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낙원을 찾는 데 필요한 것은
그냥 감았던 눈을 뜨는 것뿐이었다.”
아름답지만 절제된 문체와 섬세한 감수성 그리고 겸허한 시선을 통해 그려낸
사랑이라는 환상과 착각 그 선득하게 빛나는 정교한 삶의 무늬!
김지원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면만을 겸허한 눈으로 그려내는 작가다. 그녀는 공연히 큰 소리를 내어 무엇을 외치지 않는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끊임없이 속삭여대는 그 작은 소리들은 빗방울이 마침내 바위를 뚫듯 사람의 마음을 지나가준다고 믿는다. 그것이 김지원 문학의 독특한 향기이자 강점이다. 비록 그녀 작품 속의 사람들이 외로워 가슴속에 등불을 밝힌 채 표요히 떠돌고 있다 하더라도 작가인 그녀가 세상을 애정 깊게 바라보기 위해 끊임없이 힘 기울이고 있음을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지원의 작품 전반에는 낭만적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여성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나타나 있다. 김지원의 소설 속 여성들은 현재의 삶에서 심한 결핍감을 느끼고 그 결핍을 메워줄 낭만적 사랑을 갈구하거나 그 대상을 이상화한다. 그러나 그녀를 평등한 인격체로 대우해주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해줄 남성은 실제로는 살인자거나 알코올중독자로서 일반적인 남성의 지위조차 확보하지 못한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등단작「사랑의 기쁨」에서 사랑을 만나리라 꿈꾸는 식모아이는 작은 아버지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피신해 있던 남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착각한다. 「알마덴」의 여주인공은 가부장적인 남편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소외된 삶을 살아가면서 매일 알마덴이란 술을 사러오는 남자와의 사랑을 꿈꾼다. 이렇듯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의 조건 위에 서 있는 그들의 사랑은 결국 어긋날 수밖에 없는 환상이고 착각이라는 것이 김지원이 끊임없이 천착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녀의 소설에서 사랑에 실패한 여성들이 많은 것도 그녀의 소설이 사랑의 환상적 속성을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환상은 사랑으로 가는 통로이자 때로는 현실보다 더 큰 현실이 된다. 그리고 작가에게 있어 이 사랑의 본질은 생의 이유이자 본질과 동의어가 된다.
이념과 당위가 아닌 존재이자 진실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통찰
낭만적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작가!
김지원 작가가 전 작품에 걸쳐 사랑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여성 인물들이 보이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집착이 단순히 소녀적인 공상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제도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나 결혼이라는 환상이 깨진 후 우리는 그 실체를 고스란히 마주하고 짊어져야만 한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여자가 아닌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된다. 그리고 순종을 배우고 사랑과 열정 대신 반복되는 일상을 얻는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족 제도와 규율 속에서 낭만적 사랑을 꿈꿀 수밖에 없는 조건과 그것의 허구성을 이미 알아버린 통찰 사이의 갈등상태가 김지원이 그토록 낭만적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김지원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세상의 폭력 앞에서 허약하기만 하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방어적이고 모호하고 여리고 머뭇거린다. 여성 인물들이 낭만적 사랑에 집착하는 반면 남성 인물들은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오히려 그들은 끊임없이 아내나 그 외 여자들과의 관계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거나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고 역설적으로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남성의 역할에 대한 강박 때문에 불행해한다. 