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작가 소개
루쉰(魯迅, 1881-1936)
1902년 일본으로 유학하였으며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는 샤오싱사범학교(紹興師範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1918년 5월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으로 《신청년(新靑年)》에 최초의 백화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하였다. 1928년에는 위다푸(郁達夫)와 《분류(奔流)》 잡지를 창간하고 아울러 마르크스주의 문예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좌익작가연맹(左翼作家聯盟)을 발기하였으며 국민당 정부의 문화토벌 가운데에서도 민족주의(民族主義) 등의 파와 논전을 벌였고 내부의 좌경 사조를 비판했다. 그는 1천만여 자에 달하는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그중 많은 저작이 여러 나라의 문자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서 읽히고 있다.
위다푸(郁達夫, 1896-1945)
1911년부터 구체시를 창작하여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2년 3월에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해 5월에 《창조계간(創造季刊)》 창간호를 주편하여 출판했다. 1938년부터는 항일 선전에 참여하였고 비밀리에 항일 활동을 했다. 한때 일본군의 강박으로 수개월 동안 일본군의 통역을 맡았는데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한 뒤 그는 일본 헌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궈모뤄(郭沫若, 1892-1978)
문학가·역사학자·정치활동가. 지주 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1913년 말에 일본에 유학하였으며 5·4 시기에는 반제·반봉건 문화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26년에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부주임을 역임했고 1927년에는 난창(南昌)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에는 일본으로 도망하여 중국고대사와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3차 국내전쟁 시기에는 상하이, 홍콩 등지에서 민주운동에 종사하였고 1948년에는 해방구로 건너왔다.
예성타오(葉聖陶, 1894-1988)
작가·아동문학가·교육가·출판가·사회활동가. 1919년에는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조직한 신조사(新潮社)에 가입했고 《신조(新潮)》 잡지에 소설과 논문을 발표했다. 1923-1930년에는 상하이 상무인서관에서 편집을 맡았으며 1927년 5월부터 《소설월보》를 주편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개명서점(開明書店)에 들어가 편집을 맡았으며 항일 전쟁 기간에는 러산(樂山)의 우한대학(武漢大學) 중문계(中文系) 교수를 지냈고 후에는 청두에서 개명서점의 편집업무를 주관했다.
루옌(魯彦, 1902-1944)
1923년 《동방잡지》 11월호에 처녀작 [가을밤(秋夜)]을 발표했다. 이후 군벌의 살인 폭행을 묘사한 초기 대표작 [유자(柚子)]를 비롯하여 수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낭만, 상징 등 서로 다른 기법을 써서 창작을 탐색함으로써 향토사실파의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1927년 《소설월보》 7월호에 발표한 [황금]은 쁘띠 부르조아가 끊임없이 재난을 당하는 경우를 묘사함으로써 구사회의 인정세태를 깊이 있게 반영했다. 그 후 그는 더욱 더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항전 전야에 중요한 장편 소설 《들불(野火)》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강남 농민의 비참한 생활과 자발적인 반항 투쟁을 묘사했다.
리�우(李健吾, 1906-1983)
극작가·문학평론가·문학번역가. 1924년에 창작한 단막극 [노동자(工人)]는 철도노동자의 고통스런 생활을 표현하였 1931년에는 프랑스 파리 현대언어진수학교(現代言語進修學校)에서 연수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플로베르를 연구했다. 1936년에 영향력 있는 논저 《저화집(咀華集)》을 출판했으며 그 이후에는 주로 외국문학 번역과 연구에 종사하여 플로베르를 연구하고 고리키, 체홉, 몰리에르, 톨스토이, 투르게니에프 등 작가의 희극작품을 번역, 소개하는 방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류나어우(劉?鷗, 1900-1939)
소설가. 일본에서 성장하여 전후로 도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과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문과에서 공부하였다. 1?28사변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1939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 정부에 의탁했으며 동년에 상하이의 《문회보(文?報)》 간행을 준비하던 기간에 암살되었다. 그와 무스잉(穆時英)은 중국 신감각파의 대표라고 불린다.
무스잉(穆時英, 1912-1940)
소설가. 어려서 은행가인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와서 공부했는데 중학 때부터 문학을 애호하였고 광화대학(光華大學) 중문계(中文系)를 졸업했다. 작품의 특색은 ‘현대파’의 신기한 방법으로 상하이 조계지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여 하이파(海派) 문학의 기치를 내세웠다.
