 망설이던 승연은 집 앞 파출소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조금도 변한 게 없는 듯한 그가 나타났다.
얼굴색이 좀 거무죽죽하고
냄새가 지독하고
목덜미 근처에 핏덩이가 뭉쳐 있는 것만 제외하면.
“그 피는 안 없어지는 거야?”
“우어.”
아마 ‘어’라는 뜻이겠지. 그는 묵묵히 눈앞에 있는 커피 잔을 내려다봤다. 마시지 않느냐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제 그가 먹고 싶은 건 나나 저 점원 같은 사람일 것이다. - 45~46쪽
악어의 맛
초콜릿 만드는 것밖에 모르는 곱사등이 자매의 집에 작은 악어가 나타난다. 악어는 맛있는 것을 먹고 나면 환희로 찬란한 색깔을 낸다. 그것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매는 계속 악어에게 좋은 것을 주지만 악어는 점점 만족하지 못하고 가출하여 수컷 악어와 마주친다.
악어가 돌아와서 배를 깔고 앉아 있는 걸 보고 첫째와 둘째는 반갑게 악어를 끌어안았다. 악어의 몸집은 나가기 전과 비교해서 세 배가 넘게 불어 있었지만 여자들은 악어의 눈만 봐도 악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악어는 웃을 줄 몰랐지만 여자들을 반가워했다. 악어의 몸이 하얗게 몇 번 불을 켰다. 첫째와 둘째를 단단하게 이었던 감각이 불빛에 조금 흐려졌다. - 88쪽
히스테리아 선언
어떤 압력에서도 몸을 보존할 수 있는 인간이 나타난다. 엄마 쪽에서 특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그 엄마가 낳은 자식이 이렇게 압력에 무탈한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 유전자를 가진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구세주를 낳을 여인으로 보호받다가 가임적정 연령이 되면 특정한 장소에 들어와 아기를 낳을 것만 생각하게 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어렸을 때에 그런 보호를 받지 못했고 구세주를 낳는다는 것에도 그다지 감흥이 없으며 다만 자유를 억압하는 이 수용소를 견디지 못한다.
“소년과 미스터 언빌리버블 사이에 공통적인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발견되었습니다. 모든 압력을 막아내는 이 유전자에 방패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미스터 언빌리버블처럼 압력을 견딜 수 있지는 않을 거예요.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어머니도 찰스 도지슨의 어머니도 그랬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여러분에게 엄청난 힘이 있다는 걸 발견해냈죠. 여러분이 모두 알다시피 여러분은 미세한 유전적 변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유전적 변이가 바로 인류의 커다란 자산입니다.”
센의 옆자리에서 진영이 관리사를 향해 환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영은 대표적인 방패 유전자 세대였다. 국가 보조금을 받으며 자랐고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인류의 커다란 자산’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진영은 체육 시간에 제대로 뛰어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공무원 두세 명이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붙어 있었다. 진영은 단지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아왔다. 진영은 어릴 적에 동화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마녀를 물리치는 것과 마녀를 물리칠 아이를 낳는 것은 엇비슷한 일이었다. 영웅을 낳고 나서 영웅의 어머니는 역사에 기여한 대가를 충분히 받을 것이었다. 역사적 사명을 마친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만 할 충분한 보수. 건강한 영웅을 낳은 생산원들은 그 대가로 풍족한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편안히 보내는 게 순리였다. - 110~111쪽
로보를 위하여
아빠는 늑대인간이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여자애인 나도 가끔씩 털이 북실북실해지고 꼬리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등 늑대로 조금씩 변할 때가 있다. 사랑을 하면 완전히 늑대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데 요새 치킨을 배달해주는 공고 남자애를 생각만 하면 자꾸 늑대로 변신하려고 해서 큰일이다. 어릴 때부터 시튼동물기의 로보와 블랑카 이야기를 좋아하면서 가끔은 블랑카도 로보를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애가 로보 같다는 생각을 한다.