이들을 향한 여성의 희미한 몸짓으로서의 저항은 인간관계에서의 친밀감과 헌신 등이 남성의 세계에서 우월한 가치로 여기는 경쟁과 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때론 고요하지만 누구보다 집요하고 강인하게 주장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듯 김지원은 이러한 여성성을 내세워 여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 앞에 다시금 새롭게 환기시키고 이러한 존재를 포용하지 못하는 세상의 폭력성을 지적한다. 여성들에게 남자는 구원이면서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고 짧게나마 환상을 안겨주지만 긴 폭력을 남기기도 한다. 기존의 페미니즘 소설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김지원의 소설들은 이처럼 허약한 여성성에 갇혀 있는 예민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페미니즘의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비
여자가 공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한 아이는 자기 아이이고 다른 두 아이는 베이비시터를 맡고 있는 아이다. 그리고 공원에는 한 남자와 그의 아이가 있다. 그 남자의 아이는 흙을 먹고 있는데 여자는 그게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남자에게 아이가 흙을 먹는다고 애써 알려주지만 남자의 태도는 무심하다. 남자는 남루하고 무례하고 거칠다. 게다가 한쪽 눈이 없다. 그는 달아난 아내를 찾고 있다고 말하며 여자에게 내일도 공원에 나와달라고 무례하게 요구한다. 여자는 거친 남자가 두렵고 거북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동정도 느낀다. 그래서 남자에게 내일도 나오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기다리며 저녁을 짓는다. 그리고 창밖 아래로 보이는 퇴근하는 남편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다. 남편이 곧 올 것이므로 아이에게 장난감을 치우라고 하기도 하고 아이의 옷차림이 반듯한가도 챙긴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고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사랑의 기쁨
기숙은 열두 살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하는 순박한 처녀다. 그녀는 우연히 옥상으로 나가는 문 뒤에 있는 어둑한 공간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스스로 키우고 믿는다. 그러다가 정말로 폭행살인강도를 저지르고 그곳에 숨어 있던 남자를 만난다. 기숙은 터무니없는 사랑의 환상 속에서 그 남자가 운명적인 사랑이라며 따라나선다. 그러나 기숙은 오래 꿈꿔온 사랑의 기쁨은 하루 만에 끝나고 만다.
먼 집
통학 버스를 놓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멀고 낯선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 운혜에 관한 이야기이다. 운혜는 낯선 동네들을 지나면서 온갖 걱정을 하고 피곤과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버스비를 아끼려고 버스를 타지 않는다. 집에 돌아온 운혜는 혼곤한 낮잠에 빠져든다. 저녁 무렵 퇴근한 남편으로부터 운혜는 집에서 놀면서 아이도 제시간에 맞춰 학교에 보내지 못한다고 핀잔을 듣는다. 운혜는 남편의 핀잔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아득한 거리감을 느낀다.
어떤 시작
마흔 살의 이혼녀인 윤자는 돈이 궁해 스물일곱 살의 유학생 경일과 위장 결혼을 한다. 윤자는 유학생이 나이 들고 가난한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자기가 유학생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고 자기 마음속의 외로움을 들킬까 봐 걱정하고 자기에게 엉뚱한 욕망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유학생이 엉뚱한 마음을 품을까 봐 걱정하는 등 온갖 걱정을 다 한다. 그리고 그 걱정들의 이면에는 그 걱정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잠재되어 있다. 경일이 구혼의 말을 던지고 달아날 때 복잡하고 모호하고 소심하고 방어적인 윤자는 너무나 반가웠지만 달아나는 그를 뒤따라가 잡지 못하고 겨우 열쇠 구멍으로 내다볼 뿐이다.
