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조화와 완성을 향한 의지
토마스 만은 독일문학사상 전환점에 선 작가이다. 그를 계기로 독일문학은 집대성되고 반성된다. 토마스 만 자체가 독일 문화의 장점과 단점을 자신 속에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니체, 쇼펜하우어, 바그너가 토마스 만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여러 이질적 요소를 모두 자기 속에 용해시켜 자신의 운명관으로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다.
토마스 만 문학의 특성은 한 마디로 조화와 완성을 향한 의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질식할 듯 무거운 19세기 말의 분위기 속에서 한 가닥의 구원을 모색하는 데 토마스 만처럼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작가도 드물다. 그의 일생은 정지된 생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생성의 길이었다. 80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참으로 완성을 위한 인내의 길이었다.
그는 성실하게 자기 자신과 그 시대 상황에 대해서 글을 써왔기 때문에 그의 산문들은 상당히 자전적인 요소가 짙다. 그가 즐겨 다루던 주제는 이른바 감성과 이성, 예술과 생활, 현실과 이상, 시민과 예술가,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으로 이름 지을 수 있는 모순된 두 세계의 대립이다. 이것은 넒은 의미로 본다면 독일문학 일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토마스 만에게는 온 생을 건 문제였다.
문학의 역사 속 고귀한 휴머니즘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어떤 청년이 산상 생활에서 겪는 내면적인 경험을 발판으로 전 유럽 세계를 그 속에 투시하고 있다. 주인공 카스토르프가 삶에 대해 새롭게 눈뜨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들기까지, 7년간 영혼의 기록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개인적 내면 기록이라기보다는 19세기 말의 퇴폐적인 경향에서 빠져나와 생의 긍정을 모색하려고 몸부림치던 유럽 사회의 기록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현대인들은 말세적인 절망과 환멸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것은 마치 토마스 만이 세기말적인 붕괴와 환멸의 절망감 속에서, 또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의 이중성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고뇌와 상통한다. 토마스 만은 일생 동안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토마스 만은 이제 흔들림 없는 명성과 존경을 온몸에 안고 세계 문학의 역사 속에 의연하게 서 있다. 가장 독일적이고도 가장 세계적인 문제에 천착했던 고귀한 작가로 남은 것이다. 그의 휴머니즘은 오늘날과 같은 혼돈과 혼탁의 세기에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토마스 만
1875년 북독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은 곡물상이자 시의회 의원이고, 어머니 율리아는 반은 포르투갈계이고 반은 크레올계인 남부 출신으로, 그는 아버지에게는 북독일적인 이성과 엄격한 도덕관을,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남국인의 정열과 예술적인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순〉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토마스 만의 유년 시절은 부유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회사가 정리되면서 가족들은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된다.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토마스 만은 일찍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1893년에는 산문 습작을 했으며, 자신이 발간하는 『봄의 폭풍우』지에 글을 기고했다. 토마스 만은 다니던 김나지움을 그만두고 가족이 이미 1년 전에 이주한 뮌헨으로 가서 화재 보험 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하지만, 곧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1895년에서 1896년까지 뮌헨 공과대학에서 미학, 예술 문학, 경제 및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시절, 김나지움 시절부터 이미 그를 사로잡았던 슈토름, 헤르만 바르, 폴 부르제, 헨리크 입센 등을 탐독하였고, 직접 『짐플리치시무스』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1년 첫 장편소설 『부르덴브르크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무렵 단편소설들을 모아 단편집『토니오 크뢰거』(1903)도 발표하였다.
