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숲속의 ‘빈터’,
결코 메워질 수 없는 ‘마이너스’의 의미
무엇이 우리의 삶을 흔드는가? 예기치 않은 타인이 출현할 때이다.『숲속의 빈터』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들어오는 낯선 타인과 관계의 영역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한 남자의 출현은 부부의 삶에 조금씩 균열을 가한다. 숲속 건너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부부에게 유령처럼 취급당하지만 이 허구의 존재는 점차 부부의 일상에 가시화된다. 그리고 허구의 존재가 실재하는 인간으로 드러나면서 일상을 흔들었던 문제는 리얼한 공포가 된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사소한 일상의 회복이다. 갈라진 틈새를 메우고 손질하는 복구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의지로 귀결된다. 숲속의 빈터에 전나무를 심기로 한 것이다. 추위에 잘 견디며 숲을 이루는 전나무는 일상의 공포를 상쇄하는 푸른 상징이다. 그들이 단 하나 바랐던 목욕탕이 있는 삶은 일상의 안락, 평범한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타일이 붙여지지 않은 시멘트벽과 바닥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숲속의 빈터를 연상시킨다.
이제 빈터는 채워야 할 추한 공간이 된다. 부부는 희망이랄 것도 없는 나무 심기 계획을 세우며 현재의 목욕탕이 주는 안락함을 더는 열망하지 않는다. 도시를 피해 정착한 숲속 마을조차도 이제는 둘만의 안락한 공간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은 자못 비극적이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은 자신만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부부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우연이었으며, 마을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 또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에서 일상에 내재된 폭력과 공포의 심각성을 체감하게 되는 것도 이 소설의 구조적 특징이다. 이 빈터는 전나무로 메꾸어야 할 공간이 되지만 결코 메꿀 수 없는 마이너스로서의 빈터이기도 하다는 이중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원점으로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빈터라는 점에서 아직 푸른색의 타일만큼 희망은 존재한다. 물론 그 희망은 절반짜리에 불과하다. 절반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폭력의 역사이며 나머지 절반은 심은 전나무들이 푸르게 숲을 이루게 될 미래의 몫인 것이다.
세계의 붕괴 속에서, 단절이 아니라 소외를 견뎌내면서
고독한 자신을 증명해낸 다섯 작가들,
소설향 특별판
무심하게 다가오는 작은 폭력의 힘(『숲속의 빈터』),
언어와 서사의 무의미(『하품』),
본능적인 감각의 유혹과 허기(『아주 사소한 중독』),
타락과 파괴에 대한 치명적인 숙명(『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성장 없이 치르는 성년식(『죽은 올빼미 농장』).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창작하는 신진에서 원로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이 쓴 중편소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내는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러한 출판 기획은 중편소설의 현주소를 정리함으로써, 장편과 단편으로 편중되어 있던 한국 소설의 구획을 갱신하는 동기가 되었다. 실제로 단편이라는 지루한 반복을 벗어나고 싶은 일탈 욕구와 장편이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피하고 싶은 부담감은 작가들의 창작에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향 시리즈를 통해 출현한 수많은 중편소설들은 단순히 출판 경향의 변화만이 아니라 소설 문학의 내적 변화마저 시도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최윤의 『숲 속의 빈터』, 정영문의 『하품』,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 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에 새로운 옷을 입혀 내놓는 것은, 소설향 시리즈의 현재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번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특별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다섯 편의 소설은, 인간의 말초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체제의 붕괴로 ‘개인’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던 현대인의 내면을 분석하고(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 말과 이야기가 가진 허위에 눈뜨기 위해 수 없는 무의미에 집착하는 ‘개인’ 속의 ‘개인’을 찾는 장르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정영문의 『하품』). 또 정치와 사회와 이념의 무게에 짓눌려 외면해왔던 감각을 철저한 극단적인 폐허로 가는 파국(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혹은 감정과의 중독적인 관계(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로 드러내는가 하면, 일상의 사소한 변화가 주는 커다란 파문을 과거 역사와의 연결로 상징화(최윤의 『숲속의 빈터』)한다. 이처럼 다섯 편의 소설들은 각기 서로 다른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고 있으나, 저마다 역사의 이념적 무게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심리에 탐닉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만한 주요 한국 문학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추천사
『숲 속의 빈터』는 현재를 움직이는 규칙은 과거에 있으며 그런 한에서 과거, 또는 현재가 완료되는 것은 미래 속에서라는, 그리고 그 움직임의 동선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깔끔한 소설이다. 우리의 과거는 미래에만 완성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알리바이는 미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형태로 다가올지 모르는 과거의 폭력성은 미완의 과거 속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살아온 지난 과거에 달려 있다. 그 시간적인 메워짐의 의미를 빈 공간, 빈터로 치환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공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혼재성과 삶의 구멍, 우연성 등을 구체화시키려는 작가적 의도의 소산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지 못한 삶의 어쩔 수 없음, 그리고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지속되는 과거의 폭력성, 우연하게 다가오는 공포스러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 최성실(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저 : 최윤
아름다운 문체로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 소설을 쓰는 소설가 겸 번역가.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최현무이다. 1966년 경기여중과 1969년 경기여고를 거쳐 1972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교지 편집을 했으며, 1976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78년 첫 평론 「소설의 의미구조분석」을 『문학사상』에 발표하고, 이후 5년간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의 프로방스대학교에서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1983년 귀국하여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다. 『벙어리 창(唱)』(1989) 『아버지 감시』(1990) 『속삭임, 속삭임』(1993) 등은 이데올로기의 화해를,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 『회색 눈사람』(1992)은 시대적 아픔을, 『한여름 낮의 꿈』(1989)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1991) 『푸른 기차』(1994) 『하나코는 없다』(1994) 등은 관념적인 삶의 의미를 다룬 작품으로서 그의 소설은 다분히 관념과 지성으로 절제되어 남성적인 무게를 지닌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은 언어에 대한 탐구이면서 현실에 대한 질문이고, 그 질문의 방식을 또다른 방식으로 질문하는 방식이다. 그는 우리를 향해 여러 겹의 책읽기를 즐기라고 권유한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를 따라가는 독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작은 부분들을 여러 층으로 쪼개서 그 이야기 전체의 의미를 독자 스스로가 완성하기를 기대한다. 그의 소설들을 즐기는 방법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사건의 선후관계를 의식 속에서 따라가는 것보다는 그 소설의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 박혀서 보석처럼 빛나는 실존에 대한 통찰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화자는 그 이야기 속의 상황과 운명을 이끌어가는 영웅적 능동성을 지니기보다는, 그 소설을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관찰자적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바로 그 화자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할 때도 그 어조는 섬뜩하리만큼 냉정하다. 그 같은 냉정함은 현란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최윤 특유의 수사학에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려진 미학의 위엄을 보여준다.
한편 최윤이 전통적 기법의 틀을 벗어나 다채로운 소설 문법을 시도하는 작가이면서도 유종호, 이어령 등의 대가급 평론가들로부터 이상적 단편소설의 전범으로 불리는 작품을 내놓은 것은 그의 소설론이 전통과 실험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문학교수와 문학비평가로도 활동하며, 이청준의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는 등 번역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1992년 『회색 눈사람』으로 제2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제1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작품집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1991)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92) 『속삭임, 속삭임』(1994) 『겨울, 아틀란티스』(1996) 등이 있고, 산문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199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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