알마덴
여자는 남편과 함께 술 상점을 한다. 매일 저녁 말없이 알마덴 한 병을 사가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멋지고 멋쟁이 건달 차림이다. 화자는 점점 그 남자에 대한 상상을 한다. 남자의 신분 일상에 대한 상상은 더 나아가 그 남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일지 모른다는 상상으로 이어지고 여자는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더욱 긴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알마덴 한 병을 외상으로 가져간 후 다시는 가게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과 강물
외삼촌의 도움으로 술 상점을 하는 도혜는 어느 날 강도를 당한다. 그리고 옆집 가게에서 일어난 살인강도 사건도 길게 이야기된다. 이런 험한 세상에서 약하고 소심한 도혜는 마음도 메말라가고 젊음도 잃어버리고 자존심도 점점 줄어든다. 연약한 도혜에게 세상은 온통 폭력으로 다가온다. 헛되이 젊음을 앗아가는 세월도 폭력이고 가난도 폭력이고 외로움도 폭력이고 강도가 들끓는 동네도 폭력이다. 이런 폭력의 세상에 던져진 도혜는 겨우겨우 버틴다. 도혜는 열여덟 나이에 자기도 잘 모르는 힘에 이끌려 임신을 했고 이후 그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와 혼자 사는 여자다. 낯설고 폭력적인 세상에 서 버러져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도혜라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낙원 같은 집
옛 민담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김동환의 시편을 본문 중에 인용하고 있다. 어머니는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어린 삼 남매와 어렵게 살아간다.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던 어느 늦은 밤 어머니는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난다. 호랑이는 어머니의 떡을 다 먹어치운 후 그녀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먹더니 급기야 어머니를 완전히 잡아먹고 만다. 어머니는 결국 이렇게 잡아먹을 것을 왜 여기까지 오게 했냐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호랑이에게 애원하지만 호랑이는 “죽음이란 원래 이렇게 야금야금 달려드는 것이다.”라는 야속한 말을 남긴다. 호랑이는 어머니도 모자라 삼 남매까지 잡아먹으려고 한다. 막내는 교활한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두 남매는 신령님에게 기도해 해와 달이 된다. 다음 날 아침 이 모든 일은 가족이 다 같이 꾼 꿈이었음이 밝혀진다. 잠시 그들이 꿈 세상에 다녀왔거나 꿈이 잠시 세상에 내려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제 낙원 같은 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낙원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낙원을 찾는 데 필요한 것은 그냥 감았던 눈을 뜨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가족과 친지들의 다양한 삶을 섞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프리즘처럼 펼쳐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 다양한 삶 가운데 사랑의 환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물은 윤하이다. 윤하 역시 이혼하고 혼자 외롭게 산다. 그녀의 삶은 한 손으로 박수 치는 것처럼 허무하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한진석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치사한 남자다. 열 달을 살고 윤하를 버렸기 때문이다. 윤하는 한진석이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랑의 예감
제21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이 작품은 신혼여행을 떠난 신옥-서환 부부가 뉴욕에서 옛 친구인 장미 부부와 만나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지금은 뉴욕’과 납북된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를 키우는 여자(갈희)의 이야기를 다룬 ‘서울의 사랑’이라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뉴욕 한복판의 일상적인 공간과 서울 한복판의 환상적 공간을 대비시키는 대칭적 구조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만남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탐구하고 있는 역작이다. 특히 남편의 납북이라는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충만한 사랑의 기억으로 이겨내는 2장의 주인공 갈희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인 여운을 남기며 인간의 운명과 사랑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주제를 수준 높게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 해설
김지원의 소설은 대부분 여성 화자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이다. 그 여성 화자들은 이질적인 두 공간을 겹쳐 사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설명이 안 되는 모순된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방어적이고 의존적이고 허약하고 머뭇거리고 소극적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내적 통로가 막혔거나 약하다. 이런 여성들에게 현실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된다. 작가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의미 있게 보여주면서 그것이 지닌 진실의 힘에 주목하게 만든다. 기존 페미니즘 소설 속의 강한 여성성이 이념이고 당위라면 김지원 소설 속의 여성성은 진실이고 존재이다. _ 이남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 작가 소개
저자 : 김지원
경기도 덕소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여원》에 단편소설「늪 주변」이 당선되었으며 1975년 단편소설「사랑의 기쁨」과 「어떤 시작」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폭설』(1979)『겨울나무 사이』(1986)『알마덴』(1988)『돌아온 날개』(1993)『꽃철에 보내는 팩스』(2002) 등이 있고 중편소설『잠과 꿈』(1987) 연작소설『물이 물속으로 흐르듯』(1991) 자매소설집『먼 집 먼 바다』(1977)『집?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1996) 장편소설『모래시계』(1986)『꽃을 든 남자』(1989)『소금의 시간』(1996)『낭만의 집』(1998)『물빛 물소리』(2005) 등이 있다. 1997년 중편소설「사랑의 예감」으로 제2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1999년 마이클 뉴튼의『영혼들의 여행』을 공저로 번역했고 2009년 아버지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각색해 동명의 시극(詩劇) 극본으로 발표했다. 2013년 1월 30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 맨해튼에서 타계했다.