1905년 뮌헨 대학교 수학 교수의 딸인 카타리나(카챠라는 애칭으로 불림) 프링스하임과 결혼하여 3남 3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토마스 만의 두 여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듯이, 아들 클라우스 만이 자살했고, 막내 미하엘 만도 신경안정제 과용으로 의문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다가 남편을 잃은 모니카 만은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12녀 폐병 증세가 있어 부인이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문병을 간 토마스 만은 그곳의 분위기와 그곳에 체류하는 손님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느낀 인상에도 매료되었는데, 이런 체험을 글로 쓰기 시작, 점점 방대해져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마(魔)의 산』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창작을 중단하고, 평론집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1918)과 같은 정치 평론을 발표했다. 전쟁 초기 독일 문화와 독일 시민 계층의 와해를 걱정하며 국수주의적 입장을 보이며 형 하인리히 만과 불화를 겪게 되지만, 평론「독일 공화국」(1922)을 통해 민주주의와 시민 계급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던 중 1929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1931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이후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작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33년 바그너 서거 50주년이 되던 날, 토마스 만은 뮌헨 대학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성〉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끝으로 그는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35년에는 나치 정권에 대해 공개 반박을 하기에 이르렀고,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어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기념 강연 청탁으로 16년 만에 독일 땅을 밟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토마스 만은 현실의 공산주의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인 사회적 평등을 존중했다. 그래서 구동독 정권에 대해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매카시 위원회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이에 환멸을 느낀 토마스 만은 1952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2일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 여행 중 발병하여 취리히로 되돌아와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역자 : 곽복록
일본 조치(上智) 대학교 독문학과 수학. 서울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독문학과 졸업(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독문학과 졸업(독문학 박사). 서울대학교?서강대학교 독문학과 교수 역임.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 한국괴테학회 초대회장.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역임. 지은책 『독일문학의 사상과 배경』 옮긴책 에커먼 『괴테와의 대화』 프리덴탈 『괴테 생애와 시대』 요한 볼프강 괴테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편력시대』 『친화력』 『헤르만과 도로테아』 『이탈리아 기행』 『시와 진실』 『괴테시집』 『괴테전집(12권)』 카를 힐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극의 탄생』 『즐거운 지식』 『권력에의 의지』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이 있다.
▣ 주요 목차
[컬러화보]
주요 인물
머리글
제1장 … 15
제2장 … 35
제3장 … 56
제4장 … 126
제5장 … 236
조화와 완성을 향한 의지
토마스 만은 독일문학사상 전환점에 선 작가이다. 그를 계기로 독일문학은 집대성되고 반성된다. 토마스 만 자체가 독일 문화의 장점과 단점을 자신 속에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니체, 쇼펜하우어, 바그너가 토마스 만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여러 이질적 요소를 모두 자기 속에 용해시켜 자신의 운명관으로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다.
토마스 만 문학의 특성은 한 마디로 조화와 완성을 향한 의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질식할 듯 무거운 19세기 말의 분위기 속에서 한 가닥의 구원을 모색하는 데 토마스 만처럼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작가도 드물다. 그의 일생은 정지된 생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생성의 길이었다. 80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참으로 완성을 위한 인내의 길이었다.
그는 성실하게 자기 자신과 그 시대 상황에 대해서 글을 써왔기 때문에 그의 산문들은 상당히 자전적인 요소가 짙다. 그가 즐겨 다루던 주제는 이른바 감성과 이성, 예술과 생활, 현실과 이상, 시민과 예술가,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으로 이름 지을 수 있는 모순된 두 세계의 대립이다. 이것은 넒은 의미로 본다면 독일문학 일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토마스 만에게는 온 생을 건 문제였다.
