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창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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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도경
출판사항온우주, 발행일:2013/06/29
형태사항p.447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98711030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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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그것은 욕정과 수치심으로 얼룩진
더러운 중독이었다.

사랑 욕망 집착 미련 고독 상실…… 인연이 품은 모든 색깔
색色이 충만한 작가 정도경의 첫 작품집

온우주 출판사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만 엄선해서 묶은 온우주 단편선의 세 번째 작품집으로 정도경의 『왕의 창녀』가 출간되었다. 지난 달에 출간된 곽재식 작품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와 『모살기』 이후 온우주 단편선의 두 번째 작가로서 정도경의 작품이 출간되었으며 온우주 단편선은 앞으로도 국내 작가들의 단편만을 모은 작품집을 매달 한 권 이상 낼 예정이다. 출간 예정인 작가로는 이미 출간된 곽재식 정도경 외에 이서영 김현중 전혜진 박애진이 있으며 2013년 한 해 동안 총 7명의 작가가 쓴 작품집 10권을 펴낼 예정이다.

정도경은 작품집 두 권을 한꺼번에 선보인다. 그중 『왕의 창녀』는 죽었으나 생을 잊지 못하고 돌아오는 사람들 또는 죽은 사람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쌉싸름하고 끈적끈적한 남녀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인간사와 사람 사이 인연에 관한 절절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분명 어둡고 폭력적이고 세상의 상식과는 맞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생명력과 자유의지를 향한 강렬한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정도경만의 아우라라 하겠다.

내게는 이야기를 전해줄 핏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써야만 했다. [중략] 그러나 이야기가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모두 그러하듯이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공정하다. 헛되고 헛되지 않고는 결국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닌 전해 받는 사람이 결정할 몫이기 때문이다. -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中

삶은 이야기들 속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은 이야기의 부재이다. 삶은 이야기들이 서로 갈라져 나간 순간의 상흔으로 이야기라는 무한한 시간성에 대치되는 영원한 부재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죽음으로서의 삶은 모든 이야기들의 과거이며 때문에 모든 이야기들의 정해진 운명이다. - 김지원 권말해설 中

수록작에 대하여

왕의 창녀
왕은 누구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왕은 그 능력을 이용해 온갖 포악한 짓을 다 한다. 왕의 자문을 하며 그에게 애증을 품은 나는 외국에서 공부할 때 만났던 친구에게 왕을 죽여달라고 의뢰한다.
중독 같은 사랑과 치명적인 배신의 이야기.

왕은 독재자였다.
그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왕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재산도 명예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나 자존심도?아낌없이 바쳤다. 왕은 이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그 왕국의 국경 안에 거하는 자 누구에게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왕의 명령 한 마디에 재산과 신분과 가족과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겼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왕의 지하 감옥은 언제나 죄 없이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독한 고문 속에 천천히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감옥 창문 밖으로 왕이 지나가는 발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며 기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9쪽

어두운 입맞춤
평소 포악하기로 이름난 부잣집 아들이 죽고 살인현장에서 자백한 아내가 잡혀온다. 그러나 피해자의 아내는 서류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피해자의 시신은 여자의 힘으로는 낼 수 없는 흔적이 남아 있다. 다른 용의자를 찾은 것이 피해자의 운전기사로 일하는 남자이다.
옛 작가의 단편을 반대로 뒤튼 폭력과 굴종에 관한 이야기.

아내가 살인을 자백했을 때 경찰은 가정 폭력일 것이라 추측했으며 그래서 모두들 취조실에 무표정하게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호리호리하고 연약해 보이는 젊은 여성을 은근히 동정했다.
상황이 복잡해진 것은 여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조회했을 때였다. 그 이름과 그 주민등록번호에는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었다. - 38쪽

휘파람
독재자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무작정 비행정에 타고 떠난 남자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정글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남자를 구해준 사람은 이곳의 의사 역할을 하는 여자이고 이 부족은 말소리 대신 휘파람 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
용기와 굴종 사이의 미묘한 선을 그리는 이야기.