“낙원을 찾는 데 필요한 것은
그냥 감았던 눈을 뜨는 것뿐이었다.”
아름답지만 절제된 문체와 섬세한 감수성 그리고 겸허한 시선을 통해 그려낸
사랑이라는 환상과 착각 그 선득하게 빛나는 정교한 삶의 무늬!
김지원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면만을 겸허한 눈으로 그려내는 작가다. 그녀는 공연히 큰 소리를 내어 무엇을 외치지 않는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끊임없이 속삭여대는 그 작은 소리들은 빗방울이 마침내 바위를 뚫듯 사람의 마음을 지나가준다고 믿는다. 그것이 김지원 문학의 독특한 향기이자 강점이다. 비록 그녀 작품 속의 사람들이 외로워 가슴속에 등불을 밝힌 채 표요히 떠돌고 있다 하더라도 작가인 그녀가 세상을 애정 깊게 바라보기 위해 끊임없이 힘 기울이고 있음을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지원의 작품 전반에는 낭만적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여성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나타나 있다. 김지원의 소설 속 여성들은 현재의 삶에서 심한 결핍감을 느끼고 그 결핍을 메워줄 낭만적 사랑을 갈구하거나 그 대상을 이상화한다. 그러나 그녀를 평등한 인격체로 대우해주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해줄 남성은 실제로는 살인자거나 알코올중독자로서 일반적인 남성의 지위조차 확보하지 못한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등단작「사랑의 기쁨」에서 사랑을 만나리라 꿈꾸는 식모아이는 작은 아버지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피신해 있던 남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착각한다. 「알마덴」의 여주인공은 가부장적인 남편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소외된 삶을 살아가면서 매일 알마덴이란 술을 사러오는 남자와의 사랑을 꿈꾼다. 이렇듯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의 조건 위에 서 있는 그들의 사랑은 결국 어긋날 수밖에 없는 환상이고 착각이라는 것이 김지원이 끊임없이 천착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녀의 소설에서 사랑에 실패한 여성들이 많은 것도 그녀의 소설이 사랑의 환상적 속성을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환상은 사랑으로 가는 통로이자 때로는 현실보다 더 큰 현실이 된다. 그리고 작가에게 있어 이 사랑의 본질은 생의 이유이자 본질과 동의어가 된다.
이념과 당위가 아닌 존재이자 진실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통찰
낭만적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작가!
김지원 작가가 전 작품에 걸쳐 사랑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여성 인물들이 보이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집착이 단순히 소녀적인 공상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제도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나 결혼이라는 환상이 깨진 후 우리는 그 실체를 고스란히 마주하고 짊어져야만 한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여자가 아닌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된다. 그리고 순종을 배우고 사랑과 열정 대신 반복되는 일상을 얻는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족 제도와 규율 속에서 낭만적 사랑을 꿈꿀 수밖에 없는 조건과 그것의 허구성을 이미 알아버린 통찰 사이의 갈등상태가 김지원이 그토록 낭만적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김지원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세상의 폭력 앞에서 허약하기만 하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방어적이고 모호하고 여리고 머뭇거린다. 여성 인물들이 낭만적 사랑에 집착하는 반면 남성 인물들은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오히려 그들은 끊임없이 아내나 그 외 여자들과의 관계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거나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고 역설적으로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남성의 역할에 대한 강박 때문에 불행해한다. 