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나는 당신의 외계였을까.”
사라진 꿈과 사랑의 자리를 관망하며
당신과 나 사이, 무수한 절망을 전시하는
유희적 글쓰기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연금술사의 수업시대」가,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여우의 빛」이 당선되며 등단한 이동욱의 첫 번째 소설집 『여우의 빛』이 출간되었다. 만일 당신이 한때는 유일했지만 지금은 희미해진 꿈과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이 상실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태도를 일러 줄 것이다. 수록된 여덟 편의 작품에는 킬러, 열쇠공, 연주자, 드라이버 등 일정한 대상에 몰두해야 하는 ‘기능인’이 등장한다. 킬러가 라이플을 통해 대상을 조준하고 열쇠공이 열쇠 표면의 섬세한 홈들을 살피듯이, 이들은 무심코 흘러가 버린 시간을 독자 앞에 낱낱이 펼쳐 보인다. 그들의 태도는 집요하지만 결코 절박하지 않다. 잃어버린 마음과 대상 들을 되찾겠다는 각오 없이 그저 흐르는 시간 속의 모든 순간을 포착하여 기록하는 데 집중한다. 『여우의 빛』이 보여 주는 집요한 관조의 태도는 상실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계속되는 삶 속에서 생생하게 감각할 것들이 이토록 많이 남아 있음을 일깨워 준다.
■한때의 갈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소설집 『여우의 빛』의 인물들은 소중했던 것을 잃은 뒤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것은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순수한 마음으로 꿈꿨던 소망이 될 수도 있다. 「마이 퍼니 발렌타인」의 주인공은 중고 트럼펫을 구입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트럼펫을 꺼내 닦으며 연주를 시작했던 순간부터 그만두었던 때까지를 반추한다. 「로커룸」의 ‘나’는 이혼을 앞두고 지난해진 부부 관계를 돌아보던 중 아내의 새 연인으로부터 그녀의 사진을 갖고 있다는 은밀한 연락을 받는다. 「프리마 돈나」의 화자는 예고 없이 찾아온 질병에 사로잡혀 병실이 자신의 생명력과 함께 기울어 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과거의 소망을 되찾고자 노력하지 않고, 관계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저 모든 것이 지나가도록 둔다. 「마이 퍼니 발렌타인」의 주인공이 예전의 나와 꼭 닮은 대학생에게 중고 트럼펫을 넘기고, 「프리마 돈나」의 화자가 병원 침상 위에서 친구 아내의 노래를 청해 듣는 것처럼, 스러져 가는 생명력은 또 다른 생명력으로, 잃어버린 꿈은 또 다른 이의 꿈으로 채워진다. 『여우의 빛』이 보여 주는 새로운 세계 인식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삶의 흐름을 분명히 감각하는 순간에 있다.
■깊은 절망으로부터 확장된 존재
『여우의 빛』의 주인공들은 상실로부터 피어난 절망을 피하지 않고 외려 즐긴다. 생채기 난 피부가 작은 자극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처럼 이동욱의 상처 입은 화자들은 예민하게 감각되는 세계를 유희한다. 「여우의 빛」의 주인공은 조직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멘토’였던 L을 죽이는 순간, 빈방이 내뿜는 ‘내가 없는 사이 벽이 참았던 호흡’을 느낀다. 「야간 비행」의 인물은 아내와의 지난한 관계를 뒤집고자 떠난 여행 객실에서 화장실 물이 새는 것을 들으며 가만히 초를 센다. 「아케이드」에서 ‘나’는 갑자기 해외로 떠난 연인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대신 연인이 두고 간 건축학 도서를 읽는다. 건축물의 완벽한 형태를 더듬으며 끝없는 공상에 빠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물들은 절망 이후의 삶에서 새로운 감각들을 길어 올린다. 세계를 해부하듯 조각조각 포착된 감각들은 나아가 상실과 절망까지 작은 입자로 흩트린다. 그리고 작은 입자로 흩어진 절망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우리는 즉각적인 슬픔 너머 삶이 선사하는 수많은 감각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작가 소개
1978년 포항 출생.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연금술사의 수업시대」가,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여우의 빛」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목 차
마이 퍼니 발렌타인 47
애플 시드 77
로커룸 119
야간 비행 153
드라이브 미 189
아케이드 217
프리마 돈나 245
작가의 말 271
작품 해설
이미지 소설과 삶의 관절_ 송종원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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