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양진채의 첫 장편소설이다. 2012년에 출간된 소설집『푸른 유리 심장』이후 오랜만이다. 『변사 기담』은 인천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인천 출신인 작가가 고향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조계지, 웃터골, 인천상륙작전 상륙 지점 등 인천의 역사적 명소들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 등 지나간 시대상이 소설과 함께 흘러간다.
소설은 무성영화 시절 인천에서 변사로 활동한 기담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제물포구락부의 유리 장식장 안에 종이 모형으로 자리 잡은 당시의 빛나던 건물들처럼 지금은 스러지고 빛이 바랜 그 시절을 작가는 풍성하게 재현해낸다. 그 시간 속에는 최고의 변사로서 말의 성찬을 벌였던 기담의 젊음이 있고, 기녀 묘화와의 사랑이 있다.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변사의 연행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작가의 시선은 균형감 있고, 문장은 단단하다.
두 가지 이야기 축이 있다. 하나는 주인공인 기담의 찬란했던 변사 시절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기담의 증손자인 정환의 이야기다. 기담이 변사가 되고, 연행을 하고, 묘화를 만나 사랑을 하고, 혀를 잘릴 때까지의 과거 이야기가 소설의 충심축이라면 증손자 정환이 기담의 집에 머무르며 영화를 만드는 현재의 이야기가 또 다른 축으로 마주보고 있다.
영화와 변사의 말에 매료된 기담은 변사가 되기를 꿈꾼다. 변사 김익호를 찾아가 변사가 되는 방법을 묻고, 변사 시험에 통과하지만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어느 날 김익호가 극장에 나타나지 않자 영화「아리랑」연행을 맡게 된 기담은 연행을 완벽하게 해내고 그후 최고의 변사로 이름을 떨친다.
기담은 계순이 하는 말의 재미를 그때그때 적어놓았고, 또 연행할 때 적절하게 대본을 바꾸거나 섞어 썼다. 사람들은 김익호 변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확하게 몰랐지만, 어쩐지 기담의 연행을 찰지다고 느꼈다. 기담은 무성영화에 말을 입히는 일은 한 편의 영화를 완성시키는, 화룡점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름과 대본이 같이 오긴 해도 상황에 따라 대본을 조금씩 바꿀 수가 있었다. 대본을 조금 바꾸는 것이지만 그 차이는 엄청났다. 똑같은 영화라도 어떻게 대사를 치고 광경을 설명하고 적재적소에서 웃음과 울음을 끌어낼 수 있느냐가 영화 흥행의 관건이었다. 기담은 변사가 되기 위해 타고난 사람처럼 그쪽으로 감각이 발달했다. 그날 든 관객의 반응을 보고 미묘한 차이를 잡을 줄 알았다. 게다가 그의 다채로운 음역은 마치 몇 사람의 변사가 같이 영화를 설명하고 대사를 치는 것처럼 화려하고 다양했다. (108쪽)
해월관에서 인력거가 도착하고 기담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 묘화와 만난다. 기생 명선과 영화관에 오곤 하던 유리를 닮은 여자. 그녀가 어린 시절에 자신과 묘한 인연으로 얽힌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담의 마음은 더욱 거세게 끓어오른다. 그러나 묘화는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기담은 창영동에서 묘화를 보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묘화는 은인인 영국인 맥코넬을 도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둘은 그것 때문에 크게 싸우게 되고 잠시 헤어진 사이 묘화도 기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술에 만취해 해월관을 찾아간 기담은 묘화와 화해를 하고 묘화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한편 묘화는 조직의 모임에서 웃터골 영화 상영회를 제안하게 되고, 그로 인해 큰 고민에 빠진다.
꼭 영화 상영이어야 하지는 않지만 영화 상영이 최선의 방법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 제안을 하기 전에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기담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자 하는 사람인지 터놓아야 했다. 영화 연행을 하기는커녕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의보다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이 일을 수락할 수도 있다. 아니 이 일로 그가 떠나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가 이 일 때문에 다치길 원치 않았다.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묘화는 도대체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들에 휩싸였다. 기담을 잃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기담에게 보이고 싶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 나라에 대해서도 눈뜨길 빌었다. (226쪽)
영화 연행밖에 모르는 기담은 오직 묘화를 위해 그 일을 수락하게 되고 거사의 날은 다가온다. 무료 영화 상영으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웃터골에 모인다. 그날 기담은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연행을 하게 되고,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는다.
