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한 명의 훌륭한 인간으로 남아 굶어 죽을 것인가
짐승의 무리가 되어 하루를 더 살 것인가
대재앙 이후의 생존법에 대한 거대한 사고실험
『풀의 죽음』은 도시와 문명사회의 파괴 이후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냉정한 태도로 ‘시뮬레이션’ 한다. 영국 정부는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 바이러스가 소멸하기를 기다리며 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안심시키지만, 영국까지 질병이 확산되자 태도가 돌변하여 계엄을 선포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인구수를 강제적으로 줄이기 위해 주요 도시에 핵폭탄 사용을 계획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왕족과 부자, 정치인 들만 안전한 나라로 몰래 피신한다. 국가가 국민을 버린 상황에서 영국인들은 기존의 사회 규범과 도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무리를 지어 행동한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몰래 런던을 탈출한 존 커스턴스와 친구 로저, 폭력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무법자 피리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잉글랜드 북서부로 향하는 일행의 여정은 영국 근대문학의 선구인 존 버니언의 소설 『천로역정』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천로역정』의 주인공이 ‘하늘의 도시’로 향하는 여정에서 구원을 얻는 것과 달리, 『풀의 죽음』 속 존 커스턴스는 형의 농장으로 가는 길에 기존의 가치관을 버리고 혹독한 자연과 투쟁하던 시절의 인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생존을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행동이다. 존 크리스토퍼는 인간이 문명인다운 모습으로 선량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안정되고 신뢰 가능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구성원의 존엄을 보호하는 것 또한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전염병, 환경 파괴, 식량 부족의 시대
인류가 새겨들어야 할 지구의 목소리
『풀의 죽음』은 ‘먹을 것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식량이 줄어들자 엄청난 수의 동물과 인간이 굶주림으로 죽어나간다. 치료법을 금방 찾을 거라던 과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해 세계를 초토화시킨다. 작가 존 크리스토퍼는 1950년대에 이미 자연을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과학 기술의 발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미래 문제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문제에 대한 영국인의 안이한 현실 인식과 이기주의를 건조하고 냉소적인 어조로 비판했다.
작가 겸 평론가인 로버트 맥팔레인은 2009년 재간된 『풀의 죽음』 서문에서, 존 크리스토퍼가 『파리대왕』(1954)의 작가 윌리엄 골딩처럼 “19세기 제국주의의 끈질긴 유산인 감상적인 발상” 즉 “영국 예외주의”에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음을 언급한다. 또한 이 책이 “전염병의 시대”를 사는 인류가 “곡식에 감염되는 바이러스”로 곤란을 겪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 책, 환경 파괴와 내성을 갖춘 세균과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의 등장이 상상이 아닌 실재하는 위협이 될 것임을 “섬뜩하리만치 정확하게 예견한 과학소설”이라고 극찬했다.
작품이 발표된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인류는 70억 인구가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보유한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하루 6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최악의 식량 부족 시대를 겪는 중이다. 또한 이상 기후로 인한 생태계 파괴, 동식물의 멸종 등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풀의 죽음』이 ‘미래의 문학’으로 기능하는 것은, 우리가 지난 세기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 소개
저 : 존 크리스토퍼
John Christopher
본명은 샘 유드. 1922년 4월 잉글랜드 랭커셔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평범한 성적으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지역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 록펠러 재단에서 애틀랜틱 문학 기금을 지원받아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본명으로 주류 소설을 쓰는 한편 윌리엄 고드프리, 윌리엄 바인, 힐러리 포드 등 장르에 따라 필명을 바꿔가며 50여 편이 넘는 소설을 발표했다. 존 크리스토퍼는 주로 SF 장르를 발표할 때 쓰던 필명으로, 『풀의 죽음』(1956)은 『혜성의 해』(1955)에 이어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다. 크리스토퍼는 SF와 고전 영문학의 양식을 결합하고, 사회 비판과 미래의 재앙에 대한 통찰력 있는 경고를 담은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런던을 배경으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놓인 인간을 대상으로 한 사고실험이라는 점에서 동시대에 발표된 존 윈덤의 『트리피드의 날』과 함께 언급되지만,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쪽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다양한 필명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그는 「트라이포드 3부작」(1967~1968)을 발표하며 청소년 문학 작가로도 사랑받았다. 이후 『피부의 주름』, 『겨울 세계』, 「영혼의 칼 시리즈」를 집필했고, 1971년 『보호자』로 가디언상 아동소설 부문, 독일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1984년에는 트라이포드 3부작이 BBC 드라마로 각색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풀의 죽음』은 2007년 북파인더가 뽑은 ‘영국 최고의 절판본 10’에 선정되었다. 2012년 2월 서머싯 배스에서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역 : 박중서
출판기획가 및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저작권센터(KCC)에서 근무했으며, ‘책에 대한 책’ 시리즈를 기획했다. 옮긴 책으로는 『언어의 천재들』,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영어 수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아주 짧은 세계사』, 『생각의 힘을 실험하다』, 『해부학자』, 『모뉴먼츠 맨』, 『식량의 세계사』, 『생각의 완성』, 『선택의 과학』,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지식의 역사』,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런던 자연사 박물관』, 『신화와 인생』, 『끝없는 탐구』,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아스테리오스 폴립』, 『에식스 카운티』, 『지미 코리건』,『피터 팬과 웬디』,『 너는 특별하지 않아』 등이 있다.
목 차
풀의 죽음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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