벨이 울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살짝 열었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썼다고 해도 털투성이 얼굴을 남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달 소년은 거침없이 바깥쪽에서 문을 잡아당겼다. 나는 당황해서 문을 도로 당기려고 했지만 문은 활짝 열렸다.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 양념치킨 한 마리 왔습니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닭이 눈앞에 두 마리나 나타났다. 닭을 잡으려는데 닭 뒤로 어렴풋이 무언가 빛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빛은 닭을 들고 있는 손 팔 어깨 목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배달 온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 139쪽
사형집행일
과거로 도망갈 수 있는 남자가 반역죄인으로 잡혀온다. 어떤 상황에서도 과거로 도망가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그 남자를 위해 그 남자와 과거에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며 그 뒤를 쫓아갈 수 있는 내가 사형집행관으로 불려왔다. 나는 남자의 과거를 쫓아가며 이렇게 죽이기 위해서 뒤를 쫓는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를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그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차근차근히 그의 죄목들이 읊어졌다. 그는 우리 군대의 매복 위치 병참선을 알아냈고 주요 설비들과 생산물들을 집중 포격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했다. 바로 전날쯤으로 돌아가서 상황이 터지기 직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그는 현재로 돌아오곤 했다. 여러 번 돌아오는 지점을 엇갈려서 생포되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또 어디선가 유쾌하게 웃으며 생포되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의 첫 사형이 집행된 것은 2016년 6월이었다. 지금은 2017년. 우리는 1년 동안 열여섯 번의 사형집행을 했지만 한 번도 그를 사형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가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보고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 지난 연애 이야기를 현재의 연인에게 도란도란 얘기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상관에게 그 이야기를 한 다음 날 나는 모든
임무에서 철수되었다. 남자가 생포될 때까지 나는 하루 종일 시간을 건너뛰는 법을 가르쳤다.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 사람이 그와 나 둘뿐이다. - 174쪽
성문 너머 코끼리
과학기술을 왕족이 독점한 세계에 우주선을 타고 낯선 외계인이 내려온다. 그는 코끼리를 데려왔고 우주선 때문에 구세주라고 사람들에게 불렸지만 결국은 누명을 쓰고 사형 직전 겨우 우주로 다시 돌아갔다. 기계 울렁증이 있는 여자아이인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코끼리를 돌보며 그가 남기고 간 녹음장치에 그에게 쓰는 편지를 녹음한다.
단순한 노동은 쓸데없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요. 풀을 베고 풀을 먹이고. 시간은 오래도록 지나가지 않고 나는 자꾸 당신에게 할 말들을 떠올리죠. 당신이 화형당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었나요? 사실 난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지만 여왕의 아들은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곤 했지요. 미안해요 얘기해주지 않아서.
당신을 두고 아주 많은 싸움이 있었어요. 옆 나라에서 온 사신은 수백의 근위대가 줄지어 서 있는 여왕님의 홀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고 하더군요. 쿨리크 할머니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당신은 틀림없이 이 세계를 뒤엎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계속 처리를 못할 거라면 옆 나라로 넘기라고 호통을 쳤다고 하더군요. - 215쪽
너의 낡은 캐주얼화
40대가 되도록 ‘운동’하느라 변변한 수입이 없는 장여사의 아들은 편하다며 줄창 랜드로바만 신고 다닌다. 장여사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신발이 정말 눈꼴이 시어 봐줄 수가 없다.
“엄마 세상이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가자 코트 사줄게.”
“난 코트를 살 수 있지만 서울역 계단에선 누군가 또 코트도 없이 얼어 죽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코트 안 입을 거야?”
아들은 갑자기 말을 뚝 멈추더니 장여사를 내려다봤다.
“누구는 집에서 코트가 놀고 있잖아. 누구는 한 벌도 없고.”
장여사는 아들이 감옥에서 미친 것만 같았다. - 249쪽
노병들
한국사에는 숨은 슈퍼히어로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나 산업화의 와중에 험한 현장에는 어디나 현재의 국정원에 소속된 비밀히어로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에게 맞서는 노동자 측의 히어로도 있었다. 이제는 다들 늙어서 파고다 공원에서 떡하니 마주치는 사이가 된다.
나이 든 시아버지를 봉양해야 하는 딸아이 걱정에 얼굴이 어두운 사돈을 앞에 두고 나는 연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혼자서도 괜찮다고 되레 큰소리를 떵떵 쳤었다. 연금은 자주 연체되었다. 벌써 반년 가까이 연체되고 있는 연금을 달라고 전화를 걸면 지금처럼 이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여자가 몇십 분 가까이 걸리는 통화 끝에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말해준 뒤 전화를 끊기 일쑤였다.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퇴직 공무원이었다. 어디에도 내 근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청와대에 글을 쓸 수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전화기 너머의 직원에게 내가 조국을 위해 바람을 불러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260~261쪽
녀석의 상황 판단 자체는 아직 녹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충격이었다. 직선으로 바람을 보냈는데도 그 엿가락이 팔을 직격으로 맞았다.
