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나의 삶을 지배한 원체험에 대한 고요한 응시
“그날 이후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1952년 6월 15일, 아버지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 홧김에 낫을 든다. 이어지는 어머니의 비명소리.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모님은 식탁에 앉는다. 흔한 부부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열두 살의 아니 에르노에게 ‘그날의 사건’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난한 노동계층의 외동딸로서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기독교 사립학교에 입학한 에르노에게 부모의 세계와 사립학교의 세계 사이에 놓인 간극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각인시켰다. 가난하고 천박한 부모가 부끄럽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뿌리라는 것.
1996년, 어느덧 중년이 된 에르노는 사십여 년 전의 기억을 다시 꺼냈다. 열두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그날의 사건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에르노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사로잡은 그 원체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1952년으로 돌아간다.
존재의 불편함을 마주하겠다는 칼 같은 각오
“나는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되겠다.”
에르노의 회상은 철저하게 객관적이다. 그날의 사건 전후에 찍힌 자기 사진들, 1952년의 신문 기사들, 전후 재개발이 한창인 작은 도시 이브토, 부모님이 운영했던 식당 겸 식품점을 세세히 묘사한다. 하지만 여기에 감상을 덧칠하거나 추억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에르노는 ‘우리’라고 인식되어온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말투, 행동, 관습을 마치 사회과학 서적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세계, 또 다른 ‘우리’인 기독교 사립학교의 엄격한 규율, 예절, 분위기 또한 같은 방식으로 서술한다. 동일한 형식에 상충되는 내용은 두 세계의 대비를 극적으로 드러내며 개인의 이야기를 계급의식의 문제로 확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으로 존재의 불편함을 변호하거나 순화하지 않는다. 에르노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자신이 천박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갑자기 노래를 멈춘 것을, 친구들 앞에서 더러운 속옷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어머니의 존재가 우스꽝스럽다고 느낀 것을 가차 없이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존재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 에르노의 글쓰기에 대해 신수정 문학평론가는 “어떤 ‘부끄러움’은 어떤 식으로도 발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글쓰기야말로 “부끄러움의 최선의 발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슬프면서도 강하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되겠다는 것”은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의 불편함을 정면으로 응시하겠다는 “칼 같은 각오”이기 때문이다.
가장 ‘아니 에르노’다운 글쓰기
“타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는 책. 나는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
현대문학에서 에르노의 글쓰기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주체의 죽음이라는 거대 담론에 맞서 일인칭 글쓰기를 통해 주체의 귀환을 외친 당시 프랑스 문단에서, 일인칭을 넘어 어떤 과거 윤색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에르노의 ‘자전적 글쓰기’는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전적’이라는 특성은 양날의 검이 되기도 했다.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담은 《남자의 자리》로 1984년 르노도상을 수상한 에르노는 이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인 《한 여자》와 자신의 절절한 사랑 체험을 다룬 《단순한 열정》을 발표했다. 특히 《단순한 열정》은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유부남과의 연애라는 경험담에 쏟아지는 윤리적 비난 또한 피하기 어려웠다. 이와 함께 이전 작품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지나치게 솔직한 관점이 재평가되면서 문단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에르노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자전적 글쓰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부끄러움》을 발표했다. “나는 항상 타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는 책을 쓰고 싶었다”는 에르노는 “칼 같은 각오”로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후 낙태, 실연, 질투 등 경험담의 단순 서술을 넘어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감정을 담아낸 책을 연달아 발표했다.
《부끄러움》은 단순히 사십여 년간 발표된 에르노의 작품 20편 중 하나가 아니다. 자전적 글쓰기의 한계를 단칼에 거부한 전환점이자 작품세계의 근간으로서 각인된 기억, 그 원체험에 담긴 존재의 불편함을 정면으로 응시한, 에르노의 모든 것이 담긴, 가장 ‘아니 에르노’다운 자전적 글쓰기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아니 에르노
1940년 프랑스 르아브르 인근의 작은 공업도시 릴본에서 식품점 겸 식당을 운영하는 뒤셴느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945년 노르망디 이브토로 이사해 기독교 사립학교를 다닌 후 루앙 대학교와 보르도 대학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했다. 1964년 필립 에르노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고, 교원자격증을 취득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다. 이후 문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해 2000년까지 프랑스의 방송통신대학교에 해당하는 CNED에서 문학교수를 역임했다. 1974년 사회적 소외감을 독특한 문체로 표현한 소설 《빈 장롱》으로 데뷔했다. 1983년, 네 번째 소설 《남자의 자리》 에서 개인적 경험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예리하게 해부한 혁신적인 스타일을 인정받아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이때 작가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쓴 작품과 쓸 작품에 일찌감치 ‘자전적’ 요소를 부여했다.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첫 경험(《소녀의 기억》), 사춘기(《그들이 말한 것, 혹은 말하지 않은 것》), 결혼(《얼어붙은 여자》), 낙태(《사건》), 유부남과의 연애(《단순한 열정》), 유방암 투병(《사진의 용도》), 어머니의 알츠하이머 투병(《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과 어머니의 죽음(《한 여자》) 등 인생의 궤적이 가감없이 담겨 있다. 특히 《단순한 열정》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사랑과 함께 받은 윤리적 비난을 극복한 작품이 바로 오 년 후 발표한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가난한 노동계급으로서의 부모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급스러운 기독교 사립학교를 오가며 보낸 유년 시절로 이어지며 내면 깊이 자리한 수치심을 응시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문학사상 가장 충격적인 첫 문장 중 하나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는데, 이 사건은 작가에게도 반드시 한 번은 말해야 하는 근간이자 ‘원체험’이었다. 작가는 《부끄러움》으로 자신의 치부를 열어 보이고, 보다 자유로운 글쓰기로 한발 나아갔다. 자전적, 전기적, 사회학적 글이라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로 ‘칼 같은 글쓰기’라는 수식어를 얻은 작가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문학상(2008), 프랑수아 모리아크 문학상(2008),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문학상(2017)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생존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2003년 작가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었고 2011년 갈리마르 총서에 선집 《삶을 쓰다》가 포함되는 등 프랑스 최고의 작가로 꼽히고 있다.
옮긴이 : 이재룡
195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란 쿤데라, 누보로망 이후 신경향 소설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장 에슈노즈와 장 필립 투생 등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것을 비롯해 외젠 이오네스코, 르 클레지오, 미르체아 엘리아데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고 알렸다. 현재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평론가로도 활발히 활동하면서 프랑스 문학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이 있고, 옮긴 책으로 조엘 에글로프의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장 필립 투생의 《사랑하기》 《도망치기》 《욕조》 《사진기》를 비롯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일 년》 《거대한 고독》 《고야의 유령》 《모더니티의 다섯개 역설》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 《벵갈의 밤》 《장엄 호텔》 《슬픈 흰곰의 노래》 《로즈의 편지》 《가을 기다림》 《외로운 남자》 《길고도 가벼운 사랑》 《이별연습》 《포옹》 《오니샤》 《불확정성의 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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