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기억의 갈라진 실금 아래서
생이 마련해둔 함정 속에서
비밀을 가둔 채 영원히 반복되는 단 하루의 밤
김인숙 소설의 새로운 색채는 「델마와 루이스」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델마와 루이스」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의 두 자매가 가출을 감행하여 바다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목에서 보듯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소설은 영화와 달리 두 주인공을 노인으로 설정함으로써 노년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델마와 루이스가 중년의 식당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을 만나 이뤄내는 여러 세대 여성들 간의 유쾌한 연대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델마와 루이스의 자식들은 노년의 일탈을 황당해하기만 할 뿐 이들이 왜 가출했는지는 영영 알지 못하고, 소중한 비밀을 간직한 자매의 마지막 여행은 우리에게 뭉클한 여운으로 남는다.
삶이 함정처럼 감춰둔 비밀은 때로 스릴러의 문법을 통해 선연하게 폭로된다. 「빈집」은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증오심을 느끼곤 하는 한 여자가 그럼에도 삶을 그러안기로 결심하는 결말 뒤에 남편의 충격적인 비밀을 덧붙인다. 여자가 본 남편의 모습은 극히 일부일 뿐이며, 남편이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 소설은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비밀의 무한성을 독특한 공간으로 형상화하면서 비밀에 의해 일상이 유지되는 역설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토기박물관」은 영어학원에 같이 다니는 나이든 여성 ‘미라’와 ‘제니’가 어느 오후 우연히 토기박물관의 전시를 관람하게 된다는 단순한 줄거리로 요약되지만, 읽다보면 곧 정밀하게 계산된 구성임을 체감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노년 여성의 가벼운 히스테리처럼 읽고 지나온 문장들이 어느새 사랑과 고독의 증세로 다시 읽히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별다를 것 없던 일상이 일순 긴장으로 조여지는 순간을 작가는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때로는 ‘기억의 착란’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활용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겉으로는 명확한 기록으로 정리될 수 있지만, 그 내면에서는 주관적이고 불완전한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기록과 기억이 상충하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인간은 얼마나 처참히 무너지게 되는가. 「넝쿨」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성폭행 생존자 ‘형윤’의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불러온다. 형윤에게 그날의 기억은 착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증거와 기록은 그녀가 범인을 잘못 지목했다고 말한다.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며 기억 속 범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눈을 홉뜨는 형윤의 표정은 삶을 견디는 일의 그악스러움에 대한 절절한 비유다.
너무나 사소한, 그래서 비루하기까지 한,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 쓸쓸함에 대하여
『단 하루의 영원한 밤』에서 김인숙은 일상 속에서 발견한 비일상의 조짐에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의 이러한 시도들이 일상에서 비롯되어 결국에는 보통의 삶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표제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에는 노쇠하여 정신이 점차 혼미해져가는 노교수가 등장한다. 삼십 년 전 어느 하루의 일탈로 제자에게 사생아를 낳게 한 뒤, 제자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야 했던 모욕과 평생을 싸워온 그에게 남은 기억은 이제 삼십 년 전 그날 하루뿐이다. “최후의 생존을 위해 남겨놓을 수 있는 만큼만 남겨놓은” 그 기억을 붙든 채 노교수는 희미한 숨을 쉬고 있다. 하필 그 하루를 남겨놓게 만든 것은 그리움일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창피함일까. 삶을 감내하다가 결국 스러져가는 노교수를 지켜보는 또다른 제자 ‘그’의 삶에도 창피하고 모욕적인 순간들이 얼룩처럼 묻어 있다. 어느 밤, ‘그’는 자신의 삶과 노교수의 삶을 겹쳐 보기 시작한다. 생의 통증을 느낀 그 밤이 노교수의 마지막 기억처럼 사는 동안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자신은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지만 이런 쓸쓸한 깨달음은 창피와 모욕과 삶이 내리는 온갖 형벌을 감내하며 주어진 생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문득 찾아오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니겠지만 나만의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만큼은 특별한, 비밀스러운 깨달음. 그러니 디테일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김인숙이 쓰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무리 비루하고 구차할지라도, 모든 인생은 특별한 비밀 하나쯤 품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들. 그건 숱한 인간사를 응시해온 작가가 이 무심한 듯 다정한 소설들로 우리를 위로하는 방식이 아닐까.
