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꿈처럼 기이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그림들
‘그림책 작가’가 본업인 사노 요코의 진면목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는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일러스트가 함께 수록되었다.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의 휘갈긴 선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은 꿈속에서 어지럽게 펼쳐지는 이미지처럼 몽롱하고 애달프다. 한편 「그저 돼지지만」에서는 페이지마다 우산을 손에 든 채 무심하게 자리를 차지한 동물들이 편견과 위선이 가득한 인간들을 조롱하는 듯 웃는다. 「이쪽 돼지 저쪽 돼지」의 그림들은 사노 요코 사후 아들이 발견한 것으로, 이야기 전반에 걸친 불안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최근 사노 요코의 산문집들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녀의 산문가적 면모가 더 부각되었지만, 그녀는 돼지를 그리기 위해 돼지 농가에서 몇 시간이나 돼지 사진을 찍으며 관찰하고, 아들과의 그림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만큼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글만큼 뛰어난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투박한 듯 기묘하고 차가운 그림으로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게 만든다.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에 수록된 여러 화풍의 그림과 함께 독자들은 그녀가 구축한 환상적인 세계로 더욱 깊이 들어설 수 있? 것이다.
그날 밤, 돼지는 침대 위에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돼지가 밍크코트를 입어도 되나?”
돼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토끼가 밍크코트를 입어도 되나?”
돼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쪽 돼지 저쪽 돼지」, 『사노 요코 돼지』 63쪽
스러지는 생명에 눈물짓는 따뜻한 시선
몽상과 리얼리티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상상력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경험이 있던 사노 요코는 주로 우리 일상생활에 깔린 삶과 죽음을 이야기해왔다.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의 후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을 반추하며 함께한 의자들에 대한 단상을 기록하는데, 글의 끝에서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스러져간다. 갖가지 운명이 찾아와 이윽고 사라져간다”라며 낡아 없어지는 것들, 용도를 다해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표한다. 의자와 고릴라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생의 마지막 여행을 함께 떠난다는, 얼핏 기괴해 보이는 이야기에 생과 죽음의 순간을 절묘하게 녹여내는 사노 요코의 솜씨는 실로 정교하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이야기를 통해 ‘몽상’과 ‘리얼리티’의 경계를 허문다.
“죽어서까지 시끄러운 놈이군. 너, 요란하게 다 타버렸잖아. 조용히 좀 해.”
죽은 고양이가 투덜거렸다.
“있는 힘껏 산 거야.”
“있는 힘껏 죽어 있는 거냐.”
“난 아주 짧게 살았던 것 같아. 새처럼, 꽃처럼. 정말 멋졌는데. 난 다시 한 번 새하얀 손수건이 되어도 똑같이 살 거야. 새처럼, 꽃처럼.”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 『사노 요코 고릴라』 56쪽
「그저 돼지지만」은 서른 마리의 의인화된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 책 원서의 편집자는 “이 작품을 어떤 장르로 분류해야 할지” 곤혹스럽다고 토로하며 “동물들의 박물지” 정도가 적당할 것이라 말한다. ‘동물 아포리즘’처럼 느껴질 만큼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단상과 반복을 통해 리듬을 살린 것, 짧고 서정적인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것까지, 사노 요코는 서른 마리 동물의 제각각인 단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동물에 관해 자유롭게 쓴 「그저 돼지지만」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사노 요코의 유쾌하고 따뜻한, 그리고 재치와 독설이 가득한 문장들을 접할 수 있다.
질투로 똬리를 트는 뱀과 마주치면, 늙은 토끼조차 젊은 아내가 아들들의 가정교사와 사랑의 도피를 떠난 먼 옛날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슬픔으로 나뭇가지에 축 늘어진 뱀을 보면, 여태껏 진정한 슬픔에 부닥친 적 없는 곰은 언젠가 다가올 슬픔 때문에 두려움이 생겼다.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그저 돼지지만」, 『사노 요코 고릴라』 124-125쪽
작가 소개
저 : 사노 요코
Yoko Sano,さの ようこ,佐野 洋子
일본의 작가, 에세이스트, 그림책 작가. 1938년 중국의 베이징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불화, 병으로 일찍 죽은 오빠에 관한 추억은 작가의 삶과 창작에 평생에 걸쳐 짙게 영향을 끼쳤다.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백화점의 홍보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1966년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 베를린 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 1971년 그림책 작가로 데뷔했다. 일본 그림책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비롯해 『아저씨 우산』『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등 수많은 그림책과 창작집, 에세이집을 발표했다. 그림책으로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 고단샤 출판문화상, 일본 그림책상, 쇼가쿠간 아동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어렸을 적 병으로 죽은 오빠를 다룬 단편집 『내가 여동생이었을 때』로 제1회 니미 난키치 아동문학상, 만년에 발표한 에세이집 『어쩌면 좋아』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수상했다. 2003년 일본 황실로부터 자수포장을 받았고, 2008년 장년에 걸친 그림책 작가 활동의 공로로 이와야사자나미 문예상을 받았다. 2004년 유방암에 걸렸으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하고도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시즈코 씨』『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등 말년까지 에세이집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2010년 11월 5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만 7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역 : 이지수
고려대학교와 사이타마대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학을 공부했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번역자로 전향했다. 텍스트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옮기는 번역가가 되기를 꿈꾼다. 옮긴 책으로는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자식이 뭐라고』 『내 생에 마지막 그림』 『니체의 인간학』 『아주 오래된 서점』 등이 있다.
목 차
후기 …… 66
그저 돼지지만 …… 69
토끼 …… 71
여우 …… 75
캥거루 …… 76
잠자리 …… 79
염소 …… 81
벌 …… 84
거북 …… 86
개 …… 89
십자매 …… 91
악어 …… 93
말 …… 95
펭귄 …… 97
고래 …… 99
닭 …… 101
박쥐 …… 103
판다 …… 105
곰 …… 109
하마 …… 110
기린 …… 112
물고기 …… 114
코끼리 …… 117
고양이 …… 118
벌레 …… 120
개구리 …… 123
뱀 …… 124
올빼미 …… 127
원숭이 …… 129
사자 …… 131
매미 …… 135
돼지 …… 136
후기 …… 139
해제 혹은 편집후기 …… 141
옮긴이의 말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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