85년 여름 구로에서 맞붙었던 때 엿가락만을 노리고 그의 온몸을 칭칭 휘감는 바람을 보냈던 기억이 났다. 악을 쓰는 미싱사 소녀들 사이에 주저앉아 녀석은 멀찍이 서 있는 이쪽 청년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미싱사 소녀들은 녀석을 의식하고 있었다. 녀석이 바람에 휘말려 온몸이 뜯겨 나가면 분명 전열이 흐트러질 것이었다. 바람이 밧줄처럼 몸을 휘감으려고 한다는 걸 느끼자 엿가락은 몸 전체를 엿가락처럼 녹여서 납작하게 만들더니 칼바람의 오라를 빠져나갔다. 엿가락의 흐물흐물한 몸을 보면서 우리의 싸움을 주의 깊게 지켜본 누군가가 있다면 내게도 엿가락에게도 박수를 보내줬을 것으로 생각했다. - 280쪽
대열 가운데에서 낯익은 얼굴이 우비의 모자를 제쳤다. 회오리바람은 분명한 표적을 찾았다. 엿가락은 눈을 감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여기서 창을 뽑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서도 모르는 척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래야 내 맞수지. 자 이제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겠지. 나는 손을 위로 쭉 내뻗어서 앞으로 슬쩍 당겼다. 바람은 기분 좋게 으르렁거렸다. 만들어놓은 거친 물보라는 노조원들의 위로 날아들어서 엿가락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저대로 서
있었다간 뾰족한 칼바람이 엿가락의 몸을 통과할 것이나 엿가락은 저렇게 딴청을 부리다가도 피해야 할 순간에 제대로 몸을 피할 녀석이었다. 바람의 창이 내리꽂혔다. 이제 슬슬 몸을 움직여야 할 순간이지만 엿가락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 설마……. - 318쪽
▣ 작가 소개
저자 : 이서영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 1987년에 태어났고 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정석적인 문청文靑 테크트리를 밟는 주제에 등단은 안 하고 스티븐 킹·로버트 하인라인·어슐러 르 귄·로저 젤라즈니의 서가 앞에서 몸살을 앓았다. 학부 때는 내내 데모를 했다. 마트를 점거한다든지 웅크리고 앉아 단식을 한다든지 경찰에 쫓겨서 졸업사진 찍던 복장으로 아스팔트를 질주한다든지 학교 청소노동자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나날들이었다.
2011년부터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단편 「종의 기원」과 「성문 너머 코끼리」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작업이기에 세상사의 진행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불신으로 글을 쓰고 있다.
▣ 주요 목차
밥줄을 지켜라
종의 기원
악어의 맛
히스테리아 선언
로보를 위하여
사형집행일
성문 너머 코끼리
너의 낡은 캐주얼화
노병들
해설_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엮은이의 말
작가의 말
나는 당신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으니까
저 위에 있는 사람들도 벌써 다 좀비야
우리 옆에 있으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환상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 우리네 거친 삶의 이야기
온우주 출판사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만 엄선해서 묶은 온우주 단편선의 다섯 번째 작품집으로 이서영의 『악어의 맛』이 출간되었다. 한국 장르문학만을 출간하는 온우주 출판사에서는 이후 2013 온우주 단편선으로 김현중 김인정 전혜진 박애진의 작품집을 준비 중이며 2013년 한 해 동안 총 7명의 작가가 쓴 작품집 10권을 펴낼 예정이다.
이서영의 작품집 『악어의 맛』은 작가의 독특한 이력이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집이다.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답게 사회의 낮은 곳 어두운 곳 소수이고 핍박받고 외면받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 흔히 생각하기 쉬운 비참하고 어두운 이야기로 몰아가지 않고 시종일관 따뜻하고 공감이 충만하며 때로는 유쾌하고 발랄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이 이서영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오랜 훈련을 통해 탄탄하게 다진 기본기를 바탕으로 장르적 소재와 서사를 현실과 결합한 이서영의 작품들은 어떤 날카로운 비판이나 논설로도 전달할 수 없는 메시지를 부드럽고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아주 좋은 것’에게 ‘환상적’이라는 수사를 가져다 붙이곤 한다. 그러나 사실 모든 허구는 현재의 은유다. 환상성이 극대화될수록 현재가 자명해진다는 것을 수많은 환상들이 내게 알려줘왔다. - 작가의 말 中
이서영의 작품은 유쾌하기 이전에 뼈아프다. 사회의 폐부가 쉽게 변혁되기 힘들다는 현실분석을 전제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속의 인물들은 회의주의에 허우적대지 않으며 희망의 노래를 부르려 노력한다. 아도르노가 말했듯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나는 비판적 통찰력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겸비한 작가의 태도에 해방의 씨앗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작품집은 은은한 미소를 띠게 만들다가도 불현듯 가슴을 적적하게 울리는 꽤 넓은 편폭의 울림을 지닌 이야기들의 성좌이다. - 철이 권말해설 中
수록작에 대하여
밥줄을 지켜라
나는 홍대 근처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다. 강제로 중성화 수술을 받은 이후 고양이로서의 감과 후각 등을 잃은 대신 인간이 생각하는 게 들리기 시작했다. 길고양이 중에는 이 단계를 지나 아예 사람의 형태를 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들이 있다. 나는 그중 한 괴물과 계속 만난다. 괴물은 나의 딸이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괴물이 된 딸 나를 챙겨주지만 도시관리 차원에서 길로 밀려나는 포장마차 주인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배고파.”