기담은 낮에 일부러 부평에 있는 자전차포까지 가서 공기클락숀을 구했다. 서용호 변사처럼 가랑이 사이에 그것을 집어넣고 방귀 소리를 낼 생각이었다. 변사가 되고 지금까지 관객 위에 서려고 했던 자신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충분히 영화를 즐기고 여흥을 함께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채플린의 희극적인 모습을, 실수를, 표정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와 그들의 아픈 삶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다른 어떤 날보다 흥겹고 즐거운 축제가 벌어지는 날이 되길 원했다.
(259~260쪽)
그날 일어난 폭동으로 경찰서장은 결국 기담을 가두게 되고, 병원에서 눈을 뜬 기담은 자신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 누가 노래를 부르나. 누가 노래를 부르나. 그만 노래를 끝내다오. 지금에는 모든 것이 다 저주일 뿐이다. 행복에 웃고, 희망에 성장하며 사랑에 노래 부르고, 예술의 광명에 살아가던 모든 것이 인제는 다 허사였다. 두 눈의 광명이 사라지던 그때로부터 나의 생애의 전부는 모두 파괴되고, 지금에는 다만 암담한 적막이 휩싸고 있을 뿐이다. 오, 일체의 고통이여, 슬픔이여! 나를 더 괴롭게 굴지 마라! 지금 내가 찾으려는 것은 영원한 망각이다. (276쪽)
말로 놀고 말로 먹고살던 기담은 결국 입을 닫아버리고 묘화를 떠난다. 세월은 흐르고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그리고 지금의 휘황찬란 스펙터클한 영화로 변모하기까지 어떤 것도 기담을 흔들지 못한다. 축축한 갯가 냄새로 둘러싸인 공간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기담의 고독은 단단하기만 하다. 오랜 세월 입을 닫고 살아온 기담에게 어느 날 묘화의 편지가 도착하고, 영화를 만들겠다며 기담의 집에 눌러앉은 증손자 정환은 변사 흉내를 내며 기담을 자극한다. 정환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결국 기담의 과거를 불러들이고 기담을 움직이게 된다.
추천의 글
“일찍이 못 보았던 소설을 보면 다시 삶을 일으킨다. 더군다나 인천이라는 공간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 소설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가장 소중한 인생 공간을 비워놓고 무엇을 채울까 망설이다가 드디어 마땅한 것을 얻은 느낌이기도 했다. 오래전에 우리 곁에 있던 변사가 안타깝게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내게 살아와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반갑고도 눈물겹다. 이야말로 문학이라고, 탄탄한 문장을 짚어나가면 우리에게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놀랍게 여겨진다. 변사의 삶에 꿰여 있는 지난 시대가 풍성하게 재현되며 주인공 기담과 묘화의 사랑이 애절하다. 제물포구락부에 그 사랑의 오묘한 빛을 간직한 백조 공예품이 있다 하니, 나의 ‘어떤 환상’이 어느 날 발길 옮길 곳을 찾은 기쁨이 여기에 있다.”_윤후명 소설가
‘작가의 말’에서
내게 벚꽃이 휘날린다고, 첫눈이 온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고 문자를 해주던 그가 이제 곁에 없다. 아무렇지 않다고 되뇌어도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잠이 드는 게 무서웠다.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물이 입까지 차오를 때, 나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눈을 뜨면 뻐끔거렸던 입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그로 인해 한 세계가 사라졌으므로, 나는 외발로 서서 세상을 이겨내야 했다.
자주 어두운 포구나 부두를 서성였다. 비린 냄새를 품은 시간 속에서 기담에게 물었다. 거기, 어떻던가요? 나는 자꾸 다른 세계를 기웃거렸다.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 꼭 소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말(言)을 붙들어야 했다. 형벌이었는데, 아주 지독한 형벌만은 아니었다. 말을 붙드는 동안에는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장편소설이었다. 빚을 갚기까지 오래 걸렸다.
이제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이 책은 오롯이 그에게 바쳐야겠다.
