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비루한 일상 속에 소멸해가는 자들의
권태롭고 그로테스크한 농담, 혹은 진담
‘나’와 ‘그’는 타인과 세상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관심이 없다. 자신이 아무런 필연성이나 연관의 고리 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고, 자신이 태어난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삶은 쳇바퀴 돌듯 되풀이되는 따분한 일상일 뿐이다. 그 권태 속에서 존재는 비루해지고 존재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존재는 서서히 소멸해간다. 그들은 조리에 닿지 않는, 서로를 무시하는, 상대방의 무시에 한술 더 뜨는 모욕으로 기어코 갚는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운명 같은 삶을 견딘다. 무의미하고 무관심한 삶을 견디는 방식으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말의 유희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고 골몰하고 싸우기를 반복한다. 이 지난한 과정은 하품이 날 만큼 지루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인생을 응시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다는 게 견딜 수 없는 사실은, 환멸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낳음으로써 그것이 곧 소설이자 인생이라는 역설을 일러준다. 인생 최고의 선물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삶은 권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끈덕지게 유지하려는 생존욕구는,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일탈 행위에서 다양한 선택의 문제를 내놓는다. 날씨에 대한 고려나 사람들에 대한 고려랄지 옷에 대한 고려 등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나’와 ‘그’의 대화에서 그저 우스꽝스럽게 표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자들은 지겨우리만치 시시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인즉슨 인간 심리의 한 극점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에 다다른다. 작가는 인간에 대해 참을성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야기한다.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지 새삼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같은 모습들을 대화의 연쇄로 제시함으로써, 작가는 인간의 근원이 바로 무서움이라고 말한다. 비루함, 사악함, 비정함, 창피함, 가벼움, 더러움, 지겨움, 그럼에도 삶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의 총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종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게 두려워 변화하지 않는 인간들은 숱한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는 무대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끈질기게 유지되는 삶이랄지 아무런 충격 없이도 완전히 무너져내릴 수 있는 허술한 삶 같은 것들 말이다. 삶의 의미는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 두려운 결말을 끝없이 지연시키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통찰은 허무해서 더 서늘하다.
세계의 붕괴 속에서, 단절이 아니라 소외를 견뎌내면서
고독한 자신을 증명해낸 다섯 작가들,
소설향 특별판
무심하게 다가오는 작은 폭력의 힘(『숲속의 빈터』),
언어와 서사의 무의미(『하품』),
본능적인 감각의 유혹과 허기(『아주 사소한 중독』),
타락과 파괴에 대한 치명적인 숙명(『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성장 없이 치르는 성년식(『죽은 올빼미 농장』).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창작하는 신진에서 원로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이 쓴 중편소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내는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러한 출판 기획은 중편소설의 현주소를 정리함으로써, 장편과 단편으로 편중되어 있던 한국 소설의 구획을 갱신하는 동기가 되었다. 실제로 단편이라는 지루한 반복을 벗어나고 싶은 일탈 욕구와 장편이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피하고 싶은 부담감은 작가들의 창작에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향 시리즈를 통해 출현한 수많은 중편소설들은 단순히 출판 경향의 변화만이 아니라 소설 문학의 내적 변화마저 시도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최윤의 『숲 속의 빈터』, 정영문의 『하품』,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 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에 새로운 옷을 입혀 내놓는 것은, 소설향 시리즈의 현재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번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특별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다섯 편의 소설은, 인간의 말초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체제의 붕괴로 ‘개인’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던 현대인의 내면을 분석하고(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 말과 이야기가 가진 허위에 눈뜨기 위해 수 없는 무의미에 집착하는 ‘개인’ 속의 ‘개인’을 찾는 장르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정영문의 『하품』). 또 정치와 사회와 이념의 무게에 짓눌려 외면해왔던 감각을 철저한 극단적인 폐허로 가는 파국(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혹은 감정과의 중독적인 관계(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로 드러내는가 하면, 일상의 사소한 변화가 주는 커다란 파문을 과거 역사와의 연결로 상징화(최윤의 『숲속의 빈터』)한다. 이처럼 다섯 편의 소설들은 각기 서로 다른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고 있으나, 저마다 역사의 이념적 무게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심리에 탐닉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만한 주요 한국 문학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추천사
『하품』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 그런데 그 대부분은 삶의 일상성을 모욕하는 듯한 대화, 그 결과 비루한 일상만이 드러나게 되는 대화들로 채워져 있다. 이 대화의 당사자들인, 한없이 비루해지고자 안간힘을 쓰는, 그럼으로써만 겨우 존재하는 이 ‘비루한 인간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비루한 인간들’은 우리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우리 속에 내재된 인간적 숙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불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포조와 럭키처럼. 운명과도 같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예정된 종말을 유예시키는 끝없는 대화는 그래서 계속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 도저한 흐름의 어느 높은 파고 위에『하품』이 있다.
- 손정수(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저 : 정영문
독특하고 실험적인 글쓰기로 죽음과 구원, 존재의 퇴조 등 인간 본연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온 작가다.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정영문은 1963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작가세계」 겨울호에 실린 장편소설 『겨우 존재하는 인간』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1999년 『검은 이야기 사슬』로 12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 『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꿈』 『목신의 어떤 오후』, 중편소설 『하품』 『중얼거리다』, 장편소설 『핏기 없는 독백』 『달에 홀린 광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페르마타』, 『복스』, 『돈 안 드는 마케팅』, 『미스터 에버릿의 비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4의 규칙』, 『인간들이 모르는 개들의 삶』,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 『호박방』, 『에보니 타워』, 『젊은 사자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 『존 싱어 사전트와 마담X의 추락』,『가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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