이들을 향한 여성의 희미한 몸짓으로서의 저항은 인간관계에서의 친밀감과 헌신 등이 남성의 세계에서 우월한 가치로 여기는 경쟁과 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때론 고요하지만 누구보다 집요하고 강인하게 주장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듯 김지원은 이러한 여성성을 내세워 여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 앞에 다시금 새롭게 환기시키고 이러한 존재를 포용하지 못하는 세상의 폭력성을 지적한다. 여성들에게 남자는 구원이면서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고 짧게나마 환상을 안겨주지만 긴 폭력을 남기기도 한다. 기존의 페미니즘 소설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김지원의 소설들은 이처럼 허약한 여성성에 갇혀 있는 예민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페미니즘의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비
여자가 공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한 아이는 자기 아이이고 다른 두 아이는 베이비시터를 맡고 있는 아이다. 그리고 공원에는 한 남자와 그의 아이가 있다. 그 남자의 아이는 흙을 먹고 있는데 여자는 그게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남자에게 아이가 흙을 먹는다고 애써 알려주지만 남자의 태도는 무심하다. 남자는 남루하고 무례하고 거칠다. 게다가 한쪽 눈이 없다. 그는 달아난 아내를 찾고 있다고 말하며 여자에게 내일도 공원에 나와달라고 무례하게 요구한다. 여자는 거친 남자가 두렵고 거북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동정도 느낀다. 그래서 남자에게 내일도 나오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기다리며 저녁을 짓는다. 그리고 창밖 아래로 보이는 퇴근하는 남편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다. 남편이 곧 올 것이므로 아이에게 장난감을 치우라고 하기도 하고 아이의 옷차림이 반듯한가도 챙긴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고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사랑의 기쁨
기숙은 열두 살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하는 순박한 처녀다. 그녀는 우연히 옥상으로 나가는 문 뒤에 있는 어둑한 공간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스스로 키우고 믿는다. 그러다가 정말로 폭행살인강도를 저지르고 그곳에 숨어 있던 남자를 만난다. 기숙은 터무니없는 사랑의 환상 속에서 그 남자가 운명적인 사랑이라며 따라나선다. 그러나 기숙은 오래 꿈꿔온 사랑의 기쁨은 하루 만에 끝나고 만다.
먼 집
통학 버스를 놓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멀고 낯선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 운혜에 관한 이야기이다. 운혜는 낯선 동네들을 지나면서 온갖 걱정을 하고 피곤과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버스비를 아끼려고 버스를 타지 않는다. 집에 돌아온 운혜는 혼곤한 낮잠에 빠져든다. 저녁 무렵 퇴근한 남편으로부터 운혜는 집에서 놀면서 아이도 제시간에 맞춰 학교에 보내지 못한다고 핀잔을 듣는다. 운혜는 남편의 핀잔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아득한 거리감을 느낀다.
어떤 시작
마흔 살의 이혼녀인 윤자는 돈이 궁해 스물일곱 살의 유학생 경일과 위장 결혼을 한다. 윤자는 유학생이 나이 들고 가난한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자기가 유학생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고 자기 마음속의 외로움을 들킬까 봐 걱정하고 자기에게 엉뚱한 욕망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유학생이 엉뚱한 마음을 품을까 봐 걱정하는 등 온갖 걱정을 다 한다. 그리고 그 걱정들의 이면에는 그 걱정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잠재되어 있다. 경일이 구혼의 말을 던지고 달아날 때 복잡하고 모호하고 소심하고 방어적인 윤자는 너무나 반가웠지만 달아나는 그를 뒤따라가 잡지 못하고 겨우 열쇠 구멍으로 내다볼 뿐이다.
