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손영목 작가의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사실주의 문학인 동시에 환상문학이다. -장경렬(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작품의 상당수가 넓게 보아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유형 별로 세분하면 네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몽환적 또는 환상적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사실주의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안개의 우수」, 「밀랍인형들의 집」이다. 둘째, 현실의 삶에 환상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작품으로, 「슬픈 인어」, 「용굴」, 「죽음에 관한 명상」이다. 셋째, 현실의 삶에 관한 이야기 속에 ‘정신 현상’으로서의 꿈이 ‘액자 형태’로 삽입된 작품으로, 「잿빛 안개 저편」, 「스틸라이프」, 「백제성에서」이다. 넷째, 현실의 삶이 투영된 꿈이 이른바 ‘정신 현상’의 소재가 되는 작품으로, 「미로에서」, 「고사나목과 광진역」, 「탈출구」, 「종말과 구원에 관하여」가 있다.
「안개의 우수」와 「밀랍인형들의 집」은 현실 세계 안으로 환상적 요소가 유입되고 있다기보다 현실 세계 자체가 환상 세계만큼이나 비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안개의 우수」는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여자”와 작중화자인 ‘나’ 사이의 “꿈이나 환상”과도 같은 만남을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 현실 세계를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와도 같이 환상적 또는 비현실적 분위기가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밀랍인형들의 집」을 지배하는 것도 환상적 또는 비현실적 분위기이지만, 이는 “짙은 안개”와 같은 것이라기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에서 감지되는 썰렁한 냉기와도 같은 것이다. 남자와의 동거 끝에 헤어져 “정신적인 안정에 앞서 생활의 안정이 시급”한 여자, “당장 먹고 자는 문제가 시급”한 “서미영”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직업소개소의 주선으로 일자리를 얻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정상인으로 보이는 인간 또는 인간들이 억누르거나 감추고 있는 병적 심리가 마침내 걷잡을 수 없이 기괴하고 난폭하게 폭발하는 작품이다. 이런 일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인간의 현실 세계는 환상 세계보다 더 환상적인 것일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용굴」과 「죽음에 관한 명상」과 마찬가지로 「슬픈 인어」의 배경을 이루는 것도 일상적 삶의 현장이다. 「슬픈 인어」에서 작가는 이성에 눈뜰 무렵인 한 소년의 입장에서 “네 살이나 다섯 살 연상”인 이웃집 소녀와의 은밀한 만남을 섬세하고 시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소녀가 “갑자기 마을에서 종적을 감”추고, 뒤이어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었지만,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소년에게 그 소녀가 인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같은 설정을 통해 환상적 요소가 사실적인 현실 세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작품이다. 「죽음에 관한 명상」은 한 소년이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영원한 테마’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러던 그가 “아버지 심부름으로 담뱃가게에 다녀”오러 나갔다가 “들판 한가운데”서 “알갱이가 먼지처럼 작으면서도 촘촘하게 밀집해 광휘가 훨씬 뚜렷한 그 노르스름한 빛의 덩이”를 목격하게 된다. 소년은 “도깨비불”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세상에 도깨비가 어디 있어”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덧 담배 심부름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불을 따라잡는 데만 온 정신을 몰두”한다. 이를 따라가다 결국 소년은 죽은 할머니와 만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러면서 ‘도깨비가 없는 세상’ 속으로 도깨비가 존재할 법한 환상 세계가 슬그머니 끼어든다. 「용굴」은 고향마을에 있는 ‘용굴’이 개발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소식으로 인해 작중화자가 이에 얽힌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린 그의 주변에는 “나이에 비해 체구가 커서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해 또래 중에서는 왕초”인 “상도”라는 아이가 있다. “그로 말미암은 가장 큰 피해자”는 작중화자인 ‘나’와 ‘나’의 친구인 “윤조”와 “재철”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지긋지긋한 굴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의해 상도를 “용굴에 집어넣자고” 설득한다. 마침내 설득을 당한 두 친구와 함께 ‘나’는 각본에 따라 시도를 하지만 첫 번째는 실패하고 두 번째 “용굴에 들어가 물이 다 찰 때까지 있다가 나오는” 모험을 상도에게 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용굴에 들어간 상도가 나오지 않는다. 실종된 상도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상도가 평상시나 다름없는 생생한 모습으로 나를 불쑥 찾아와 자신이 “용굴의 주인”인 “용”이 되었음을 밝힌다. 상도와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나’는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비참한 자신을 눈물로써 자책하는 일뿐”이라는 생각에 몰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작가는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상도가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와 대화를 주고받는 이야기를 꿈속의 환상 체험으로 분장하지 않는다. “엄연한 현실”의 일부인 양 담담하게 서술을 이어갈 뿐이다. 작가는 논리와 합리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신비롭고도 이상야릇한 이야기로, 한국적인 마술적 사실주의를 생생하게 감지케 한다.