그 말에 반응한 게 사람이라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가만 보니 그게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인간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이랍시고 생각이 읽혔다.
많이 굶었나보다.
“너 몸을 버렸어?”
괴물은 쓸쓸하게 웃으면서 내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 고양이는 고양이였던 날 경멸하겠지.
“왜 그랬는지 알려준다면 경멸하지 않을게. 왜 그랬어?” - 14쪽
종의 기원
애인이 좀비가 되었다. 사회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 좀비들을 등록해서 급료도 식량도 주지 않고 부려먹는다. 애인을 비롯한 여러 좀비들이 식량을 받지 못하고 죽지도 못하고 계속 일해야 하는 상황에 반발하다가 맞거나 사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좀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나는 좀비인 애인과 관계를 가지고 임신한다.
한참을 망설이던 승연은 집 앞 파출소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조금도 변한 게 없는 듯한 그가 나타났다.
얼굴색이 좀 거무죽죽하고
냄새가 지독하고
목덜미 근처에 핏덩이가 뭉쳐 있는 것만 제외하면.
“그 피는 안 없어지는 거야?”
“우어.”
아마 ‘어’라는 뜻이겠지. 그는 묵묵히 눈앞에 있는 커피 잔을 내려다봤다. 마시지 않느냐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제 그가 먹고 싶은 건 나나 저 점원 같은 사람일 것이다. - 45~46쪽
악어의 맛
초콜릿 만드는 것밖에 모르는 곱사등이 자매의 집에 작은 악어가 나타난다. 악어는 맛있는 것을 먹고 나면 환희로 찬란한 색깔을 낸다. 그것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매는 계속 악어에게 좋은 것을 주지만 악어는 점점 만족하지 못하고 가출하여 수컷 악어와 마주친다.
악어가 돌아와서 배를 깔고 앉아 있는 걸 보고 첫째와 둘째는 반갑게 악어를 끌어안았다. 악어의 몸집은 나가기 전과 비교해서 세 배가 넘게 불어 있었지만 여자들은 악어의 눈만 봐도 악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악어는 웃을 줄 몰랐지만 여자들을 반가워했다. 악어의 몸이 하얗게 몇 번 불을 켰다. 첫째와 둘째를 단단하게 이었던 감각이 불빛에 조금 흐려졌다. - 88쪽
히스테리아 선언
어떤 압력에서도 몸을 보존할 수 있는 인간이 나타난다. 엄마 쪽에서 특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그 엄마가 낳은 자식이 이렇게 압력에 무탈한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 유전자를 가진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구세주를 낳을 여인으로 보호받다가 가임적정 연령이 되면 특정한 장소에 들어와 아기를 낳을 것만 생각하게 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어렸을 때에 그런 보호를 받지 못했고 구세주를 낳는다는 것에도 그다지 감흥이 없으며 다만 자유를 억압하는 이 수용소를 견디지 못한다.
“소년과 미스터 언빌리버블 사이에 공통적인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발견되었습니다. 모든 압력을 막아내는 이 유전자에 방패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미스터 언빌리버블처럼 압력을 견딜 수 있지는 않을 거예요.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어머니도 찰스 도지슨의 어머니도 그랬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여러분에게 엄청난 힘이 있다는 걸 발견해냈죠. 여러분이 모두 알다시피 여러분은 미세한 유전적 변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유전적 변이가 바로 인류의 커다란 자산입니다.”