▣ 작가 소개
저자 : 양진채
2008년『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푸른 유리 심장』이 있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양진채의 첫 장편소설이다. 2012년에 출간된 소설집『푸른 유리 심장』이후 오랜만이다. 『변사 기담』은 인천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인천 출신인 작가가 고향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조계지, 웃터골, 인천상륙작전 상륙 지점 등 인천의 역사적 명소들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 등 지나간 시대상이 소설과 함께 흘러간다.
소설은 무성영화 시절 인천에서 변사로 활동한 기담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제물포구락부의 유리 장식장 안에 종이 모형으로 자리 잡은 당시의 빛나던 건물들처럼 지금은 스러지고 빛이 바랜 그 시절을 작가는 풍성하게 재현해낸다. 그 시간 속에는 최고의 변사로서 말의 성찬을 벌였던 기담의 젊음이 있고, 기녀 묘화와의 사랑이 있다.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변사의 연행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작가의 시선은 균형감 있고, 문장은 단단하다.
두 가지 이야기 축이 있다. 하나는 주인공인 기담의 찬란했던 변사 시절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기담의 증손자인 정환의 이야기다. 기담이 변사가 되고, 연행을 하고, 묘화를 만나 사랑을 하고, 혀를 잘릴 때까지의 과거 이야기가 소설의 충심축이라면 증손자 정환이 기담의 집에 머무르며 영화를 만드는 현재의 이야기가 또 다른 축으로 마주보고 있다.
영화와 변사의 말에 매료된 기담은 변사가 되기를 꿈꾼다. 변사 김익호를 찾아가 변사가 되는 방법을 묻고, 변사 시험에 통과하지만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어느 날 김익호가 극장에 나타나지 않자 영화「아리랑」연행을 맡게 된 기담은 연행을 완벽하게 해내고 그후 최고의 변사로 이름을 떨친다.
기담은 계순이 하는 말의 재미를 그때그때 적어놓았고, 또 연행할 때 적절하게 대본을 바꾸거나 섞어 썼다. 사람들은 김익호 변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확하게 몰랐지만, 어쩐지 기담의 연행을 찰지다고 느꼈다. 기담은 무성영화에 말을 입히는 일은 한 편의 영화를 완성시키는, 화룡점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름과 대본이 같이 오긴 해도 상황에 따라 대본을 조금씩 바꿀 수가 있었다. 대본을 조금 바꾸는 것이지만 그 차이는 엄청났다. 똑같은 영화라도 어떻게 대사를 치고 광경을 설명하고 적재적소에서 웃음과 울음을 끌어낼 수 있느냐가 영화 흥행의 관건이었다. 기담은 변사가 되기 위해 타고난 사람처럼 그쪽으로 감각이 발달했다. 그날 든 관객의 반응을 보고 미묘한 차이를 잡을 줄 알았다. 게다가 그의 다채로운 음역은 마치 몇 사람의 변사가 같이 영화를 설명하고 대사를 치는 것처럼 화려하고 다양했다. (108쪽)
해월관에서 인력거가 도착하고 기담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 묘화와 만난다. 기생 명선과 영화관에 오곤 하던 유리를 닮은 여자. 그녀가 어린 시절에 자신과 묘한 인연으로 얽힌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담의 마음은 더욱 거세게 끓어오른다. 그러나 묘화는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기담은 창영동에서 묘화를 보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묘화는 은인인 영국인 맥코넬을 도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둘은 그것 때문에 크게 싸우게 되고 잠시 헤어진 사이 묘화도 기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술에 만취해 해월관을 찾아간 기담은 묘화와 화해를 하고 묘화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한편 묘화는 조직의 모임에서 웃터골 영화 상영회를 제안하게 되고, 그로 인해 큰 고민에 빠진다.
꼭 영화 상영이어야 하지는 않지만 영화 상영이 최선의 방법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 제안을 하기 전에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기담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자 하는 사람인지 터놓아야 했다. 영화 연행을 하기는커녕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의보다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이 일을 수락할 수도 있다. 아니 이 일로 그가 떠나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가 이 일 때문에 다치길 원치 않았다.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묘화는 도대체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들에 휩싸였다. 기담을 잃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기담에게 보이고 싶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 나라에 대해서도 눈뜨길 빌었다. (226쪽)
영화 연행밖에 모르는 기담은 오직 묘화를 위해 그 일을 수락하게 되고 거사의 날은 다가온다. 무료 영화 상영으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웃터골에 모인다. 그날 기담은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연행을 하게 되고,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는다.