샤오첸(蕭乾, 1910-1999)
작가·기자·번역가.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온갖 고된 일을 하면서 고학했다. 1935년에 옌징대학(燕京大學)을 졸업하고 선충원(沈從文)을 도와 《대공보?문예》를 편집했으며 이 신문의 기자를 역임했다. 작품집 《이하집(籬下集)》, 《밤(栗子)》 등은 아동의 시각으로 냉정하고 불행한 세상을 보여주었다. [귀의]는 교회 학교의 중국 학생 심령에 대한 마비를 폭로했다. 1938년에는 애정비극을 묘사한 자전체 장편 소설 《멍즈구(夢之谷)》를 출판했다.
샤오훙(蕭紅, 1911-1942)
소설가. 어려서 모친을 여의었고 1928년에 하얼빈(哈爾濱)에서 중학에 다니면서 5·4이래의 진보사상과 중외문학을 접촉하여 시야를 확대했고 루쉰, 마오둔 및 미국 작가 싱크레어 등 작품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루쉰 선생의 사망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어 조국의 운명에 대한 관심을 품게 되었다. 장편 소설 《후란 강 이야기(呼蘭河傳)》는 유년 생활에 대한 회상을 통해 중국 북방 작은 도회지의 우매하고 마비된 생활을 묘사하여 봉건전통의 낙후성을 깊이 반영했다. 그녀는 1942년에 홍콩에서 병사하였는데 당시의 나이는 31세였다. 10년도 안 되는 창작 생애 중에 중국 문단에 60만자의 고귀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작가의 섬세한 감정기질을 가지고 있어 우미하고 서정적인 필치로 봉건압박과 제국주의 압박하의 민족의 불굴의 영혼을 표현해 내었다.
장텐이(張天翼, 1906-1985)
소설가·아문동학가. 중학시절에 골계, 탐정소설을 써서 장우정(張無諍)이란 필명으로 《토요일(禮拜六)》 등 간행물에 투고한 바 있다. 항전이 발생한 뒤 상하이에서 후난으로 돌아가 문화구망운동(文化救亡運動)에 종사했다. 이때 문화 관료들이 이권을 다투는 추태를 목도하고 대표작 [화웨이 선생(華威先生)]을 썼는데 이는 발표 후 항전문학이 폭로해야 할지 말지에 관한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수췬(舒群, 1913-1989)
소설가. 가정이 워낙 가난하여 중학에 들어간 지 2개월 만에 학비를 내지 못해 퇴학당했다. 이후 소련 출신 여교사의 도움으로 소련인 학교인 홍아중학(紅俄中學)에 입학하여 1년 동안 다니다가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퇴했다. 1932년에 혁명공작에 참여하였고 동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5년에는 상하이로 가서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고 좌련(左聯)에 가입했다. 그의 소설 [조국이 없는 아이(沒有祖國的孩子)]는 1936년 5월 《문학》 제6권 제5호에 발표되었는데 고향을 잃은 조선 소년이 동북 지방에서 일본 침략자의 능욕과 압박을 받으며 반항한다는 스토리를 묘사했다.
딩링(丁玲, 1904-1986)
소설가. 잔혹한 현실을 접한 딩링은 혁명투쟁에 투신하여 좌련의 문학 간행물 《북두(北斗)》를 주편하였고, 아울러 1932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의 창작이 큰 수확을 거뒀다. 《북두》 제1-3기에 연재한 소설 [홍수(水)]는 작가 시야의 새로운 개척과 현실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33년에는 미완성 장편 소설 《어머니(母親)》를 출판하여 신해혁명(辛亥革命) 시대의 진보적 여성을 진실하게 묘사했다. 혁명에 종사하는 정신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친의 굳센 성격은 딩링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우줘류(吳濁流, 1900-1976)
소설가.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소학 교사로 지냈고 1940년에는 식민통치자가 교사를 능욕하는 바람에 사직하고 난징으로 건너가 《대륙신보(大陸新報)》 기자로 지냈다. 이듬해 타이완으로 돌아와 몇몇 신문사에서 기자로 지냈다. 37세 때 최초의 소설 [수월(水月)]을 《타이완신소설(臺灣新小說)》 잡지에 발표했다.