센의 옆자리에서 진영이 관리사를 향해 환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영은 대표적인 방패 유전자 세대였다. 국가 보조금을 받으며 자랐고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인류의 커다란 자산’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진영은 체육 시간에 제대로 뛰어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공무원 두세 명이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붙어 있었다. 진영은 단지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아왔다. 진영은 어릴 적에 동화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마녀를 물리치는 것과 마녀를 물리칠 아이를 낳는 것은 엇비슷한 일이었다. 영웅을 낳고 나서 영웅의 어머니는 역사에 기여한 대가를 충분히 받을 것이었다. 역사적 사명을 마친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만 할 충분한 보수. 건강한 영웅을 낳은 생산원들은 그 대가로 풍족한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편안히 보내는 게 순리였다. - 110~111쪽
로보를 위하여
아빠는 늑대인간이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여자애인 나도 가끔씩 털이 북실북실해지고 꼬리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등 늑대로 조금씩 변할 때가 있다. 사랑을 하면 완전히 늑대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데 요새 치킨을 배달해주는 공고 남자애를 생각만 하면 자꾸 늑대로 변신하려고 해서 큰일이다. 어릴 때부터 시튼동물기의 로보와 블랑카 이야기를 좋아하면서 가끔은 블랑카도 로보를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애가 로보 같다는 생각을 한다.
벨이 울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살짝 열었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썼다고 해도 털투성이 얼굴을 남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달 소년은 거침없이 바깥쪽에서 문을 잡아당겼다. 나는 당황해서 문을 도로 당기려고 했지만 문은 활짝 열렸다.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 양념치킨 한 마리 왔습니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닭이 눈앞에 두 마리나 나타났다. 닭을 잡으려는데 닭 뒤로 어렴풋이 무언가 빛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빛은 닭을 들고 있는 손 팔 어깨 목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배달 온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 139쪽
사형집행일
과거로 도망갈 수 있는 남자가 반역죄인으로 잡혀온다. 어떤 상황에서도 과거로 도망가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그 남자를 위해 그 남자와 과거에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며 그 뒤를 쫓아갈 수 있는 내가 사형집행관으로 불려왔다. 나는 남자의 과거를 쫓아가며 이렇게 죽이기 위해서 뒤를 쫓는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를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그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차근차근히 그의 죄목들이 읊어졌다. 그는 우리 군대의 매복 위치 병참선을 알아냈고 주요 설비들과 생산물들을 집중 포격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했다. 바로 전날쯤으로 돌아가서 상황이 터지기 직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그는 현재로 돌아오곤 했다. 여러 번 돌아오는 지점을 엇갈려서 생포되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또 어디선가 유쾌하게 웃으며 생포되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의 첫 사형이 집행된 것은 2016년 6월이었다. 지금은 2017년. 우리는 1년 동안 열여섯 번의 사형집행을 했지만 한 번도 그를 사형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가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보고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 지난 연애 이야기를 현재의 연인에게 도란도란 얘기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상관에게 그 이야기를 한 다음 날 나는 모든
임무에서 철수되었다. 남자가 생포될 때까지 나는 하루 종일 시간을 건너뛰는 법을 가르쳤다.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 사람이 그와 나 둘뿐이다. - 174쪽
성문 너머 코끼리
과학기술을 왕족이 독점한 세계에 우주선을 타고 낯선 외계인이 내려온다. 그는 코끼리를 데려왔고 우주선 때문에 구세주라고 사람들에게 불렸지만 결국은 누명을 쓰고 사형 직전 겨우 우주로 다시 돌아갔다. 기계 울렁증이 있는 여자아이인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코끼리를 돌보며 그가 남기고 간 녹음장치에 그에게 쓰는 편지를 녹음한다.
단순한 노동은 쓸데없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요. 풀을 베고 풀을 먹이고. 시간은 오래도록 지나가지 않고 나는 자꾸 당신에게 할 말들을 떠올리죠. 당신이 화형당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었나요? 사실 난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지만 여왕의 아들은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곤 했지요. 미안해요 얘기해주지 않아서.
당신을 두고 아주 많은 싸움이 있었어요. 옆 나라에서 온 사신은 수백의 근위대가 줄지어 서 있는 여왕님의 홀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고 하더군요. 쿨리크 할머니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당신은 틀림없이 이 세계를 뒤엎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계속 처리를 못할 거라면 옆 나라로 넘기라고 호통을 쳤다고 하더군요. - 215쪽
너의 낡은 캐주얼화
40대가 되도록 ‘운동’하느라 변변한 수입이 없는 장여사의 아들은 편하다며 줄창 랜드로바만 신고 다닌다. 장여사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신발이 정말 눈꼴이 시어 봐줄 수가 없다.