기담은 낮에 일부러 부평에 있는 자전차포까지 가서 공기클락숀을 구했다. 서용호 변사처럼 가랑이 사이에 그것을 집어넣고 방귀 소리를 낼 생각이었다. 변사가 되고 지금까지 관객 위에 서려고 했던 자신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충분히 영화를 즐기고 여흥을 함께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채플린의 희극적인 모습을, 실수를, 표정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와 그들의 아픈 삶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다른 어떤 날보다 흥겹고 즐거운 축제가 벌어지는 날이 되길 원했다.
(259~260쪽)
그날 일어난 폭동으로 경찰서장은 결국 기담을 가두게 되고, 병원에서 눈을 뜬 기담은 자신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 누가 노래를 부르나. 누가 노래를 부르나. 그만 노래를 끝내다오. 지금에는 모든 것이 다 저주일 뿐이다. 행복에 웃고, 희망에 성장하며 사랑에 노래 부르고, 예술의 광명에 살아가던 모든 것이 인제는 다 허사였다. 두 눈의 광명이 사라지던 그때로부터 나의 생애의 전부는 모두 파괴되고, 지금에는 다만 암담한 적막이 휩싸고 있을 뿐이다. 오, 일체의 고통이여, 슬픔이여! 나를 더 괴롭게 굴지 마라! 지금 내가 찾으려는 것은 영원한 망각이다. (276쪽)
말로 놀고 말로 먹고살던 기담은 결국 입을 닫아버리고 묘화를 떠난다. 세월은 흐르고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그리고 지금의 휘황찬란 스펙터클한 영화로 변모하기까지 어떤 것도 기담을 흔들지 못한다. 축축한 갯가 냄새로 둘러싸인 공간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기담의 고독은 단단하기만 하다. 오랜 세월 입을 닫고 살아온 기담에게 어느 날 묘화의 편지가 도착하고, 영화를 만들겠다며 기담의 집에 눌러앉은 증손자 정환은 변사 흉내를 내며 기담을 자극한다. 정환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결국 기담의 과거를 불러들이고 기담을 움직이게 된다.
추천의 글
“일찍이 못 보았던 소설을 보면 다시 삶을 일으킨다. 더군다나 인천이라는 공간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 소설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가장 소중한 인생 공간을 비워놓고 무엇을 채울까 망설이다가 드디어 마땅한 것을 얻은 느낌이기도 했다. 오래전에 우리 곁에 있던 변사가 안타깝게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내게 살아와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반갑고도 눈물겹다. 이야말로 문학이라고, 탄탄한 문장을 짚어나가면 우리에게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놀랍게 여겨진다. 변사의 삶에 꿰여 있는 지난 시대가 풍성하게 재현되며 주인공 기담과 묘화의 사랑이 애절하다. 제물포구락부에 그 사랑의 오묘한 빛을 간직한 백조 공예품이 있다 하니, 나의 ‘어떤 환상’이 어느 날 발길 옮길 곳을 찾은 기쁨이 여기에 있다.”_윤후명 소설가
‘작가의 말’에서
내게 벚꽃이 휘날린다고, 첫눈이 온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고 문자를 해주던 그가 이제 곁에 없다. 아무렇지 않다고 되뇌어도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잠이 드는 게 무서웠다.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물이 입까지 차오를 때, 나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눈을 뜨면 뻐끔거렸던 입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그로 인해 한 세계가 사라졌으므로, 나는 외발로 서서 세상을 이겨내야 했다.
자주 어두운 포구나 부두를 서성였다. 비린 냄새를 품은 시간 속에서 기담에게 물었다. 거기, 어떻던가요? 나는 자꾸 다른 세계를 기웃거렸다.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 꼭 소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말(言)을 붙들어야 했다. 형벌이었는데, 아주 지독한 형벌만은 아니었다. 말을 붙드는 동안에는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장편소설이었다. 빚을 갚기까지 오래 걸렸다.
이제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이 책은 오롯이 그에게 바쳐야겠다.
▣ 작가 소개
저자 : 양진채
2008년『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푸른 유리 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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