「잿빛 안개 저편」, 「스틸라이프」, 「백제성에서」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 나름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잿빛 안개 저편」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3학년생인 아이로, 이 아이는 학교 가기를 지겨워하고 공부도 하기 싫어한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시험 성적도 나쁘고 드센 아이와 한 바탕 싸움질을 한데다가 청소 당번에 걸려, “우울하고 슬픈 기분으로” 혼자 늦은 귀갓길에 오르면서 서술이 전개된다. 「스틸라이프」의 주인공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는 한 남자로, 아침에서 저녁까지 그의 하루 삶이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다. 「백제성에서」의 주인공은 “여행을 황혼녘 삶의 질을 높이는 무슨 필수요건처럼 여기는 안식구”를 거느린 남자로, “안식구”를 따라 중국으로 “해외여행”을 떠나서 겪은 이야기이다. 이처럼 세 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실 속의 평범한 인물의 평범한 삶이다. 그런 그들이 현실의 삶 한가운데서 꾸는 꿈이 현실의 삶 자체에 대한 이야기 안에 ‘액자 형태’로 삽입되고 있다. 특히 「백제성에서」는 손영목 작가 특유의 작가적 숨결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작가 나름의 탐구가 예리하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정신 현상’으로서의 꿈 그 자체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미로에서」, 「고사나목과 광진역」, 「탈출구」, 「종말과 구원에 관하여」를 볼 수 있다. 이 네 편의 작품은 그 자체가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꾸는 일상의 꿈을 소재로 하고 있다. 「미로에서」의 주제는 집으로 가려고 애를 쓰지만 끝내 집에 이를 수 없는 “어린아이”의 절망감과 슬픔이다. 「고사나목과 광진역」에서도 주제는 길을 잃은 인간의 절망감과 슬픔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소재는 다르다. 「탈출구」에서도 “땅속의 거대하고 기다란 공간, 지하도로나 지하철도의 공사현장 같은 곳”에서 “출구”를 찾는 인간이 이를 제대로 찾지 못해 헤맬 때 느낄 법한 절망감과 슬픔이 주제이다. 「종말과 구원에 관하여」에서도 작중화자가 길을 헤매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되짚어보건대, 그 꿈이 어째서 나를 거기에 데려갔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되고,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아, 정말이지 그 꿈이 나를 거기로 데려간 까닭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다시 제기한다. 이처럼 현실 속의 작중화자인 ‘내’가 꾸는 꿈이 ‘액자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나’는 꿈속에서 “거대한 도시”로 “데려”가져, “폐허가 되어가는 중인지, 진행이 멈춘 폐허 그 자체인지를 단정적으로 말하기 뭣하게 어수선하고 너저분한 풍경”의 도시 한가운데서 방황을 이어간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아무런 동요나 의심도 없이 순순히 안내인을 따라가 어느 집을 방문”하여, “마리아 발토르타”라는 여인과 만난다. 마리아 발토르타는 1897년에 태어나 1961년에 사망한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시인으로, 그녀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현현이라는 신비를 체험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신비 체험에 근거한 저서가 바로 꿈속의 ‘내’가 언급하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인 「사람이요 하느님인 분의 시」다. 마리아 발토르다와 마주한 ‘나’는 “카오스를 거쳐 태초의 영원 세계로 돌아”갈 “인류 문명”에 관해 의견을 나눈다. 이윽고 그녀를 뒤로 하고 거리에 들어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검투사”의 “결투”가 일어나고 있고 “객석”의 “군중”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로마식 원형경기장”에 들어선다. 마침내 그 경기장에서 나오는 것으로 꿈은 종결된다.
손영목의 작가의 연작소설집 「꿈, 그리고 환상」은 꿈과 환상이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현실 세계 안에서 교직되어 있다. 바로 그 시점 또는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이를 문제화한 것이 손영목 작가의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로, 이는 사실주의 문학인 동시에 환상 문학이다. 손영목 작가가 펼쳐 보이는 이른바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의 경계와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낯설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지평을 기존의 소설 문학계에 열어 보이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손영목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7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82년 경향신문 장편소설 당선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
2004년 한국문학상 수상
2007년 채만식문학상 수상
2019년 계간문예문학상 당선
2024년 탄리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이사장직무대행(역임)
한국문인협회 이사·문협60년사편찬위원장(역임)
목 차
안개의 우수 -꿈, 그리고 환상 1
밀랍인형들의 집 -꿈, 그리고 환상 2
잿빛 안개 저편 -꿈, 그리고 환상 3
슬픈 인어 -꿈, 그리고 환상 4
미로에서 -꿈, 그리고 환상 5
용굴 -꿈, 그리고 환상 6
환상여행 -꿈, 그리고 환상 7
죽음에 관한 명상-꿈, 그리고 환상 8
스틸라이프 -꿈, 그리고 환상 9
고사나목과 광진역 -꿈, 그리고 환상 10
백제성에서 -꿈, 그리고 환상 11
탈출구 -꿈, 그리고 환상 12
종말과 구원에 관하여 -꿈, 그리고 환상 13
작품론
현실과 환상 또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_ 장경렬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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