“엄마 세상이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가자 코트 사줄게.”
“난 코트를 살 수 있지만 서울역 계단에선 누군가 또 코트도 없이 얼어 죽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코트 안 입을 거야?”
아들은 갑자기 말을 뚝 멈추더니 장여사를 내려다봤다.
“누구는 집에서 코트가 놀고 있잖아. 누구는 한 벌도 없고.”
장여사는 아들이 감옥에서 미친 것만 같았다. - 249쪽
노병들
한국사에는 숨은 슈퍼히어로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나 산업화의 와중에 험한 현장에는 어디나 현재의 국정원에 소속된 비밀히어로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에게 맞서는 노동자 측의 히어로도 있었다. 이제는 다들 늙어서 파고다 공원에서 떡하니 마주치는 사이가 된다.
나이 든 시아버지를 봉양해야 하는 딸아이 걱정에 얼굴이 어두운 사돈을 앞에 두고 나는 연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혼자서도 괜찮다고 되레 큰소리를 떵떵 쳤었다. 연금은 자주 연체되었다. 벌써 반년 가까이 연체되고 있는 연금을 달라고 전화를 걸면 지금처럼 이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여자가 몇십 분 가까이 걸리는 통화 끝에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말해준 뒤 전화를 끊기 일쑤였다.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퇴직 공무원이었다. 어디에도 내 근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청와대에 글을 쓸 수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전화기 너머의 직원에게 내가 조국을 위해 바람을 불러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260~261쪽
녀석의 상황 판단 자체는 아직 녹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충격이었다. 직선으로 바람을 보냈는데도 그 엿가락이 팔을 직격으로 맞았다.
85년 여름 구로에서 맞붙었던 때 엿가락만을 노리고 그의 온몸을 칭칭 휘감는 바람을 보냈던 기억이 났다. 악을 쓰는 미싱사 소녀들 사이에 주저앉아 녀석은 멀찍이 서 있는 이쪽 청년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미싱사 소녀들은 녀석을 의식하고 있었다. 녀석이 바람에 휘말려 온몸이 뜯겨 나가면 분명 전열이 흐트러질 것이었다. 바람이 밧줄처럼 몸을 휘감으려고 한다는 걸 느끼자 엿가락은 몸 전체를 엿가락처럼 녹여서 납작하게 만들더니 칼바람의 오라를 빠져나갔다. 엿가락의 흐물흐물한 몸을 보면서 우리의 싸움을 주의 깊게 지켜본 누군가가 있다면 내게도 엿가락에게도 박수를 보내줬을 것으로 생각했다. - 280쪽
대열 가운데에서 낯익은 얼굴이 우비의 모자를 제쳤다. 회오리바람은 분명한 표적을 찾았다. 엿가락은 눈을 감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여기서 창을 뽑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서도 모르는 척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래야 내 맞수지. 자 이제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겠지. 나는 손을 위로 쭉 내뻗어서 앞으로 슬쩍 당겼다. 바람은 기분 좋게 으르렁거렸다. 만들어놓은 거친 물보라는 노조원들의 위로 날아들어서 엿가락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저대로 서
있었다간 뾰족한 칼바람이 엿가락의 몸을 통과할 것이나 엿가락은 저렇게 딴청을 부리다가도 피해야 할 순간에 제대로 몸을 피할 녀석이었다. 바람의 창이 내리꽂혔다. 이제 슬슬 몸을 움직여야 할 순간이지만 엿가락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 설마……. - 318쪽
▣ 작가 소개
저자 : 이서영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 1987년에 태어났고 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정석적인 문청文靑 테크트리를 밟는 주제에 등단은 안 하고 스티븐 킹·로버트 하인라인·어슐러 르 귄·로저 젤라즈니의 서가 앞에서 몸살을 앓았다. 학부 때는 내내 데모를 했다. 마트를 점거한다든지 웅크리고 앉아 단식을 한다든지 경찰에 쫓겨서 졸업사진 찍던 복장으로 아스팔트를 질주한다든지 학교 청소노동자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나날들이었다.
2011년부터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단편 「종의 기원」과 「성문 너머 코끼리」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작업이기에 세상사의 진행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불신으로 글을 쓰고 있다.
▣ 주요 목차
밥줄을 지켜라
종의 기원
악어의 맛
히스테리아 선언
로보를 위하여
사형집행일
성문 너머 코끼리
너의 낡은 캐주얼화
노병들
해설_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엮은이의 말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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