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최초로 출판되는 노천명 소설
한국 현대시의 가장 아픈 상처 노천명 문학의 종결판!!
국립도서관 보존문서/일제강점기 신문잡지에 묻혀 있었던
노천명 소설과 수필, 시 민윤기 시인이 대대적 발굴해 수록!
“작품 속에는 연둣빛 수채화 같은 은은한 삶의 향기가 풍긴다”_시인 정지용
“올해 소설을 하나 써보려고 했던 것이 은근히 내가 벼르고 있던 계획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이 하고 싶은 일은 날마다 쫓기는 일에 무참히도 고개조차 들어보지 못한 채 이 해를 보내게 되었다. 소설을 쓰려는 의도는 내가 시를 쓰는 일에 하등 지장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손도 대지 못한 광우리 속의 숱한 일감 중에서 일감을 잡을 여유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집어 들고 싶은 일거리가 소설을 쓰는 일이다.”
이 글은 노천명 시인이 죽기 한 해 전인 1956년 12월 31일자 조선일보에 「올해 못한 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수필의 일부이다. 그만큼 노천명 시인은 평생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것이다.
노천명이 발표한 소설은 여덟 편이다. 이미 나와 있는 노천명 작품에 수록이 되어 알려진 소설은 여섯 편인데 이번에 노천명 전집 종결판을 기획하면서 새로 찾아낸 명품소설 두 편을 추가해 최초로 출간되는 노천명 소설을 단행본으로 엮어 발행했다.
노천명 시인은 평생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어느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자 했던 사슴의 여인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암흑시대의 희생자
여기에 수록된 8편의 소설은 노천명 시인이 그 당시 신문잡지에 기고했던 작품들이다. 보물 같은 이 소설들은 보존문서 속에 파묻혀 잊혀 질 뻔한 작품들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민윤기 회장의 노력으로 찾아내 정리하여 공개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장雨葬」의 작품성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필적하는 향토성 짙은 뛰어난 소설로도 평가하고 있다.
노천명이 사랑했던 세 명의 남자
남자들에게 까칠하게 대했던 노천명도 여자였다. 1938년 스물일곱의 노천명은 문인들이 출연하는 연극 무대에 서게 된다. 이 해에 그는 최정희가 사표를 냄으로써 공석이 된 조선일보 발행 월간잡지 ‘여성’에서 근무한다. 이 무렵 극예술연구회에 참여,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앵화원櫻花園, 벚꽃동산>에서 모윤숙이 맡은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 역을 맡아 연극 무대에 섰다. 이날 무대에서 노천명이 열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보성전문 경제학과 교수 김광진(1902~1986)은 그만 노천명에게 반하게 된다. 김광진은 연극이 끝나자 노천명에게 꽃다발을 전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었다. 노천명은 시인 김기림의 구애도 칼같이 거절했을 만큼 까칠하고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의외로 김광진의 구애에는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안타깝게도 김광진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김광진은 노천명에게, 아내와 이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김광진은 노천명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상처를 입었는데도 노천명은 다시 두 번째 사랑을 하게 된다. 어느 파티에서 이성실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이성실은 193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던 ‘고향의 하늘’ ‘울지는 않아요’ ‘방랑자의 노래’ 등을 작곡한 작곡가 겸 가수였다. 파티가 끝나고 나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우산을 가지고 있던 이성실은 노천명과 같이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날 이후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성실 역시 유부남이었다. 김광진처럼 이성실도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천명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선택한다.