알마덴
여자는 남편과 함께 술 상점을 한다. 매일 저녁 말없이 알마덴 한 병을 사가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멋지고 멋쟁이 건달 차림이다. 화자는 점점 그 남자에 대한 상상을 한다. 남자의 신분 일상에 대한 상상은 더 나아가 그 남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일지 모른다는 상상으로 이어지고 여자는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더욱 긴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알마덴 한 병을 외상으로 가져간 후 다시는 가게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과 강물
외삼촌의 도움으로 술 상점을 하는 도혜는 어느 날 강도를 당한다. 그리고 옆집 가게에서 일어난 살인강도 사건도 길게 이야기된다. 이런 험한 세상에서 약하고 소심한 도혜는 마음도 메말라가고 젊음도 잃어버리고 자존심도 점점 줄어든다. 연약한 도혜에게 세상은 온통 폭력으로 다가온다. 헛되이 젊음을 앗아가는 세월도 폭력이고 가난도 폭력이고 외로움도 폭력이고 강도가 들끓는 동네도 폭력이다. 이런 폭력의 세상에 던져진 도혜는 겨우겨우 버틴다. 도혜는 열여덟 나이에 자기도 잘 모르는 힘에 이끌려 임신을 했고 이후 그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와 혼자 사는 여자다. 낯설고 폭력적인 세상에 서 버러져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도혜라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낙원 같은 집
옛 민담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김동환의 시편을 본문 중에 인용하고 있다. 어머니는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어린 삼 남매와 어렵게 살아간다.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던 어느 늦은 밤 어머니는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난다. 호랑이는 어머니의 떡을 다 먹어치운 후 그녀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먹더니 급기야 어머니를 완전히 잡아먹고 만다. 어머니는 결국 이렇게 잡아먹을 것을 왜 여기까지 오게 했냐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호랑이에게 애원하지만 호랑이는 “죽음이란 원래 이렇게 야금야금 달려드는 것이다.”라는 야속한 말을 남긴다. 호랑이는 어머니도 모자라 삼 남매까지 잡아먹으려고 한다. 막내는 교활한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두 남매는 신령님에게 기도해 해와 달이 된다. 다음 날 아침 이 모든 일은 가족이 다 같이 꾼 꿈이었음이 밝혀진다. 잠시 그들이 꿈 세상에 다녀왔거나 꿈이 잠시 세상에 내려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제 낙원 같은 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낙원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낙원을 찾는 데 필요한 것은 그냥 감았던 눈을 뜨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가족과 친지들의 다양한 삶을 섞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프리즘처럼 펼쳐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 다양한 삶 가운데 사랑의 환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물은 윤하이다. 윤하 역시 이혼하고 혼자 외롭게 산다. 그녀의 삶은 한 손으로 박수 치는 것처럼 허무하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한진석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치사한 남자다. 열 달을 살고 윤하를 버렸기 때문이다. 윤하는 한진석이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랑의 예감
제21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이 작품은 신혼여행을 떠난 신옥-서환 부부가 뉴욕에서 옛 친구인 장미 부부와 만나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지금은 뉴욕’과 납북된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를 키우는 여자(갈희)의 이야기를 다룬 ‘서울의 사랑’이라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뉴욕 한복판의 일상적인 공간과 서울 한복판의 환상적 공간을 대비시키는 대칭적 구조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만남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탐구하고 있는 역작이다. 특히 남편의 납북이라는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충만한 사랑의 기억으로 이겨내는 2장의 주인공 갈희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인 여운을 남기며 인간의 운명과 사랑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주제를 수준 높게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 해설
김지원의 소설은 대부분 여성 화자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이다. 그 여성 화자들은 이질적인 두 공간을 겹쳐 사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설명이 안 되는 모순된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방어적이고 의존적이고 허약하고 머뭇거리고 소극적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내적 통로가 막혔거나 약하다. 이런 여성들에게 현실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된다. 작가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의미 있게 보여주면서 그것이 지닌 진실의 힘에 주목하게 만든다. 기존 페미니즘 소설 속의 강한 여성성이 이념이고 당위라면 김지원 소설 속의 여성성은 진실이고 존재이다. _ 이남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 작가 소개
저자 : 김지원
경기도 덕소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여원》에 단편소설「늪 주변」이 당선되었으며 1975년 단편소설「사랑의 기쁨」과 「어떤 시작」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폭설』(1979)『겨울나무 사이』(1986)『알마덴』(1988)『돌아온 날개』(1993)『꽃철에 보내는 팩스』(2002) 등이 있고 중편소설『잠과 꿈』(1987) 연작소설『물이 물속으로 흐르듯』(1991) 자매소설집『먼 집 먼 바다』(1977)『집?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1996) 장편소설『모래시계』(1986)『꽃을 든 남자』(1989)『소금의 시간』(1996)『낭만의 집』(1998)『물빛 물소리』(2005) 등이 있다. 1997년 중편소설「사랑의 예감」으로 제2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1999년 마이클 뉴튼의『영혼들의 여행』을 공저로 번역했고 2009년 아버지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각색해 동명의 시극(詩劇) 극본으로 발표했다. 2013년 1월 30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 맨해튼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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