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텔레니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사랑을 꿈꾸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이 세상 어떤 여자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저는 여자를 전혀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_본문 31쪽
프랑스의 젊은 사업가 카미유는 어느 날 자선 연주회에서 잘생긴 헝가리계 스물네 살 피아니스트 텔레니의 연주를 듣던 중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한다. 텔레니의 연주는 “사람을 광기에 몰아넣어 죄악을 저지르게 하는 강력한 사랑”을 느끼고 싶게 만들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위해 나일강에 투신한 그리스인 노예 안티누스의 환영, 소돔과 고모라의 환영을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카미유에게 강렬한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연주가 끝난 뒤에 대기실에서 만난 수수께끼 같은 피아니스트는 그를 유혹하며 알 듯 말 듯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그날 이후 카미유는 가라앉지 않는 열병을 안고 밤낮으로 텔레니의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텔레니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카미유는 점점 더 속이 타들어만 간다. 카미유는 다른 여자를 사랑해보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에 텔레니를 마주치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텔레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텔레니를 보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빨개졌습니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가슴이 터질 듯 심장이 마구 쿵쾅대기 시작했습니다. 제 굳은 결심이 다 무너지는 것을 잠시 느끼다가, 이토록 나약한 자신을 증오하며 모자를 홱 낚아채 텔레니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미치광이처럼 뛰어나갔습니다. 제 이상한 행동에 대한 사과는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 제가 여전히 사랑하는 그 사람?네, 저 스스로를 속이려 하거나 문제를 얼버무리려 하는 것은 이제 소용없었습니다?에게 제가 한 행동을 얼마나 뼈아프게 후회하는지, 제 생각이 어떤지, 어머니는 알 리 없었죠. 네, 저는 텔레니를 더욱더 사랑했습니다. 착란에 빠질 만큼 사랑했습니다.” _본문 143∼144쪽
어려서부터 남자들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동성애를 ‘잘못’된 것이자 죄악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금기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왔던 카미유는 이 순간부터 본인의 성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텔레니와의 위험한 관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그는 텔레니를 쫓아 뒷골목을 정처 없이 헤매다가 파트너를 찾아 떠돌던 동성애자들에게 유혹을 받는 등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그 당시 동성애 문화의 민낯을 낱낱이 경험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텔레니와 카미유, 두 사람의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가고, 한 걸음 한 걸음 극적인 결말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다.
위선과 가식을 버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가장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모두를 속이는 일입니다. 저는 제가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체질이 잘못된 것이지, 제 자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_본문 83쪽
『텔레니』는 카미유가 정체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어느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청자가 간혹 카미유에게 질문을 하고, 카미유는 거기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카미유의 목소리를 통해 특수하거나 보편적인 ‘악’으로 규정하여 묵살해온 동성애는 침묵을 깨트리고 겉으로 드러나 공론화된다.
“저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인간이 지옥으로 만든 이 천국을 저주했습니다. 위선 위에서만 번성하는 편협한 우리 사회를 저주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모조리 거부권을 행사하며 망치는 우리 종교를 저주했습니다.” _본문 159쪽
카미유는 극악한 죄인으로 낙인찍힌 동성애자들이 “안개 속 한밤의 산책”을 벌이는 실태, 귀족층 사이에 만연한 퇴폐적인 동성애 난교 문화를 까발리며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회의 위선을 신랄하게 꼬집고, 또 한편으로는 텔레니를 만남으로써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사랑의 감정과 성적 결합을 자세히 묘사하며 텔레니와 마치 한 몸이 된 듯한 기쁨을 감격스럽게 전한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죄를 저지른 것처럼 진저리치던 카미유의 변화와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물음, “누가 제정신이고 누가 미쳤나요? 지금 이 세계에서 누가 고결하고 누가 저열한가요?”, “왜 우리는 천사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하나요?”라는 외침이 오늘날에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은 없다
『텔레니』에는 빅토리아 시대에 내재화된 동성애 혐오와 동성애자가 겪어야 했던 억압 속에서 비밀스럽게 형성된 게이 커뮤니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익명으로, 소수의 독자를 위해 출판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솔직하고 과감하게 당시의 시대상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 소수자인 화자가 극도의 억압, 금지, 존재의 부정, 침묵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텔레니』의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강간, 여성 비하, 여성 신체에 대한 혐오, 사디즘, 매독, 자살, 귀족층의 남성 동성애 난교 심포지엄 등 지금 읽기에는 거슬릴 수 있는 표현이 눈에 띄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혐오’와 ‘비하’가 비단 빅토리아 시대만의 특성은 아닐 것이다. 책에 담긴 카미유의 외침이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단순히 재미를 넘어서는 공감대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아마 이런 시대상이 지금 독자를 끌어들이는 요소이기도 할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동성애의 모습은 과연 어땠는지, 오늘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할 테니까.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이 머릿속에 남지 않을까. 그것이 앞으로도 이 소설이 사랑받을 이유일 것이다. _「옮긴이의 글」 중
작가 소개
저 :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뛰어난 구술가이자 당대를 호위한 유미주의자.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와일드는 아일랜드 출신의 다른 유명 작가, 예를 들면 예이츠나 버나드 쇼 등과 마찬가지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았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즉 자못 엄격해 보이는 도덕주의, 위선적인 진지함과 엄숙함이 대중의 삶을 억누르던 시대에 와일드는 내면의 개인주의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본성을 찾고자 했다. 이런 그의 기질은 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외양으로도, 그리도 작품으로도 드러났다. 젊은 시인인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한바탕 동성애 사건뿐만이 아니더라도 남자들이 검은색과 회색 옷만을 걸치고 다니던 시절 그는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으며 머리는 치렁치렁 길게 기르고 단춧구멍에는 초록색 꽃을 꽂고 다녔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상류층과 어울리면서도 그가 내적으로 추구한 것은 결국 〈멋〉 아니면 〈미(美)〉였다. 그는 뛰어난 구술사로 수많은 경구가 가득한 희곡을 남겼고, 강연에도 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1854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시인인 어머니와 유명한 의사이자 민속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유미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888년 단편집 『행복한 왕자』를 발표했고, 1891년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2년에는 단편집 『석류나무 집』을 발표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발표 당시 격론을 일으켰으며, 특히 『행복한 왕자』는 19세기 말 물질주의가 만연한 영국 사회에 사랑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이상주의를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작품으으로, 비평가 월터 페이터로부터 동화 중의 걸작이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독설과 위트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탁월한 말솜씨로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진지함의 중요성』(1895) 같은 희곡으로 극작가로서 위상을 다졌으며, 1893년에는 비극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1895년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옥중기』를 썼다. 1897년에 출옥하여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900년에 사망했다.와일드의 명예는 사후 거의 백 년이 지난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회복되었으며, 이후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역 : 조동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영화학과 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이매진』 수석기자, 「야후 스타일」 편집장을 지냈으며, 현재 번역가와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파리에 간 고양이』,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 『마술사 카터, 악마를 이기다』, 『브로크백 마운틴』, 『돌아온 피터팬』, 『순결한 할리우드』, 『가위 들고 달리기』,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일상 예술화 전략』, 『매일매일 아티스트』, 『아웃사이더 예찬』, 『심플 플랜』,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스피벳』, 『보트』, 『싱글맨』, 『정키』, 『퀴어』,『대지의 선물』,『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비트레이얼』등이 있으며, 함께 지은 책으로 『소울 푸드』가 있다.
목 차
텔레니
텔레니 7
옮긴이의 글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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