*
내게 이 소설들은 시간이다. 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 거기, 멈춰 있는 것. 조용한 문장을 쓰고 싶었으나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지 못할 때가 많았다. 혼자 쓰는 글보다 혼자 하는 말이 더 많아졌다. 질문들. 부당한 것에 대해. 여기, 나, 사람들.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아주 사소한 히어로. 세상을 구원할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구원할 필요가 없는. 빈집의 쓸쓸한 사람. 찢어진 플래카드 아래에 서 있는 할머니. 기억이 찢겨나간 여자. 그 모든 것이 흔들리는 영원한 밤…… 그래도 그렇지, 더 재밌는 얘기도 있겠지 하며 내 책의 표지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 나의 이야기들이다.
첫 소설집의 소설을 쓰던 아주 오래전에, 시위 현장에 있었던 적이 있다. 구호를 선창하던 사람이 너무 절박한 나머지 자기 고향 사투리를 써서 구호를 외쳤었다. ‘……뭐땀새…… 그러는지…… 대답하라.’ 뭐땀새의 앞뒤는 다 잊어버렸다. 그 구호를 따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순간 고요가 내려앉았던 시위 현장, 그리고 뒤늦게 터져나오던 웃음소리가 기억날 뿐이다. 땡볕이 내리쪼이던 한낮, 그 절박한 시위 현장의 조용한 웃음소리. 그러니까, 뭐땀새…… 왜…… 무엇 때문에…… 지난 시간들 속 나의 혼잣말들.
감사드린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그들도 모르게 문득 거리에 멈춰 서 있던 그 모든 분들께. _‘작가의 말’
작가 소개
저 : 김인숙
金仁淑
8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이들의 고민과 방황, 90년대를 대표하는 후일담 문학, 결혼을 둘러싼 여성문제와 가족문제, 그리고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까지 다양한 작품세계와 주제의식의 확장으로 우리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져온 작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서 태어났다. 1967년 5세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이후 하숙을 치는 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숙명여자중학교와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87년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다.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고, 같은 해 장편소설 『핏줄』을 발표하였다. 1985년 장편소설 『불꽃』을 발표하였으며, 1987년 대학시절 민중문화연합 산하의 굿패 '해원'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전3권)가 출간되었다. 1988년 단편소설 『강』을 발표하였으며, 보고문학 『하나 되는 날』로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1989년 단편소설 『가까운 불빛』, 『부정』, 『봄이 오면』을 발표하였고, 1988년 소설집 『칼날과 사랑』을 발표하였다. 1990년에는 중편소설 『한 여자 이야기』와 단편소설 『관리인 차씨』를 발표하였다. 1993년 『칼날과 사랑』을 발표한 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생활하다가 1995년에 귀국하였으며 중국 다롄에 잠시 거주하기도 하였다.
1995년 『먼 길』로 제28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고, 2000년 상처 입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묘사하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대화의 단절을 이야기한 작품, 『개교기념일』로 제45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2003년에는 중국에서 쓴,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중국에 온 여자가 조선족 사람들의 삶을 체험한 뒤 자신의 행복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 『바다와 나비』로 제27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그 외에 2005년에 이수문학상, 2006년에 제14회 대산문학상, 2010년 『안녕, 엘레나』로 제41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주요 작품으로는『함께 걷는 길』, 『칼날과 사랑』, 『유리구두』,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그 여자의 자서전』, 장편소설 『핏줄』, 『불꽃』,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긴 밤, 짧게 다가온 아침』, 『그래서 너를 안는다』, 『시드니 그 푸른 바다에 서다』, 『먼 길』, 『그늘, 깊은 곳』, 『꽃의 기억』, 『우연』 등이 있다.
목 차
아홉번째 파도 _057
토기박물관 _081
넝쿨 _111
단 하루의 영원한 밤 _141
빈집 _169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_197
내 이럴 줄 알았지 _227
해설│양경언
레츠 킵 고잉 _259
작가의 말 _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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