그 무렵 노천명은 안국동에 살던 집을 언니에게 내주고 누하동에 집을 사기 전이어서 옥인동에 사는 김수임(1911~1950)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김수임은 일제 강점기와 군정시대의 공산주의자이며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여성이다. 그런데 김수임은 노천명이 평양에서 김광진과 만날 때 함께 자주 어울린 사람 중 한 명이다. 아무튼 노천명을 잊지 못한 이성실은 밤이면 밤마다 옥인동 김수임의 집에 찾아와 노천명을 만나려 했으나 끝내 노천명은 만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랑의 주인공은 (이것은 필자의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 유명한 시인 백석(1912∼1996)이다. 이화여전 동기인 모윤숙과 선배 기자이자 친구였던 최정희, 동료기자 이선희와 함께 백석을 자주 만났다. 이 네 사람은 입을 모아 백석을 ‘사슴’이라고 불렀다. 잘 생기고, 잘 배우고, 유능한 백석에게 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노천명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 「사슴」은 백석을 위한 것이라는 평판도 있었다. 백석이 근무했던 영생고보 1939년 졸업생인 김희모 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백석 선생님은 너무도 잘생긴 모습에 반할 정도였다. 머리는 올백을 하고 연회색의 산뜻한 양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당시에 학교 선생들은 사회의 지도층 인사였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지만, 나이 어린 백석 선생님은 시인으로, 그리고 그 외모로 더욱 유명했다.”
이렇듯 백석은 여성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받았다. 당시 모윤숙은 백석을 이상형으로 생각한다고 했고, 노천명 역시 그를 바람직한 시인의 모델이면서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의 시 「사슴」전문, 1938
우정을 나누웠던 문인들의 모임
조선 후기의 뛰어난 학자이며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에게는 시詩짓기 모임 ‘죽란시사竹欄詩社’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시 짓기 모임을 가지곤 하였는데, 모이는 날짜가 매우 시적이었다. 그들은 ‘살구꽃이 처음 피면 모이고/ 복숭화꽃이 처음 피면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 서대문 밖에 있던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모이고/ 국화가 피면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모이고/ 연말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모인다’는 것이었다.
노천명에게도 이런 모임이 있었다. 당시 그녀와 친했던 여류문인들은 최정희(소설가, 1906~1990), 이선희(소설가, 기자 1911∼?), 모윤숙(시인, 1909~1990) 등이었다. 그들은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서로 찾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서로 찾았으며, 서로 찾지 못하는 때면 편지로써 마음을 서로 알렸다”고 했다.
특히 노천명은 소설가 최정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한국전쟁 1.4후퇴 때 세간 살림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도 최정희와 주고받은 편지는 꼭 가지고 피난 갔을 정도였다. 모윤숙은 노천명이 사망하기 며칠 전 집으로 찾아와 자신이 외국 출장이 있으니깐 귀국할 때까지 건강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노천명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노천명
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엮은이 : 민윤기
1966년 월간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55년째 현역시인으로 시를 쓰고 있다. 등단 초기에는 「만적」 「김시습」 「전봉준」 같은 시를 발표해 ‘역사참여주의’ 시인으로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군 입대 후 베트남전쟁에 종군, 이 체험을 살려 「내가 가담하지 않은 전쟁」 연작시 30여 편을 발표했다. 1974년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시집 『유민(流民)』을 출간했으나 1970년대 후반 군사정권 독재정치 상황으로 ‘시는 쓰되 발표를 하지 않는’ 상태로 20년간은 신문 잡지 출판 편집자로 일하였다. 2011년 오세훈 시장 시절 수도권 지하철 시 관리 용역을 맡으면서 시 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2014년 시의 대중화운동을 위하여 서울시인협회를 창립하였고 같은 해 1월 시전문지 월간 ‘시’를 창간했다.
최근 저서로는 『평생 시를 쓰고 말았다』 『다음 생에 만나고 싶은 시인을 찾아서』 『서서, 울고 싶은 날이 많다』 『삶에서 꿈으로』 『시는 시다』 『박인환 전 시집』 등이 있다.
목 차
들어가는 말 | 만년에는 시보다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
일러두기
1. 단편소설
사월이
우장雨葬
오산誤算이었다
외로운 사람들
결혼 전후
하숙
일편단심
닭 쫓던 개
2. 인물평전
인간 월탄月灘
전원시인 김상용
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
샘골의 천사 최용신 양의 반생半生
오월의 여왕
3. 문학론
시詩의 소재에 관하여
문학의 처녀지處女地로
시詩와 난해성難解性
익명匿名 비평의 유행에 대하여
우리 예술 확립에로 매진하자
한하운 시집 『보리피리』 서평
의제 좌익擬制左翼
4. 일기
일기
병상일기
부록
노천명 생애(1912-1957)
노천명의 생애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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