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짧고도 빛났던 생의 한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들의 좌충우돌 세상 분투기!
꿈 많고 호기심 넘치는 대구 정화여고 2학년 ‘정희’의 열여덟은 상실의 연속이다. 미팅 자리에서 마음에 들었던 남자아이를 모범생인 줄로만 알았던 친구 ‘언주’에게 뺏기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에서 ‘혜주’가 전학을 온다. 서울 말씨를 쓰고, 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시도 잘 쓰는 혜주에게 묘한 선망의 감정과 함께 질투심을 느끼는 정희. 놀러 간 계성고 [문학의 밤] 행사에서 정희는 폴 매카트니를 닮은 ‘진이 오빠’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런데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는 것일까. 혜주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이 오빠와 각별한 관계인 듯한데……. 그럼에도 정희는 열병 같은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그 무렵, ‘자갈마당’이라 불리는 정희의 동네에서 심심찮게 범죄가 발생하며 동네 분위기가 흉흉해진다. 정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의류 공장 여공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일도 발생한다. 어느 날부턴가 혜주도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혹시 혜주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절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변덕스러운 삶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뒤통수를 치고 달아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소녀는 자란다.
세상이 우리의 갈망에 순순히 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가정 그리고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던
70년대 십대 소녀들의 폭력과 억압에 관한 이야기
은자는 머리의 반도 다 감지 못하고 교련탱이가 “그만!” 하고 소리치자 그만 붕대를 바닥으로 뚝 떨어뜨렸다. 하얀 붕대가 바닥에 떨어져 풀리며 길게 나신을 드러냈다.
“이게 뭐꼬? 이것도 제대로 못하나? 응?”
교련탱이는 거칠게 소리치며 다가왔다. 은자의 따귀를 때렸다. 은자의 뺨이 발갛게 부풀어 오른다. 귀까지 발갛다. 은자가 약간 비틀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귓속에 벌통이 있는 것처럼 윙윙거린다.
- 165쪽
작가는 『란제리 소녀시대』를 통해 명랑한 여고생들의 일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폭력’의 상황들을 정밀하게 복원해낸다. 작품은 정치사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던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소녀들의 감성과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제목의 “란제리”가 의미하는 바는 이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소녀들에게 세상이란 그들을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들을 옥죄도록 기능하는 하나의 란제리 같이 작동되었다.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는 ‘새총 체벌’, 교련 수업, 생리 기간 중임에도 아랑곳없이 가해지는 몽둥이찜질 등 사춘기 여고생들의 몸과 마음에 가해지던 폭력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정희와 혜주를 비롯해 친구들에게 가해지던 폭력과 억압의 양상은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정신적인 차원에서 더욱 심화된다. 소녀들과 세상을 불화하게 하는 것은 바로 ‘훈육’과 ‘통제’였다. 소녀에서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차가운 곳에 앉아도 안 됐고 자전거를 타서도 안 됐다. 남진에게 티 나게 열광해서도 안 됐고 남학생과 영화를 보러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소녀들은 세상을 누리기를 열망했지만 그들이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미용실에 놓여 있는 〈선데이 서울〉을 몰래 훔쳐보거나 문학작품 혹은 음악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소녀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과 여자가 된다는 것은 다르다. 소녀는 훈육과 통제 안에서 ‘여자’가 된다. 훈육과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면 누구라도 한번 들어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두운 연못 속에 빠지고 만다. 삶의 폭력이 부당하다고 소리쳐 말할 수도 없다. 폭력은 또 다른 2차 폭력을 가져올 뿐이니까. 소녀들에게 삶은 훨씬 변덕스럽고 심술궂다.
- 277쪽
작가가 구사하는, 솔직하면서도 발칙하기까지 보이는 내러티브의 힘은 단순히 그 시절을 거쳐왔던 특정한 세대를 뛰어넘어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소구력을 지니게 한다. 그 결과 진지함과 재미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매력적인 성장소설 한 편이 탄생했다. 부모 세대에겐 그 시절의 향수를 되새겨볼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해줄 것이며, 자식 세대에게는 변화된 세태나 젠더 지위를 비교해보는 재미, 그리고 부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작가 소개
저 : 김용희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평론 「생명을 기다리는 공격성의 언어: 김기택론」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평택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평론집 『천국에 가다』 『페넬로페의 옷감 짜기-우리 시대 여성 시인』, 영화평론집 『천 개의 거울』, 문화평론집 『기호는 힘이 세다』 『우리시대 대중문화』, 해설시선집 『꿈이었을까』, 연구서 『정지용 시의 미학성』 등이 있다. 첫 장편소설 『란제리 소녀시대』로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추천됐으며 김환태비평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삼십대 비정규직 여성이 조직사회에서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권력과 폭력, 일상과 사랑의 문제를 코믹하면서도 스릴감 있게 그려낸 『화요일의 키스』, ‘쿨’ 세대인 1970년산, 1980년산 세대들의 엽기와 잔혹, 동성애와 그로테스크한 피의 한 풍경을 전달하는 『쿨 & 웜』 등 꾸준한 작품활동도 함께 병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목 차
말괄량이의 시대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새들은 밤에 어떤 잠을 자나
에필로그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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