그는 숨지도 도망치지도 일을 그만두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외국으로 이민 갔고 형은 기사 쓰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설득해서 부모님이 계신 나라로 보냈다. 자기 한 몸만이
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밤중에 현관문이 부서졌을 때 그는 두려웠다. 몹시 두려웠다. 자료를 백업해둔 태블릿과 비행정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 최후의 수단을 정말로 이용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비행정을 타고 탈출하면 그 자료를 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놓지도 않았다. 그저 추상적인 의미에서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현관문은 현실적으로 부서졌고 총알도 현실적으로 날아왔다. 생명의 위협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실제로 겪어보기 전에 그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그리고 지금은 하늘을 가로질러 어딘지 모를 땅에 내던져졌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휘파람으로 대화하고 나뭇잎으로 치료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 84쪽

방문
형에게 동생이 찾아온다.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자 형은 동생을 내쫓지만 동생은 자꾸 다시 찾아온다. 동생이 남기고 간 자국 때문에 형은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꺼지란 소리 못 들었냐?”
“형만 힘들었던 거 아냐.”
동생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형만 아버지 미워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혼자만 괴로운 척하지 마.”
그러고 동생은 돌아서서 가려 했다.
그는 동생의 등 뒤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릴 해?”
동생이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네가 뭘 알아? 엉?”
“그럼 형은 뭘 아는데?”
동생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형은 나하고 아버지에 대해서 뭘 아냐고?”
그는 분노와 호기심이 섞인 채 동생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너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 107쪽

사흘
마약중독자인 어머니가 죽었다는 연락이 온다. 여자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러 언덕 꼭대기의 집으로 간다. 발인까지 남은 사흘간 밤마다 관에서 어머니가 일어난다.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물러섰다.
그녀가 물러서는 대로 어머니의 시체는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이불에 걸려 주저앉았다.
어머니의 시체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올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벽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바지를 찾느라 열어젖힌 서랍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싸개를 벗어 던지고는 서랍 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 128~129쪽

아이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남자를 만나 저녁을 보낸다. 호텔 바에서 남자가 꺼낸 이야기는 6년 전에 아내가 어이없는 가벼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자는 설명했다. 비가 추적추적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날씨늦은 밤 그러나 전형적인 교통사고의 요건은 그것이 전부였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과속을 하지도 않았으며 고속도로도 아니었다. 집 앞에 거의 다 와서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운전대를 꺾는 순간 차가 미끄러져 90도 각도로 빙글 회전하여 전봇대를 박고 멈췄다. 전봇대를 ‘박았다’고 하지만 차에서 내려 확인해보니 범퍼가 조금 찌그러지고 전조등 귀퉁이가 깨진 정도였다. “오밤중에 골목길 한가운데 서 있으면 어떡해요!”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원인 제공자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짜증을 내며 다시 차에 타서 기어를 후진으로 바꿔 넣고 고개를 돌려 보니 옆자리의 아내는 미동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정면을 응시한 채 양팔로 단단히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너무나 겁에 질린 표정이라 “왜 그래.” 하고 어깨를 흔들었더니 마치 드라마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내는 앉은 자세 그대로 스르륵 힘없이 미끄러지더라는 이야기였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심장마비였고 현장에서 즉사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제 막 태동을 시작한 배 속의 5개월 된 아기도 함께 죽었다. - 155쪽

Nessun sapra
민족해방전쟁 60주년을 맞아 공영방송에서는 특집거리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편집기사 조수가 전설의 작가 다니일 바실례비치 이바쵸프의 마지막을 아는 사람을 정신병원에서 보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고 온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작가를 비롯한 팀이 인터뷰를 하러 정신병원으로 간다.