쑨리(孫犁, 1913-2002)
소설가. 1933년 고등학교 졸업 후 베이핑(北平)을 유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후로 시정(市政) 기관과 소학교 직원을 맡았다. 1937년에는 항일운동에 참가하였고 혁명시 《바다제비의 노래(海燕之歌)》를 편집하여 출판했으며 《붉은 별(紅星)》 잡지와 《지중도보(冀中導報)》 부간에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1949년 이후에는 《텐진일보(天津日報)》사에서 편집을 맡다가 오래지 않아 작가협회 톈진분회(天津分會) 부주석으로 당선되었고 저명한 장편 소설 《풍운초기(風雲初記)》, 중편 소설 《시골집(村家)》과 《철공과 목공의 이전 이야기(鐵木前傳)》 등을 창작했다. 1956년에 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이후에는 창작이 감소했다. 생전에는 중국작가협회 톈진분회 명예주석을 맡았다.
역자 : 조성환
충남 서산 출신으로 천안고를 거쳐 경북대 중어중문학과(1987)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1989)와 박사(1996) 학위를 받았다. 서라벌대학 중국어과에서 전임, 조교수, 부교수를 역임했으며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방문학자를 지냈다. 지금은 백석대에서 강의하며 번역에 종사하고 있다. 그 동안 옮기고 엮은 책으로는 《북경과의 대화》(2008), 《중국의 최치원 연구》(2009), 《경주에 가거든》(2010), 《서복동도》(2010), 《압록강에서》(2010), 《포스트모던 음식문화》(2011), 《중국 역대 여성작가 사전》(2011), 《빙신 단편집》(2011), 《미식가》(2012), 《책 향기에 취하다》(2012), 《당시화보》(2015), 《사상문》(2016) 등 20여 권이 있다.
▣ 주요 목차
옮긴이의 말
광인일기·루쉰
타락·위다푸
늦봄·궈모뤄
난처한 판 선생·예성타오
유자·루옌
황실의 후예·리�우
시간에 무감각한 두 남자·류나어우
나이트클럽의 다섯 사람·무스잉
귀의·샤오쳰
손·샤오훙
화웨이 선생·장톈이
바다의 피안·수췬
밤·딩링
의사 선생님 어머니·우줘류
허화뎬·쑨리
작가 소개
중국 현대소설 유파 개관
루쉰(魯迅, 1881-1936)
1902년 일본으로 유학하였으며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는 샤오싱사범학교(紹興師範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1918년 5월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으로 《신청년(新靑年)》에 최초의 백화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하였다. 1928년에는 위다푸(郁達夫)와 《분류(奔流)》 잡지를 창간하고 아울러 마르크스주의 문예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좌익작가연맹(左翼作家聯盟)을 발기하였으며 국민당 정부의 문화토벌 가운데에서도 민족주의(民族主義) 등의 파와 논전을 벌였고 내부의 좌경 사조를 비판했다. 그는 1천만여 자에 달하는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그중 많은 저작이 여러 나라의 문자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서 읽히고 있다.
위다푸(郁達夫, 1896-1945)
1911년부터 구체시를 창작하여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2년 3월에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해 5월에 《창조계간(創造季刊)》 창간호를 주편하여 출판했다. 1938년부터는 항일 선전에 참여하였고 비밀리에 항일 활동을 했다. 한때 일본군의 강박으로 수개월 동안 일본군의 통역을 맡았는데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한 뒤 그는 일본 헌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궈모뤄(郭沫若, 1892-1978)
문학가·역사학자·정치활동가. 지주 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1913년 말에 일본에 유학하였으며 5·4 시기에는 반제·반봉건 문화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26년에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부주임을 역임했고 1927년에는 난창(南昌)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에는 일본으로 도망하여 중국고대사와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3차 국내전쟁 시기에는 상하이, 홍콩 등지에서 민주운동에 종사하였고 1948년에는 해방구로 건너왔다.
예성타오(葉聖陶, 1894-1988)
작가·아동문학가·교육가·출판가·사회활동가. 1919년에는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조직한 신조사(新潮社)에 가입했고 《신조(新潮)》 잡지에 소설과 논문을 발표했다. 1923-1930년에는 상하이 상무인서관에서 편집을 맡았으며 1927년 5월부터 《소설월보》를 주편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개명서점(開明書店)에 들어가 편집을 맡았으며 항일 전쟁 기간에는 러산(樂山)의 우한대학(武漢大學) 중문계(中文系) 교수를 지냈고 후에는 청두에서 개명서점의 편집업무를 주관했다.