문학의 역사 속 고귀한 휴머니즘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어떤 청년이 산상 생활에서 겪는 내면적인 경험을 발판으로 전 유럽 세계를 그 속에 투시하고 있다. 주인공 카스토르프가 삶에 대해 새롭게 눈뜨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들기까지, 7년간 영혼의 기록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개인적 내면 기록이라기보다는 19세기 말의 퇴폐적인 경향에서 빠져나와 생의 긍정을 모색하려고 몸부림치던 유럽 사회의 기록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현대인들은 말세적인 절망과 환멸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것은 마치 토마스 만이 세기말적인 붕괴와 환멸의 절망감 속에서, 또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의 이중성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고뇌와 상통한다. 토마스 만은 일생 동안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토마스 만은 이제 흔들림 없는 명성과 존경을 온몸에 안고 세계 문학의 역사 속에 의연하게 서 있다. 가장 독일적이고도 가장 세계적인 문제에 천착했던 고귀한 작가로 남은 것이다. 그의 휴머니즘은 오늘날과 같은 혼돈과 혼탁의 세기에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토마스 만
1875년 북독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은 곡물상이자 시의회 의원이고, 어머니 율리아는 반은 포르투갈계이고 반은 크레올계인 남부 출신으로, 그는 아버지에게는 북독일적인 이성과 엄격한 도덕관을,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남국인의 정열과 예술적인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순〉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토마스 만의 유년 시절은 부유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회사가 정리되면서 가족들은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된다.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토마스 만은 일찍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1893년에는 산문 습작을 했으며, 자신이 발간하는 『봄의 폭풍우』지에 글을 기고했다. 토마스 만은 다니던 김나지움을 그만두고 가족이 이미 1년 전에 이주한 뮌헨으로 가서 화재 보험 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하지만, 곧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1895년에서 1896년까지 뮌헨 공과대학에서 미학, 예술 문학, 경제 및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시절, 김나지움 시절부터 이미 그를 사로잡았던 슈토름, 헤르만 바르, 폴 부르제, 헨리크 입센 등을 탐독하였고, 직접 『짐플리치시무스』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1년 첫 장편소설 『부르덴브르크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무렵 단편소설들을 모아 단편집『토니오 크뢰거』(1903)도 발표하였다.
1905년 뮌헨 대학교 수학 교수의 딸인 카타리나(카챠라는 애칭으로 불림) 프링스하임과 결혼하여 3남 3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토마스 만의 두 여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듯이, 아들 클라우스 만이 자살했고, 막내 미하엘 만도 신경안정제 과용으로 의문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다가 남편을 잃은 모니카 만은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12녀 폐병 증세가 있어 부인이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문병을 간 토마스 만은 그곳의 분위기와 그곳에 체류하는 손님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느낀 인상에도 매료되었는데, 이런 체험을 글로 쓰기 시작, 점점 방대해져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마(魔)의 산』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창작을 중단하고, 평론집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1918)과 같은 정치 평론을 발표했다. 전쟁 초기 독일 문화와 독일 시민 계층의 와해를 걱정하며 국수주의적 입장을 보이며 형 하인리히 만과 불화를 겪게 되지만, 평론「독일 공화국」(1922)을 통해 민주주의와 시민 계급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던 중 1929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1931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이후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작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33년 바그너 서거 50주년이 되던 날, 토마스 만은 뮌헨 대학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성〉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끝으로 그는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35년에는 나치 정권에 대해 공개 반박을 하기에 이르렀고,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어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기념 강연 청탁으로 16년 만에 독일 땅을 밟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토마스 만은 현실의 공산주의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인 사회적 평등을 존중했다. 그래서 구동독 정권에 대해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매카시 위원회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이에 환멸을 느낀 토마스 만은 1952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2일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 여행 중 발병하여 취리히로 되돌아와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역자 : 곽복록
일본 조치(上智) 대학교 독문학과 수학. 서울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독문학과 졸업(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독문학과 졸업(독문학 박사). 서울대학교?서강대학교 독문학과 교수 역임.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 한국괴테학회 초대회장.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역임. 지은책 『독일문학의 사상과 배경』 옮긴책 에커먼 『괴테와의 대화』 프리덴탈 『괴테 생애와 시대』 요한 볼프강 괴테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편력시대』 『친화력』 『헤르만과 도로테아』 『이탈리아 기행』 『시와 진실』 『괴테시집』 『괴테전집(12권)』 카를 힐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극의 탄생』 『즐거운 지식』 『권력에의 의지』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이 있다.
▣ 주요 목차
[컬러화보]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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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 15
제2장 … 35
제3장 … 56
제4장 … 126
제5장 …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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