한참 만에 편집기사 조수가 말했다.
“저기 숙모님을 불러오는 게…….”
그러나 그때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눈을 떴다. 나를 쳐다보더니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바쵸프 다니일 바실례비치. 전쟁 때 내가 그의 간호사였어요.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 그는 자살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 시체를 먹었어요.”
그 발음은 분명하고 확실했으며 표정은 평온하고 담담했다. 아까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셋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그리고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190쪽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나라 멸망의 위기 앞에서 포기해버린 왕을 위해 장수가 자기 목을 자를 테니 목이 잘린 후에 신이한 일이 있거든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장수가 스스로 자기 목을 자르자 그 목이 말을 하여 왕과 일행은 목숨을 건지고 나라 멸망도 면한다. 이 장수로부터 비롯한 왕가의 연대기와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족 이야기가 겹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잘린 목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고 목이 잘린 후에도 장수의 머리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 이 산의 동쪽으로 내려가면 좁은 골짜기에 동굴이 있습니다. 폐하와 왕자 전하께서는 부디 동굴에 피신하시고 호위병들을 골짜기에 매복시켜 적군이 오는 대로 베게 하소서.
왕은 장수의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동쪽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과연 골짜기는 좁고 깊어 적의 병사가 한 번에 한두 명 이상 접근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적은 수의 호위병이 매복하여 적의 대군을 무찌를 수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장수의 잘린 머리가 한 충언을 따른 덕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왕궁에 복귀한 왕은 장수의 잘린 머리를 금쟁반에 얹고 절하며 탄식하였다.
? 짐의 경솔함으로 인해 명장을 잃었구나! 비록 머리만이라도 그대는 짐의 장수이니 앞으로도 계속 짐을 이끌어주지 않겠는가?
이에 장수의 잘린 머리는 처음으로 눈을 감고 미소를 띠었다. 곧 목에서 피가 강물과도 같이 흘렀고 장수의 머리는 창백하고 뻣뻣하게 시들어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 232쪽

달 아래 칼
칼의 장인이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영주의 학대받은 서녀와 사랑에 빠진다. 다 큰 자식도 있을 만큼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나이 다 들어서 찾아온 사랑에 장인은 그녀가 쓸 칼을 밤낮으로 마음을 다해 만드나 전해줄 도리가 없다.

그토록 원해도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렇게 두 달 동안 어둠 속으로 빠져나갈 길 없는 어둠 속으로 잠겨 가다가 장인은 마침내 결심했던 거지. 어떻게든 여자를 만나서 칼을 건네주리라 그리고 여자에게 그 칼로 자신을 죽여달라 그렇게 말하리라고.
그러나 막상 가늘고 어린 달이 떠 가는 침묵의 밤하늘 아래 그가 그토록 강렬하게 원하는 그 여자가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커녕 그런 마음을 품은 그의 존재조차 아는지 모르는지 어스름한 횃불의 빛 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고요하고 가느다란 모습을 마주 대하자 장인은 자기도 모르게 발이 움직여 여자 앞으로 나아가 자기도 모르게 칼을 뽑아 여자의 목에 겨누고는 자기도 모르게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말을 뱉고 만 거야. - 273쪽
초혼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위장결혼을 했던 남자가 사고로 죽는다. 남자가 동성연애자이며 상대가 누구라는 것까지 아는 그 아내와 남자의 애인만이 세상에 남는다. 남자의 아내가 어느 날 남자의 애인에게 연락을 해온다.

여자는 한참 망설인다. 그리고 찻잔에게 속삭인다.
“그 사람 그날 밤에 저한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
“그날 밤에 무슨 일 있었나요?”
여자는 나를 쳐다보며 여전히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말한다.
“있었으면 말씀해주세요.”
나는 절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어선다.
사고사는 사고사다. 경찰과 병원과 보험회사와 장의사는 여자에게 연락한다. 나는 연인의 죽음을 14개월 전에 그만둔 회사의 동료에게서 전해 듣는다. 그러므로 내가 여자에게 해줄 말은 없다. - 295쪽

타인의 친절
아기를 잃고 무엇이라도 새로이 시작해보기 위해 여자는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프레즐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여자는 사장의 호의와 사람됨에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죽음의 무게는 여전히 여자를 짓누른다.