루옌(魯彦, 1902-1944)
1923년 《동방잡지》 11월호에 처녀작 [가을밤(秋夜)]을 발표했다. 이후 군벌의 살인 폭행을 묘사한 초기 대표작 [유자(柚子)]를 비롯하여 수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낭만, 상징 등 서로 다른 기법을 써서 창작을 탐색함으로써 향토사실파의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1927년 《소설월보》 7월호에 발표한 [황금]은 쁘띠 부르조아가 끊임없이 재난을 당하는 경우를 묘사함으로써 구사회의 인정세태를 깊이 있게 반영했다. 그 후 그는 더욱 더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항전 전야에 중요한 장편 소설 《들불(野火)》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강남 농민의 비참한 생활과 자발적인 반항 투쟁을 묘사했다.
리�우(李健吾, 1906-1983)
극작가·문학평론가·문학번역가. 1924년에 창작한 단막극 [노동자(工人)]는 철도노동자의 고통스런 생활을 표현하였 1931년에는 프랑스 파리 현대언어진수학교(現代言語進修學校)에서 연수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플로베르를 연구했다. 1936년에 영향력 있는 논저 《저화집(咀華集)》을 출판했으며 그 이후에는 주로 외국문학 번역과 연구에 종사하여 플로베르를 연구하고 고리키, 체홉, 몰리에르, 톨스토이, 투르게니에프 등 작가의 희극작품을 번역, 소개하는 방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류나어우(劉?鷗, 1900-1939)
소설가. 일본에서 성장하여 전후로 도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과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문과에서 공부하였다. 1?28사변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1939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 정부에 의탁했으며 동년에 상하이의 《문회보(文?報)》 간행을 준비하던 기간에 암살되었다. 그와 무스잉(穆時英)은 중국 신감각파의 대표라고 불린다.
무스잉(穆時英, 1912-1940)
소설가. 어려서 은행가인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와서 공부했는데 중학 때부터 문학을 애호하였고 광화대학(光華大學) 중문계(中文系)를 졸업했다. 작품의 특색은 ‘현대파’의 신기한 방법으로 상하이 조계지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여 하이파(海派) 문학의 기치를 내세웠다.
샤오첸(蕭乾, 1910-1999)
작가·기자·번역가.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온갖 고된 일을 하면서 고학했다. 1935년에 옌징대학(燕京大學)을 졸업하고 선충원(沈從文)을 도와 《대공보?문예》를 편집했으며 이 신문의 기자를 역임했다. 작품집 《이하집(籬下集)》, 《밤(栗子)》 등은 아동의 시각으로 냉정하고 불행한 세상을 보여주었다. [귀의]는 교회 학교의 중국 학생 심령에 대한 마비를 폭로했다. 1938년에는 애정비극을 묘사한 자전체 장편 소설 《멍즈구(夢之谷)》를 출판했다.
샤오훙(蕭紅, 1911-1942)
소설가. 어려서 모친을 여의었고 1928년에 하얼빈(哈爾濱)에서 중학에 다니면서 5·4이래의 진보사상과 중외문학을 접촉하여 시야를 확대했고 루쉰, 마오둔 및 미국 작가 싱크레어 등 작품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루쉰 선생의 사망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어 조국의 운명에 대한 관심을 품게 되었다. 장편 소설 《후란 강 이야기(呼蘭河傳)》는 유년 생활에 대한 회상을 통해 중국 북방 작은 도회지의 우매하고 마비된 생활을 묘사하여 봉건전통의 낙후성을 깊이 반영했다. 그녀는 1942년에 홍콩에서 병사하였는데 당시의 나이는 31세였다. 10년도 안 되는 창작 생애 중에 중국 문단에 60만자의 고귀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작가의 섬세한 감정기질을 가지고 있어 우미하고 서정적인 필치로 봉건압박과 제국주의 압박하의 민족의 불굴의 영혼을 표현해 내었다.
장텐이(張天翼, 1906-1985)
소설가·아문동학가. 중학시절에 골계, 탐정소설을 써서 장우정(張無諍)이란 필명으로 《토요일(禮拜六)》 등 간행물에 투고한 바 있다. 항전이 발생한 뒤 상하이에서 후난으로 돌아가 문화구망운동(文化救亡運動)에 종사했다. 이때 문화 관료들이 이권을 다투는 추태를 목도하고 대표작 [화웨이 선생(華威先生)]을 썼는데 이는 발표 후 항전문학이 폭로해야 할지 말지에 관한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수췬(舒群, 1913-1989)
소설가. 가정이 워낙 가난하여 중학에 들어간 지 2개월 만에 학비를 내지 못해 퇴학당했다. 이후 소련 출신 여교사의 도움으로 소련인 학교인 홍아중학(紅俄中學)에 입학하여 1년 동안 다니다가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퇴했다. 1932년에 혁명공작에 참여하였고 동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5년에는 상하이로 가서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고 좌련(左聯)에 가입했다. 그의 소설 [조국이 없는 아이(沒有祖國的孩子)]는 1936년 5월 《문학》 제6권 제5호에 발표되었는데 고향을 잃은 조선 소년이 동북 지방에서 일본 침략자의 능욕과 압박을 받으며 반항한다는 스토리를 묘사했다.
딩링(丁玲, 1904-1986)
소설가. 잔혹한 현실을 접한 딩링은 혁명투쟁에 투신하여 좌련의 문학 간행물 《북두(北斗)》를 주편하였고, 아울러 1932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의 창작이 큰 수확을 거뒀다. 《북두》 제1-3기에 연재한 소설 [홍수(水)]는 작가 시야의 새로운 개척과 현실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33년에는 미완성 장편 소설 《어머니(母親)》를 출판하여 신해혁명(辛亥革命) 시대의 진보적 여성을 진실하게 묘사했다. 혁명에 종사하는 정신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친의 굳센 성격은 딩링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우줘류(吳濁流, 1900-1976)
소설가.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소학 교사로 지냈고 1940년에는 식민통치자가 교사를 능욕하는 바람에 사직하고 난징으로 건너가 《대륙신보(大陸新報)》 기자로 지냈다. 이듬해 타이완으로 돌아와 몇몇 신문사에서 기자로 지냈다. 37세 때 최초의 소설 [수월(水月)]을 《타이완신소설(臺灣新小說)》 잡지에 발표했다.
쑨리(孫犁, 1913-2002)
소설가. 1933년 고등학교 졸업 후 베이핑(北平)을 유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후로 시정(市政) 기관과 소학교 직원을 맡았다. 1937년에는 항일운동에 참가하였고 혁명시 《바다제비의 노래(海燕之歌)》를 편집하여 출판했으며 《붉은 별(紅星)》 잡지와 《지중도보(冀中導報)》 부간에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1949년 이후에는 《텐진일보(天津日報)》사에서 편집을 맡다가 오래지 않아 작가협회 톈진분회(天津分會) 부주석으로 당선되었고 저명한 장편 소설 《풍운초기(風雲初記)》, 중편 소설 《시골집(村家)》과 《철공과 목공의 이전 이야기(鐵木前傳)》 등을 창작했다. 1956년에 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이후에는 창작이 감소했다. 생전에는 중국작가협회 톈진분회 명예주석을 맡았다.
역자 : 조성환
충남 서산 출신으로 천안고를 거쳐 경북대 중어중문학과(1987)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1989)와 박사(1996) 학위를 받았다. 서라벌대학 중국어과에서 전임, 조교수, 부교수를 역임했으며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방문학자를 지냈다. 지금은 백석대에서 강의하며 번역에 종사하고 있다. 그 동안 옮기고 엮은 책으로는 《북경과의 대화》(2008), 《중국의 최치원 연구》(2009), 《경주에 가거든》(2010), 《서복동도》(2010), 《압록강에서》(2010), 《포스트모던 음식문화》(2011), 《중국 역대 여성작가 사전》(2011), 《빙신 단편집》(2011), 《미식가》(2012), 《책 향기에 취하다》(2012), 《당시화보》(2015), 《사상문》(2016) 등 20여 권이 있다.
▣ 주요 목차
옮긴이의 말
광인일기·루쉰
타락·위다푸
늦봄·궈모뤄
난처한 판 선생·예성타오
유자·루옌
황실의 후예·리�우
시간에 무감각한 두 남자·류나어우
나이트클럽의 다섯 사람·무스잉
귀의·샤오쳰
손·샤오훙
화웨이 선생·장톈이
바다의 피안·수췬
밤·딩링
의사 선생님 어머니·우줘류
허화뎬·쑨리
작가 소개
중국 현대소설 유파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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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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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