“처음에 오셨을 때는 굉장히 어두워 보였는데 많이 밝아지셨네요.”
“제가요? 어두워 보였어요?”
그녀는 조금 놀랐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딘가 힘든 것 같았는데 지금은 훨씬 좋아 보여요.”
그리고 남자는 또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온 얼굴로 웃었다.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엄마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고시원의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손이 저릿저릿했다. 일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손목뼈 안쪽에 엄지손가락 정도 크기로 덴 상처가
생겨 있었다. 벌겋게 붓고 쓰라렸다.
화상 자국을 보면서 그녀는 오히려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도 쉬지 말고 그냥 일하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그릇이 너무 무거워서 물이 넘쳤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울었습니다. - 336쪽

내 친구 좀비
유학 다녀왔다가 오랜만에 동창회에 갔던 나는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그간에 있었던 일을 수다 떨다 보니 같이 친했던 다른 친구의 이야기가 나왔다. 유난히 엄마의 입김이 심하고 외출도 엄마 때문에 마음대로 못하는 친구였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그 무엇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사람을 따라 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것도 바로 앞의 친구를 매번 따라하는 모습을 보여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든다.

“이것저것 손댄 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고시 그만두고 나서는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가 그것도 금방 때려치우더니 갑자기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가 한 달도 못 가
서 그만두더니 또 무슨 컴퓨터 아트 학원을 다니다가 너 유학 가고 얼마 안 됐을 때는 갑자기 자기도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독일어 학원도 다녔고 그런데 그것도 아마 오래 못 갔을 거야. 유학
갔다는 소식은 못 들었거든.”
어쨌든 매번 만날 때마다 ‘준비’하는 종목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녀도 슬슬 걱정이 되었다. 뭐든 한 가지를 붙잡고 끝까지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충고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이렇게 눈을 초점 없이 크게 뜨고는 마치 자기는 다른 일에 손댄 적 한 번도 없고 평생 지금 하는 거 한 가지만 붙들고 열심히 해왔는데 너 무슨 소리 하느냐는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는 거 있
지. 친구로서 충고를 해주려고 해도 도대체 말이 통해야 말이지.”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볍게 몸을 떨었다.
“게다가 그 멍한 얼굴이……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소름 끼쳐서.” - 364~365쪽

내일의 어스름
여자는 어렸을 때 부모 때문에 신흥사교집단에서 큰일을 당할 뻔했다. 실제로 ‘볼’ 줄 아는 할머니의 연락으로 사교집단에서 구출받아 할머니와 살게 된 여자는 사교집단에서 나오기 직전부터 같은 꿈을 매년 꾸게 된다. 기와집에 얼굴이 노란 아저씨가 누워 있는 꿈이다.

꿈을 꿀 때마다 매번 기와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걷는 거리가 길어졌다. 처음에는 복도를 걷는 데서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마루에서 그다음에는 섬돌에서 마루로 올라서는 지점부터 시작했다. 그 뒤에는 마당부터 그다음에는 대문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종착지는 언제나 같았다. 긴 복도가 있었고 미닫이문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가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서 문을 열었다. 얼굴빛이 이상한 아저씨가 나를 맞이했다. 여기까지는 같았다. 그의 대사만 매번 조금씩 달라졌다.
?왔구나. 잘 지냈니?
?왔구나. 지금 얼마나 됐지?
?왔구나. 이제 얼마나 남았지?
나는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깨어나곤 했다. 그리고 꿈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 413쪽

▣ 작가 소개

저자 : 정도경
환상문학웹진 거울 59호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가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66호부터 거울 필진으로 합류하여 활동 중이다.
중편 「호狐)」로 제 3회 디지털 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공동단편집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에 「은아의 상자」를 『아빠의 우주여행』에 「스위치 오프」를 『독재자』에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를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에 「사랑 그 어리석은」을 수록하였다. 「사랑 그 어리석은」은 중편 「여행의 끝」과 함께 과학웹진 크로스로드에도 게재되었다. 그 외에 전자책 단편선 『방문』과 장편소설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을 출간했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탐색하려 노력하지만 쓰고 나서 보면 뭐든 전부 치정극으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다. 읽고 나면 마음이 어두워지는 이야기를 주로 쓴다.

▣ 주요 목차

왕의 창녀
어두운 입맞춤
휘파람
방문
사흘
아이를 안고 있었다
Nessun sapra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달 아래 칼
초흔
타인의 친절
내 친구 좀비
내일의 어스름

해설 - 그 밤 이야기들의 틈새가 텅 빈 무덤처럼 입을 벌리고
엮은이의 말
작가의 말

작가 소개

목 차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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